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4/218)

Level 12. 메인 퀘스트 : 쭉정이는 가라 (07)

반쯤 열려 있던 관 뚜껑이 밀려 옆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음을 냈다.

쿵!

아나트리샤는 그 소리가, 마치 제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바보 같고 어이없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소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밀려 올라가고, 두어 번 눈을 깜빡거린다.

그때마다 까만 속눈썹이 나풀거려, 검은 나비가 춤추는 것처럼 보였다.

눈처럼 흰 눈꺼풀과 밤처럼 어두운 속눈썹 사이에, 용의 보물처럼 숨겨져 있던 금빛 눈동자가 빛났다.

사람보단 파충류를 닮은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이질적이었다.

대부분의 나스카인들이 기이한 눈을 가졌지만, 소년의 눈은 그중에서도 가장 인간과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매혹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 저 눈은 전생과 다르네.’

지금의 그가 기억과 조금 다르다는 사실이 아쉬운 건지, 혹은 기쁜 건지 알 수 없었다.

전생부터 현생까지 이어지는 인연을 가진 이들 중, 아나트리샤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나트리샤는 엄청나게 당황하고 있었다.

‘네가 지금 왜 일어나는 건데?!’

그녀는 미하일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

관 속에서 인형처럼 누워 있던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내내 잠들어 있느라 힘이 모자란지, 관에 기댄 채로도 소년은 잠시 비틀거렸다.

“왕자님!”

“세상에, 미하일 님!”

“아아! 나스카시여!”

나스카인들은 마치 부모를 만난 어린아이처럼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왕자의 상태를 살피고 걱정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너무나도 의외의 일이었기에 놀라움은 몇 발짝 늦게 사방으로 퍼졌다.

“세상에! 나스카의 왕자가 일어났어요!”

“저주가 풀린 건가요?”

“그, 그러면 세실리아 대공녀의 정화 능력은……,”

조금 전까지 에아루스 후작과 황녀에게 모여 있던 주의가, 일시에 세실리아에게 집중된다.

망연자실하던 세실리아는 재빠르게 이 변화를 눈치챘다.

조금 전까지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머리 위로 광명이 비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실패했을 리 없어!’

그렇다. 그녀는 성공한 것이다.

그저 나스카의 왕자가 회복되는 것이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것이 세실리아의 잘못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일어났으니, 세실리아는 충분히 용서해 줄 용의가 있었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내 능력이 진짜라는 걸!’

한발 더 나아가.

‘나만이 황녀로서 자격이 있다는 걸!’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구르던 루비가 박힌 티아라를 집어 들어 머리에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분만은 황제의 관을 직접 머리에 쓰는 듯했다.

제대로 거울을 보지도 못했고 주변의 도움도 없었기에, 비뚤어진 채 헝클어진 머리 위에 얹힌 것이 전부였다.

아름답다거나 우아하다거나 위엄이 넘치지도 않았다.

차라리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에 가까웠지만, 세실리아만은 제 꼴을 전혀 몰랐다.

그녀는 짐짓 우아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왕자께서, 눈을 뜨셨군요.”

조금 전까지 자신을 비웃던 이들을 하나하나 노려보면서.

그리고 황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폐하, 보셨지요? 나스카의 왕자가 눈을 떴어요. 폐하의 기대에 이 세실리아가 부응했다고요!”

“…….”

황제는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며 호소했다.

“이제 인정해 주세요. 제가 증명한 능력에 걸맞은 대가를. 약속하신 대로 제게 주세요! 황녀의 자리를!”

그리고 고개를 팩하니 돌렸다. 방금 일어난 나스카의 왕자와, 그 옆에 몰려든 나스카인들을 향해.

세실리아의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이 나스카의 장로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 감히 너희 왕자의 은인이자, 루스템의 황녀인 나를 비난하고 모욕했겠다!”

소년을 부축하고 있던 장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용서할 수 없어! 어서 사죄하지 못해?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

장로를 대하는 세실리아의 무례함과 억지에 나스카인들 모두가 불쾌해했다.

하지만, 그들의 주인인 미하일이 눈을 뜬 건 사실이다.

그 직전에 세실리아가 미하일에게 정화의 힘을 쓴 것도.

“역시 대공녀님이 나스카 왕자의 저주를 정화한 거죠?”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당연히 이런 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면 대공녀께서 능력 증명에 성공하신 거네요.”

“대공녀께서 황녀에 책봉되셔야 마땅해요!”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황녀님께서도 에아루스 영애의 저주를 정화하셨어요. 다들 보셨잖아요!”

이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에아루스 영애의 다리에 남아 있던 ‘석화의 저주’가 사라진 걸 보았다.

황녀 본인도 자신이 에아루스 영애의 저주를 정화했다고 말했고.

그렇다면 황녀도 대공녀도 모두 정화의 힘을 보여 준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능력의 증명’은 어떻게 되는 거죠?”

분명히 황녀와 대공녀 사이에 ‘능력의 증명’ 의식이 성립되었다.

