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3. 메인 퀘스트 : 첫 번째 선택 (02)
***
오빠의 말은 놀랍게도 핵심을 단번에 찌르고 있었다.
“뭐, 뭐라고? 무, 무, 무슨 소리야?”
“…….”
“…….”
어째선지 모르겠는데 아빠와 오빠의 표정이 동시에 미묘해졌다.
분명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는데?
절대 들킬 리 없었는데?
나는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평온함을 유지 중이었으니까!
연달은 오빠와 아빠의 말은 내 장담을 한 방에 박살 내 버렸다.
“역시 나스카의 왕자가 우리 애기의 심기를 어지럽힌 게 맞구나.”
“……갑자기 걔 얘기가 왜 나와요?”
“역시 일족들까지 한꺼번에 내쳐야 했어. 지금이라도 내쳐 버리죠. 아빠. 제가 내쫓고 올게요.”
“아니, 나스카 왕자는 상관이 없…….”
내 항변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좋은 생각이다, 루퍼스. 그사이에 내가 우리 애기를 지키고 있으마.”
둘이 갑자기 척척 죽이 맞아서는 합의를 끝마치려 들었다.
“아니, 아니라니까! 둘 다 왜 그래!”
하지만 아빠도 오빠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이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두 사람은 늘 내 말을 천금처럼 생각해 주고 들어주었으니까.
“우리 애기가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게 하다니. 놈의 죄가 크군. 역시 벌로 쫓아내야겠다.”
“절대로 그냥 놔두면 안 되겠어요.”
뭔 말을 해도 결론은 ‘쫓아낸다.’로 갈 듯한 느낌.
‘이건 무슨 기승전쫓아낸다도 아니고.’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라니까! 미하일은 관계없어! 왜 내 말을 안 들어!”
“이름을…… 외웠네, 리샤?”
오빠가 꽃처럼 웃으며 물었다.
잘 아는 표정이다. 뭔가에 심기가 단단히 틀어진 표정.
“리샤는 관심 없는 사람 이름 잘 못 외우잖아.”
“…….”
아빠가 시무룩하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나스카의 왕자가 맞냐고 물었을 때, 우리 애기의 대답이 평소보다 0.027초 늦었으니까.”
‘그걸 일일이 계산하고 있어요?’
오빠의 미소는 더더욱 짙어졌다.
“난 처음에 분명 그놈이라고만 했는데, 리샤.”
그런데 내가 찔린 티를 내서 자백을 한 꼴인 건가.
‘쓸데없이 눈치 빠른 오빠 놈!’
아니라는 변명은 두 사람의 논리(?) 앞에 막혀 버렸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아빠랑 오빠는 쿵짝을 맞추고 있었다.
왜 이럴 때만 더 화기애애한 건데!
“어차피 우리 애기의 힘으로 왕자의 저주도 풀렸으니 더 오래 머물 필요는 없겠지.”
“감사 인사도 필요 없으니 바로 내보내도록 하죠. 리샤가 왕자의 저주를 정화해 줬으니 감히 뭐라고 못 할 겁니다.”
오빠의 말은 마치 저쪽에서 뭐라고 하면 좋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걸 빌미 삼아서 두들겨 패서 내쫓고 싶어 하는 느낌.
‘내가 미하일 신경 쓰느라 정신 팔린 것 같으니까 삐졌구나.’
오빠랑 아빠랑 둘 다 삐져서 심술을 부리려고 하는 게 <궁예> 스킬을 안 켜도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필살기를 꺼내 들었다.
두 사람이 삐진 걸 풀어 주고, 주의를 미하일에게서 돌려 놓기 위해.
고개를 갸웃. 손가락으로 뺨을 콕 누르면서. 두 사람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본다.
사실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요즘은 잘 안 하게 된 짓이다. 그러니 효과가 더 좋겠지.
여기에 혀짤배기소리까지 하면 둘 다 좋아서 자지러지겠지만.
나의 마지막 체면을 위해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적당히 귀여운 척만 가미해 주었다.
“우웅. 리샤는 정원 산책을 하고 싶은데……. 마력을 많이 썼더니 다리가 아파. 누가 안아서 데려가 줄 사람 없을까?”
이번에도 효과는 굉장했다!
“나, 나, 나!”
“당연히 아빠가 안아 주마!”
소란은 한참 이어졌다.
오후 내내 두 사람에게 번갈아 가며 안긴 채 산책을 하고 나서야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진짜 내가 못 살아!’
***
그날 밤.
아나트리샤를 재우고 난 뒤.
황자궁에서 루스템 황가의 두 부자 사이에 대책 회의가 열렸다.
이제 루퍼스리안의 수족으로 아예 자리를 잡은 카렐만이 직접 시중을 들려 했지만 쫓겨났다.
“시중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럴 기분이 아니니까.”
황녀 앞에서야 순한 양처럼 굴지만 루퍼스리안의 성격은 절대 자비롭지 않았다.
아나트리샤 황녀 앞이 아니면 카렐만은 주인의 말에 절대복종하곤 했다.
카렐만은 들고 온 음료와 잔을 테이블 위에 두고 조용히 묵례한 뒤 물러났다.
방 안에 단둘만 남고 나자, 아주 작은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는 결계가 쳐졌다.
그 안에서 부자는 진지하게 논의를 시작했다.
