Level 12. 메인 퀘스트 : 쭉정이는 가라 (06)
열음 언니가 쓰러지는 걸 보자마자, 나는 뒤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달려갔다.
“언니!”
아니, 날아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
열음 언니의 상태는 심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파리한 안색으로 거친 숨을 가까스로 내쉬고 있었다.
목숨이 위험하진 않아도, 저주로 인한 고통과 과로, 심적인 충격이 더해져 완전히 기진한 상태.
전부 저 당근 꼬다리가 아픈 언니를 괴롭힌 결과였다.
‘그냥 안 둘 거야.’
미리 스킬로 확인해 둔 열음 언니의 저주는 예상보다 등급이 높았다.
[이름: 아멘다 에아루스(무열음).]
[상태 이상: 석화의 저주(A급)]
C급 이상이면 자연적인 회복력으로는 아예 벗어날 수 없다.
하물며 A급이라면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이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태인 언니를 이렇게 괴롭히다니! 용서 못 해!
나는 당근 꼬다리를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내 진심 어린 살기에 뭐라고 소리치려던 당근 꼬다리가 움찔하며 굳는 것이 보였다.
실전 따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애송이가 쉬이 견디기 힘든 위압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열음 언니가 우선이다.
나는 당근 꼬다리에게서 주의를 거두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내 마력으로 열음 언니를 치료하려는 건 아니었다. 소용없으므로.
내 마력에는 치유의 힘이 없었고, 정화 능력은 당연히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아무 이유 없이 마력을 끌어올린 건 아니었다.
‘빛나라, 사이키 조명!’
마력 전체를 빛으로만 바꾸어 온 사방으로 내뿜었다.
“악! 누, 눈부셔!”
“엄청난 빛이에요!”
갑작스럽게 강렬한 빛에 노출되면, 다들 눈을 감거나 손으로 가리게 된다.
내가 원한 게 그거였다.
일시적으로 이곳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의 시각을 빼앗는 것.
그리고, 그사이에 나는 ‘손은 눈보다 빠르다’를 직접 실천했다.
인벤토리에서 빼낸 유리병 두 개를 재빠르게 언니의 입에 흘려 넣은 것이다.
처음 먹인 것의 이름은.
[아이템 명 : ‘저주 정화 포션’(A급)]
[효과 : 모든 종류의 저주(동일 등급 이하)를 정화한다]
뭐도 약에 쓸 데가 있다더니, 이렇게 쓸모가 생길 줄은 몰랐다.
그동안의 무수한 서브 퀘스트 혹은 돌발 퀘스트, 일일 퀘스트 등에서 보상으로 나왔던 게 바로 성장 포션, 저주 정화 포션, 해독 포션 등등 잡스러운 아이템이었다.
주로 D급에서 B급 사이의 물건들로, 언젠가 쓸모가 생길까 싶어서 안 버렸던 거다.
그걸 싸그리 모아 합성한 다음 A급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포션 몇 개가 사라졌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남을 정도로 포션은 많았고, A급 포션을 만들어 내는 데에 성공했으니 문제없다!
‘어엄처엉 노가다긴 했지만…….’
숨길 수 없는 한국인의 영혼을 가진 내게 노가다는 숙명과 같은 것!
어쨌든 A급 저주 정화 포션의 효과는 확실했다.
순식간에 언니의 시스템 정보에서 ‘석화의 저주’가 사라졌다.
치마를 살짝 들어 확인해 보니 언니의 다리는 정상적인 사람의 살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좋았어!’
그리고 언니에게 하나 더 먹인 것은 낮은 등급의 체력 포션이었다.
기절할 정도로 약해진 심신을 빠르게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두 포션의 효과가 바로 나타났는지, 언니의 안색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호흡도 편해졌다.
그쯤에서 나는 사람들의 시력을 공격하기 위해 내쏘고 있던 빛을 거두어들였다.
사이키 조명처럼 번쩍거리던 태양석도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뭘 하는지 알아챈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같은 태양의 마력을 가진 황족들은 내가 내쏜 빛에 면역을 가졌다.
그러니까 아빠와 오빠는 내가 하는 걸 봤다는 소리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날 방해할 리 없으니 문제없다.
둘 다 놀라긴 하겠지만, 내가 설명해 주면 고개를 끄덕여 주겠지.
당근 꼬다리는, 봐도 상관없다. 내가 뭘 먹였다고 해도 그게 뭐?
나는 보란 듯 당근 꼬다리에게 혀를 쏙 내밀어 주고는, 열음 언니에게 다시 주의를 집중했다.
“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당근 꼬다리의 약 오른 비명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내가 사방의 눈을 가리기 위해 내쏜 빛이 잦아들고.
슬슬 참관인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한 중년 남성이었다.
“아멘다! 아멘다!”
아, 아는 얼굴이다. 그것도 전생에서부터.
[이름: 칼 에아루스(무영한).]
[지위 : 에아루스 후작]
열음 언니의 아빠다.
