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2. 메인 퀘스트 : 쭉정이는 가라 (08)
“뭐, 뭐라고?”
세실리아는 믿을 수가 없었다.
늘 자신의 앞에서 벌벌 떨며 자비를 구하던 게, 세실리아가 아는 아멘다였으니까.
“당신은 심성만 못된 게 아니라 말귀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군요?”
경악과 굴욕감, 분노가 일시에 치밀어 세실리아의 머릿속을 진창으로 만들었다.
“네가 감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나에게 빌며 매달리던 주제에! 은혜도 모르는 것!”
아멘다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은혜? 저주를 빌미로 나를 매일같이 부려먹고 모욕을 주는 것을 은혜라고 하나요? 그러면 지금 대공녀는 내게 은혜를 입었군요. 감사하게 여기지 그래요?”
“난 네 저주를 정화해 줬어! 그게 은혜가 아니면 뭐라는 거야!”
아멘다는 엄지와 검지를 함께 들어 올렸다. 두 손가락 사이에는 아주 작은 틈만이 있었다.
“그래요. 딱 요 정도였죠. 당신의 정화로 사라진 내 저주는.”
아멘다는 차갑게 세실리아를 조롱했다.
“그런 하찮은 은혜의 대가로 이 옷은 과분해요. 돌려받도록 하죠.”
지금 세실리아가 입은 알라나 몰리아스의 특제 드레스는, 에아루스 가문에서 선물한 것이다.
아멘다가 빼앗은 ‘화룡의 심장’이 박힌 티아라 역시.
그 밖에도 엄청난 것들이 에아루스 후작가에서 벨론드 대공가로 보내졌다.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대공녀가 내 저주를 정화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지.’
그러니 아멘다의 저주를 제대로 정화하지 못했으니, 주어지던 것들을 돌려받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세실리아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헛소리야! 나는 너를 정화해 줬고, 이 물건들은 이미 내 거야! 나에게 줬잖아! 한번 준 이상 내 거라고!”
세실리아는 한 손으로는 드레스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아멘다에게서 티아라를 빼앗으려 들었다.
하지만 세실리아의 손길은 중간에 가차 없이 막혔다.
주변에 서 있던 벨론드 대공저의 시녀들이 세실리아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너, 너희들!”
그녀들은 모두 에아루스 후작가의 가신 가문 출신이었다. 애초에 아멘다의 시녀로서 충성스럽게 봉사하던 이들.
그들은 주인을 위해 대공저까지 따라왔다. 그리고 세실리아가 아멘다에게 어찌 대하는지 직접 지켜보며 분노를 참아야 했다.
세실리아만이 아멘다의 저주를 풀어 줄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아니었다.
때문에 지금 그들은 꽤 기쁨에 차 있었다.
‘이 못된 것에게 보복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옆에서 보면서 얼마나 분통이 터졌는데!’
‘감히 우리 아가씨를……!’
세실리아는 비명을 질렀다.
“꺄악! 도와줘!”
이 자리에는 아멘다와 그녀의 시녀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대공 부부와 대공저의 사용인들도 있었다.
아멘다가 데려오지 않은 세실리아의 시녀들도.
하지만 누구도 나서서 세실리아를 도와주지 않았다.
아멘다의 시녀들이 세실리아의 드레스를 벗기는 걸 보면서도, 대공 부부는 딸을 비호하려 하지 않았다.
도리어 대공비는 비굴하게 아멘다에게 말을 걸었다.
“저어, 에아루스 영애. 그래도 우리에게 주어지던 지원은…….”
그녀는 아멘다의 분노 앞에 딸을 던져 넣는 대가로 에아루스의 후원을 계속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럴 기세였다.
하지만 아멘다는 냉정했다.
“당연히 전부 중단할 겁니다. 이전까지 드린 것들도 전부 돌려받을 거고요.”
“아, 아무리 그래도 준 것까지 가져가는 건 너무 하잖아요!”
아멘다는 차갑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러시면 황제 폐하의 법정에 소를 제기하시든가요.”
“…….”
귀족 사이의 분쟁은 황제가 입회하는 법정에서 조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이번 일은 법정 분쟁으로 가는 게 불가능했다.
에아루스 영애도, 대공비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마침내 세실리아에게서 알라나의 드레스를 벗겨 낸 시녀가 그것을 아멘다에게 바쳤다.
아멘다의 손에 들린 루비 티아라와 호화로운 드레스.
세실리아는 비참한 심정으로 외쳤다.
“필요할 땐 바리바리 갖다 바치면서 애원하더니, 이젠 안면몰수하고 빼앗아 가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그 보물들이 그렇게 아까웠던 거야?”
아멘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조금도 아깝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이 정말로 날 정화해 줬다면.”
“해 줬잖아! 난 했어! 그것들은 정당하게 그 대가로 받은 거라고!”
아멘다는 차갑게 비웃더니, 드레스의 끝자락에 달린 진주를 하나 떼어 세실리아의 앞에 던졌다.
툭, 데구르르.
진주는 조롱하듯 세실리아의 속치마에 파묻혔다.
“당신의 정화에 대한 대가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적어도 이 진주가 당신이 없애 준 저주보단 크니까.”
세실리아는 악을 썼다.
“빼앗아 가 봐야 너 따위에겐 어울리지도 않아! 내 거라고! 내 거야!”
“그래요. 나에겐 잘 안 어울리죠. 하지만 당신에게 어울리는 것도 아니야.”
아멘다는 루비 티아라를 경건하게 들어 올렸다.
“어울리는 분은 딱 한 분뿐이신 것 같네요.”
“설마…….”
세실리아의 눈이 커졌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린다.
아멘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황녀님께 바칠 거예요.”
아멘다의 시녀가 루비빛 상자를 가져와 티아라를 담았다.
아멘다는 신랄하게 말했다.
“당신과 달리,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저주를 모두 정화해 주신 황녀님께 말이에요. 그분의 사랑스러운 금발에 아주 잘 어울리겠죠.”
아멘다는 더는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 먼저 떠나 버렸다.
에아루스 후작가의 사용인들이 대공저에 지원한 돈과 물건들을 모조리 가져간 뒤.
난장판이 된 대공저 한가운데에 세 사람은 망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시종장이 느긋하게 웃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자아, 이제 금광의 권리서를 내주시지요.”
세실리아와 대공 부부의 안색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들은 시종장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세실리아가 패배한 것은 사실. 전례에 따라 황위 계승권까지 전부 박탈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더욱이 시종장이 광휘 기사단의 기사들을 이끌고 왔기에 저항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물론 세실리아가 태양의 마력을 쓴다면 다르겠지만, 그랬다간 일이 더 커진다.
‘황명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니, 사실상 반역 취급당할 거다.’
결국 대공은 어쩔 수 없이 권리서를 시종장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사실상 벨론드 대공가는 껍데기만 남은 셈이 되고 말았다.
“아, 안 돼! 말도 안 돼!”
대공비는 비명을 지르다가 졸도해서 침실로 옮겨졌고.
세실리아는 이너 드레스 차림으로 멍하니 홀 가운데 널브러져 있었다.
한층 어두침침해진 대공저 안에서, 벨론드 대공은 격렬한 증오 가득한 눈으로 제 딸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