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5/218)

Level 12. 메인 퀘스트 : 쭉정이는 가라 (08)

***

“나스카의 미하일이, 은인에게 인사 올립니다.”

“…….”

이게 대체 뭔 소리래?

미하일이 눈을 뜬 것만으로도 경악이었는데, 저 녀석이 갑자기 이쪽으로 다가오니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은인이 어쩌니 하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엔 더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난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부정적인 짓도 안 했지만, 긍정적인 짓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저 녀석을 죽이라는 시스템의 강요대로 행동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손으로 다시 멀쩡히 일어나게 만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어쨌건 그는 전생에 나를 배반했고.

또 세상을 멸망시킬 뻔한 마왕의 매개체가 된 이였으므로.

다시 한 번 그런 일이 반복되지 말란 법이 있을까.

당장 죽이는 건 보류하더라도 내가 깨울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저 녀석이 일어났다.

그러고는 내 덕분이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말할 순 없었다.

‘나는 아무 짓도 안 했고, 은인도 아님.’이라고는.

왜냐하면.

“거짓말!!!”

당근 꼬다리가 난리를 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단 지금은 입 다물고 있는 게 낫겠다.

“거짓말이야! 말도, 말도 안 돼!”

당근 꼬다리가 득달같이 미하일에게 달려들었다.

“당신의 저주를 정화한 건 나야! 저 계집애가 아니라, 나라고! 방금 깨어나서 은인을 헷갈린 거지? 응? 그런 거지? 맞아, 그런 거야!”

꼬챙이처럼 마른 애를 잡고 뒤흔드는 꼴이 그다지 보기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나설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탁!

다시 한 번, 미하일이 당근 꼬다리를 더러운 것 털어 내듯 쳐 냈기 때문이다.

“일어나지 못했어도 의식은 있었지. 나스카의 이름을 걸고, 나는 은인을 잘못 알아보지 않아.”

그러고는 다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반달처럼 접힌 눈매가 이번에도 홀릴 듯 예뻤다.

덕분에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고 말았다.

미하일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잡고는 내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나의 구원자. 나의 은인. 아나트리샤 황녀 전하.”

머리도 마음도 복잡했다.

그때였다.

휘잉!

내 곱슬머리와 치맛자락이 엉망으로 휘날렸다.

정신을 차리니 두 발이 허공에 붕 떠 있었다.

아니, 아니다. 어느새 아빠랑 오빠가 옥좌에서 달려와 있었던 것이다.

아빠가 나를 달랑 안아 들고 있었고, 오빠가 나와 미하일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눈에서 불을 뿜을 기세였다.

“지금, 지금… 감히 누구 손등에 키스를……!”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이게 나스카의 법인가!”

“닦자. 얼른 닦자, 리샤. 오빠가 닦아 줄게.”

이 사람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단, 이미 개판 5분 후인 상황을 더 심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냥 놔두면 아빠랑 오빠가 진심으로 난리를 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빠 : ‘이게 대체 무슨 청천벽력같은 일이란 말인가! 역시 내 옆에서 떼어 놓지 말았어야 했어!’]

[오빠 : ‘리샤가 아무리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어도 막았어야 했는데!!’]

보아하니 미하일이 내게 다가올 때부터 계속 참다가 더는 못 견디고 뛰쳐나온 모양이다.

내가 나서야지.

나는 아빠의 품에 안긴 채,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작은 손으로 손뼉도 ‘짝!’ 하고 치면서.

“이걸로 끝!”

그러자 주변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뭐, 뭐라고?”

당근 꼬다리가 황망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

“내가 이겼지?”

“그, 그런……!”

당근 꼬다리의 얼굴이 쭈그러졌다. 진짜 쓰레기통에 말라붙은 당근 찌꺼기가 된 것처럼.

뭐라고 항변하고 싶은 듯했지만, 할 말이 없을 거다.

“쎄씨는 둘 다 정화하지 못했잖아. 나는 둘 다 정화했는걸.”

사실 한쪽은 내가 아무 짓도 안 했지만, 자기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것으로 해 두자.

원래 인생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법이다.

“리샤가 이겼어! 아이, 좋아! 쎄씨도 축하해 줄 거지? 난 쎄씨가 이기면 축하해 주고 언니라고 부르려고 했어!”

물론 그럴 일이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지만.

진실 따윈 알게 뭔가.

짝짝!

자그마한 두 손으로 손뼉을 쳐대자, 피오나 이모를 비롯한 눈치 빠른 이들이 추임새를 넣어 줬다.

짝짝짝!

축하의 인사가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맞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승리하셨네요!”

“경하드립니다, 황녀님!”

피오나 이모가 대공비와 당근 꼬다리를 향해 한마디 쏘아주는 것도 들렸다.

“고귀하신 대공녀님께서 설마 본인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지키지 않으시는 건 아니겠죠?”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대공비는 안색이 흙빛이 된 채로 입을 다물었다.