전생에도 영한 아저씨는 국내 1위 기업의 총수였다.
아내와 자식을 몬스터에게 잃고, 내가 열음 언니를 구해 준 뒤로, 영한 아저씨는 나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하나가 되었다.
열음 언니가 각성했지만 생산계라 전투 능력이 없는 걸 알게 된 뒤에는, 나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기까지 했었다.
“부디 열음이를 지켜다오. 못난 아비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구나.”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최선을 다해 열음 언니를 지켰다.
언니는 그럴 만한 가치를 가진 헌터였고, 동시에 나와 가장 친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땐 끝까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내가 던전 공략에 참여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열음 언니가 암살당하고 만 것이다.
‘이번엔 다를 거야. 절대로.’
영한 아저씨. 현생의 에아루스 후작은 하나뿐인 딸을 끌어안고 애타게 외쳤다.
“정신을 차려라, 아멘다!”
그는 나를 경계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현재 에아루스 후작가는 당근 꼬다리에게 붙은 모양새였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은 정적에 가까우니까.
그런데 갑자기 쓰러진 아멘다에게 내가 달려온 것에 놀라고 경계할 수밖에 없으리라.
어찌 보면 무례라 볼 수 있는 후작의 의심에도 나는 화내지 않았다.
전생의 영한 아저씨는 딸의 장례식에서도 화내거나 나를 탓하지 않았으니까.
“미안해요, 아저씨. 내가 언니를 지켜 줘야 했는데…….”
“…아니다. 아니야. 네 덕분에 열음이가 몇 번이나 목숨을 구했는데. 네가 아니었으면 이때까지 열음이와 내가 살아 있지도 못했을 텐데. 그동안…… 정말로 고마웠다.”
그걸 기억하니 화가 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환하게 웃으며 후작에게 말했다.
전생에 하지 못했던 말을.
“괜찮아요. 이제 괜찮을 거예요.”
그러자 후작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깨달은 듯했다.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난 언니의 다리가 멀쩡한 것을 확인한 것이다.
“다, 다리가! 아멘다의 다리가……!”
아저씨의 목소리는 감격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
곧 이 깨달음은 주변으로 번져나갔다.
에아루스 영애가 받은 저주는 꽤 유명했고, 이번에 세실리아 대공녀가 드러낸 정화 능력과 엮여 더 유명해진 참이었다.
그런데 에아루스 영애의 다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저주의 흔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극적인 변화.
게다가 이 변화는, 황녀의 엄청난 마력 발현 이후에 일어났다.
그렇다면 누구나 이렇게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황녀께서 저주 정화의 능력을 가지셨던 건가?! 대공녀가 아니라?’
조금 다르긴 했지만 아나트리샤가 에아루스 영애의 저주를 정화한 건 사실이니, 큰 차이는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를 깨닫고 대공 부부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대공비는 뒤를 생각하지 않고 외쳤다.
“세, 세실리아 덕분이야! 조금 전에 세실리아가 정화의 마력을 쓴 여파가 분명해요!”
대공비는 진심으로 그리 믿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꼴사납게 널브러져 있는 세실리아의 경악한 표정이 이미 말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에아루스 영애의 저주 정화가 세실리아 덕이 아니라는 걸.
파셀 백작 피오나가 비웃음을 굳이 참지 않고 대꾸했다.
“조금 전 대공녀가 정화하려 한 건 나스카의 왕자라는 걸 모두가 보았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대공녀가 정작 바로 앞에 있는 왕자는 정화 못 하고 한참 떨어져 있던 에아루스 영애를 정화했다는 건데, 말이 되나요?”
“그건 그래요.”
“게다가 다들 봤잖아요. 황녀님의 엄청난 마력을.”
“눈이 부실 정도였죠.”
놀라움과 경외감이 곧 어린 황녀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의문은 후작이 황녀에게 한 질문으로 해소되었다.
“황녀님이십니까? 황녀님께서 제 딸의 저주를 풀어 주신 겁니까?”
그러자 일곱 살짜리 황녀는 귀여운 뺨을 핑크색으로 물들이고 웃었다.
“응!”
에아루스 후작이 딸을 안은 채 황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황금의 에아루스’가, 황제 이외의 사람에게 무릎을 꿇었다.
공개적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딸을 살리기 위해 세실리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적 있지만, 이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니까.
역대 에아루스 후작들은 황위 계승 다툼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황제가 아니면 황족이라 해도 굴복하거나 충성을 바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지금 에아루스 후작이 겨우 일곱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황녀님. 우리 에아루스 가문은 결코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후작은 깊이 고개를 숙여 황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모두가 놀라고 또 이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 애쓰는 사이.
하나의 이변이 홀 안에서 또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나스카의 장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와, 왕자님! 왕자님!”
에아루스 후작 부녀와 황녀에게 모였던 시선이, 이번에는 나스카의 왕자에게로 몰렸다.
창백한 소년의 손이 관의 가장자리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