이제 승자와 패자가 나뉘어야 했다. 승자는 모든 것을 얻겠지만 패자는 다 잃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어느 쪽이 승자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대공비가 나섰다.

“내 딸이 이겼어요! 세실리아가 정화 능력을 증명하지 않았나요! 그것도, 나스카의 왕자가 태어나서부터 얻었던 저주를 정화했어요! 이걸 어떻게 에아루스 영애의 작은 엄살 따위를 해결해 준 것과 비교할 수 있겠어요! 일단 왕자와 후작 영애라니, 신분부터가 다른데!”

저주 피해자의 신분은 아무런 연관이 없건만, 대공비는 그리 주장했다.

에아루스 후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문이 모욕당한 것도 분노할 만한데, 그를 가장 화나게 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엄살이라고? 방금 엄살이라고 했소? 아멘다가 얼마나 고통받았는데, 감히……!”

후작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대공비는 움찔했다.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는데, 그 자체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이건 분명 세실리아가 이긴 거예요! 그러니 폐하께서는 약속을 지키세요!”

대공비는 야비하게 웃으며 물었다.

“설마 루스템 제국의 황제께서 직접 말씀하신 약속을 어기지는 않으시겠지요?”

“말을 삼가세요, 대공비! 황제 폐하께 그 무슨 망발이신가요!”

파셀 백작 피오나가 나서자, 대공비는 피식 웃으며 비꼬았다.

“아, 여기 사죄할 사람이 하나 더 있군요. 조금 전 파셀 백작이 한 말도 다들 들었어요. 감히 내 딸을 조롱했죠! 고귀한 루스템의 황녀를!”

하지만 피오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그저 사실을 지적했던 것뿐이에요. 아까 대공비께서는 대공녀의 정화 능력 덕분에 에아루스 영애가 나았다고 우기셨으니까요.”

“……!”

“그리고 아직 대공녀께서 황녀로 책봉되실지는 알 수 없지요.”

하지만 대공비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일생일대의 희열을 맛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딸이 해냈어! 아무리 황제라도 세실리아를 황녀로 인정하지 않고는 못 배길걸! 그리고 이제…… 나는 황제의 어머니가 되는 거야!’

대공비는 딸의 뒤에 서서 당당하게 외쳤다.

“어서 인정해 주세요, 폐하! 그리고, 내 딸을 모욕한 작자들은 모두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할 거야!”

거의 발악에 가까웠다.

세실리아는 어머니의 추태를 말릴 생각이 없었다.

똑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똑바로 뜨고, 허리를 곧게 폈다.

황제는 여전히 묵묵부답인 상태.

에아루스 영애 옆에 서서, 영애의 상태를 확인 중인 황녀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스카의 왕자가 일어난 걸 본 직후부터, 망연자실한 상태인 게 분명했다.

황제와 황녀의 침묵을, 세실리아 모녀는 그들의 패배 인정으로 받아들였다.

‘저들도 할 말이 없는 거겠지.’

이미 결과는 나왔다.

‘내 승리야.’

‘우리의 승리야.’

모녀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는 사이.

몇 발 늦게 벨론드 대공 또한 딸과 아내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늘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던 이복동생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나스카의 장로가 나섰다.

“제가 나스카인의 대표로 대공녀께 사죄드리겠습니다.”

어쨌건 그들의 왕자가 저주에서 벗어나 일어났다. 아무리 상대가 무도하고 억지를 부려도,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장로는 옆에 선 다른 나스카인에게 왕자를 맡기고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장로의 시도는 행동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처음 듣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막아섰기 때문이다.

“멈춰, 로겐.”

“……왕자님!”

나스카의 왕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악기가 우는 듯한 미성.

소년은 비틀거리면서도 천천히 일어나 제 발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은인에게는 내가 직접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지.”

세실리아의 얼굴에 희열이 어렸다.

왕자는 주변의 시중을 거절한 채, 직접 땅을 디뎠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제 발로 걸은 적 없는 소년의 걸음은 위태로웠으나, 그 이상으로 가련하고 아름다웠다.

주변의 감탄과 동정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다.

세실리아는 기대에 가득 차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스카의 왕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짧은 시간을 기다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앞까지 다가온 미하일을 향해, 미소를 띤 채 세실리아가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탁!

미하일은 마치 벌레를 치우듯 세실리아의 손을 쳐 냈다.

“……아?”

경악과 절망으로 굳은 세실리아를 놔둔 채, 소년은 그 옆을 지나쳤다. 그리고 더욱 앞으로 나아갔다.

걸음이 반복되며, 소년의 다리에 점점 힘이 생기는 듯했다.

비틀거림이 완전히 사라진 채, 소년은 마침내 자신이 목적한 이 앞에 도착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청보랏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붉은색이 도는 금빛 단발머리를 한 일곱 살의 소녀.

아나트리샤 황녀의 앞에.

“나스카의 미하일이, 은인에게 인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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