당근 꼬다리도, 대공비도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긴 했지만, 뭐라고 제대로 항변하지 못했다.

당사자가 확고히 밝혔으니 결과가 너무 명백했고, 자신들이 직접 한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멍한 상태로 당근 꼬다리의 가족은 쫓겨나듯 홀을 나가야 했다.

나는 해맑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서 배웅해 주었다.

“안녕, 쎄씨!”

‘안녕안녕, 당근 꼬다리 패밀리. 금광은 고마웠어요.’

***

세실리아와 벨론드 대공 부부는 넝마가 다 된 듯한 기분으로 대공저로 돌아왔다.

집주인보다 먼저 대공저에 도착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사신 같은 자들이었다.

우선.

“시, 시종장?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황제의 시종장 웨인 백작.

그가 대공저를 들어 엎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웨인 백작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서 너무나도 기쁘다는 것처럼.

“폐하의 칙령을 받고 왔습니다. 대공녀께 내려진 금광에 대한 권리서를 돌려받기 위해서요.”

대공비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 그건 날이 밝는 대로 해도 되지 않은가! 그리고 왜 집이 이 꼴인 거지? 설마, 금광 권리서를 찾겠다고 저택 내부를 마음대로 헤집어 놓은 건 아니겠지? 그건 월권이야!”

“이들은 저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저는 권리서를 돌려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자네가 데려온 게 아니라면 어떻게……!”

분통을 터뜨리던 대공비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집 안을 뒤지고 있는 하인과 하녀들을 감독하는 이는, 대공비도 아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에아루스 후작가의 사람이잖아!’

그들이 쏙쏙 골라내는 물건들 역시 에아루스 후작가에서 보내온 것들, 혹은, 후작가에서 지원한 돈으로 산 것들이었다.

집안이, 말 그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이를 깨달은 대공비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아아……!”

하지만 시녀들이나 가족 중에서조차, 그녀를 부축하는 이가 없었다.

대공은 아내나 딸은 신경도 쓰지 않고 미간을 찌푸렸다.

집주인인 그들보다 먼저 시종장이 와 있는 사실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황제가 미리 시종장을 보내 놓은 거다.’

즉, 그의 이복동생은 이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대공은 설마 이번 일을 어린 황녀가 꾸몄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멍청한 저것이 황제의 덫에 알아서 기어들어 간 거군. 젠장!’

대공은 증오 가득한 눈으로, 하나뿐인 딸을 노려보았다.

망연한 대공비도, 분노와 증오에 휩싸인 대공도, 딸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똑같았다.

그들은 이 사태가 전적으로 세실리아의 탓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할 때는, 자신들도 적극적으로 딸의 말을 거들었다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이 부정적인 감정과 시선을 세실리아는 모를 수가 없었다.

금광 권리서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세실리아는 채찍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정말…, 정말로 다 빼앗기는 거야?’

세실리아 몫의 금광은 아나트리샤의 예상대로 대공가의 금전적인 기반이었다.

그걸 빼앗기는 건, 곧 기둥을 뽑히는 것.

세실리아는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두려움에 짓눌렸다.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세실리아는 멍하니 치맛자락을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아, 안 돼……!”

그때였다. 휘청거리는 세실리아를 붙드는 손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잘 아는 얼굴이 보였다.

세실리아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에아루스 영애!”

창백하게 굳은 얼굴의 에아루스 후작 영애 아멘다가 세실리아의 곁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거죠?”

아까 아멘다는 쓰러져 있었고, 알현 도중 부친인 후작에 의해 밖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쓰러졌다가 눈을 뜨니 놀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아져서 무리가 없었어요.”

두 사람은 알지 못했지만, 아나트리샤가 사용한 저주 정화 포션과 체력 포션의 효과였다.

아멘다는 생긋 웃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바로 이곳으로 달려왔죠. 당신에게 꼭 할 말이 있었거든요.”

세실리아는 희색을 띄며 의지하듯 아멘다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영애! 영애는 날 버리지 않을 거죠? 영애는 은혜를 알잖아요? 당신이 저주로 고통받을 때 손 내밀어 준 건 나뿐이잖아요!”

세실리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내가 저주를 정화해 준 건 사실이잖아. 그래. 그 반푼이가 정화했니 어쩌니 하는 것도, 내가 다 해 놓아서 가능했던 걸지도 몰라!’

“영애는 날 버리지 않을……?”

세실리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탁!

아멘다가 날카로운 손길로 세실리아의 머리에서 빛나는 루비 티아라를 낚아챘기 때문이다.

“아악!”

세실리아의 탐스러운 주황색 고수머리가 티아라에 채여 우드득 뽑히는 소리가 울렸다.

아멘다의 냉혹한 말이 연이었다.

“그 옷 벗어요, 대공녀. 당신은 입을 자격이 없는 드레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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