루퍼스리안이 예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말부터 입에 담았다.
“그놈이 있는 하카만 별궁을 폭파하죠. 혐의는 벨론드 대공 일가에게 뒤집어씌우면 됩니다.”
카스톨트 황제는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애기의 마력 감지가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지 않니. 너나 내 마력은 바로 들킬 거다.”
아들의 과격한 제안을 딸에게 들킬 거라는 이유로 반대 중인 황제였다.
절대 도덕적으로 하면 안 되는 일이라거나,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거라는 소리는 없었다.
루퍼스리안은 혀를 찼다.
“하긴. 우리 리샤는 마력도 감각도 너무 뛰어나서 큰일이니까요. 너무 착하고 마음도 약해서 걱정이에요.”
당사자인 아나트리샤가 들으면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뒤틀 말이었다. 하지만 대륙 최강의 팔불출 둘은 진심 1000%였다.
“그러게 말이다. 이 아비가 최대한 보호해 주어야 하는데, 면목이 없구나. 애당초 아예 나스카의 알현을 거절했어야 했어.”
아예 미하일과 만날 일이 없게 했어야 했다.
카스톨트 황제의 분노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주석 잔이 녹아내렸다.
잔 안에 담겨 있던 포도주는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감히, 감히… 내 딸의 손등에 키스를……!”
“나도 아직 못 해 봤는데!!”
두 남자의 맹렬한 적의가 그야말로 불꽃처럼 맹렬하게 타올랐다.
조금만 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간 태양석이 빛날 기세였다.
두 사람은 소중한 아나트리샤에게 다가온 날 파리를 쫓아내기 위해 날이 밝도록 쑥덕거렸다.
***
다음 날.
황녀궁에 에아루스 후작과 그 딸이 찾아왔다. 미리 정중한 알현 요청을 하고 허락을 받은 뒤의 방문이었다.
기드온이나 피오나 같은 황제의 측근들을 제외하면, 황녀궁에 처음으로 외부인이 방문한 일이었다.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지만, 유모이자 시녀장이기도 한 엘제는 밤을 새워 가며 손님맞이 준비를 했다.
때문에 황녀궁의 첫 손님맞이는 꽤나 그럴듯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연히, 이번 알현에는 황제와 황자 역시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괜찮아. 위험할 거 하나도 없어. 에아루스 후작도, 영애도 나에게 도움받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는걸.”
“사람은 겉으로 말하는 것만으로 믿어서는 안 된단다, 아가. 너는 사람을 너무 잘 믿는 경향이 있어서 아빠는 걱정이 커요.”
“맞아. 리샤는 너무 착해서 큰일이야. 세상에는 그걸 이용하려는 인간들만 득시글거린다고.”
아나트리샤는 생각했다.
‘둘 다 눈이 삐었나?’
하지만 아나트리샤 본인만 빼고, 유모와 시녀들까지 열렬하게 부자의 말에 동의했다.
‘음……. 다들 눈이 삔 모양이네.’
다들 안경이라도 해 줘야 하나, 하면서도 아나트리샤는 두 팔불출의 억지를 들어주었다.
‘뭐, 전생에도 언니랑 아저씨는 오빠랑도 친했으니까. 이번에는 아빠까지 친하게 지낼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면 좋겠지.’
전생에는 아빠가 일찍 전사해서 인연이 없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다를 것이다.
‘서로서로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언니의 특제 ‘아스트라’를 아빠랑 오빠도 받으면 더 좋은 거지!’
그렇다. 아나트리샤는 떡고물에도 아주 관심이 많았다.
물론 아멘다가 전생의 무열음인 이상, 떡고물이 없더라도 구해 주었을 테지만.
이득은 이득 나름대로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동상이몽의 알현이 시작되었다.
황녀궁의 응접실로 안내받은 에아루스 후작 부녀는, 황녀와 황제, 황자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에아루스의 딸이 황녀 전하께 입은 은혜에 감읍하고 다시 감읍하옵니다.”
“에아루스 당대의 주인이면서, 초대 황제 폐하 때부터 이어진 맹약을 어긴 죄인을 벌하여 주소서.”
아나트리샤는 조금 당황했다. 그녀는 그냥 화기애애한 티타임을 할 거라 기대했을 뿐이다.
약간의 달달한 떡고물이 함께하는.
‘그런데 왜 언니랑 아저씨는 석고대죄 하는 느낌이야?’
여기에는 석고대죄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두 사람의 기세는 거의 그 급이었다.
“맹약? 죄인?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자 오늘도 아나트리샤의 전용 의자가 되어 있던 카스톨트 황제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별것 아니란다. 초대 황제께서 개국 공신 세 가문의 주인과 하신 약속이지. 황위 계승 다툼에 제국의 근본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세 가문의 가주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황위 계승 다툼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게 있어요?”
“그렇습니다. 때문에 에아루스는 한 번도 황후를 배출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황위 계승 다툼에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로 황가에서만 관리하는 금광 중 남부의 주요 열 곳을 에아루스에게 관리하게 하고, 곡창 중 곡창을 맡긴 거다. 황위 다툼으로 인해 물가가 요동쳐 민생이 피폐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 말이다.”
“…….”
“황제조차도 자식들 중 애정이 기우는 쪽으로 행여나 공평성을 잃을 것을 염려하여, 황실 외부에 안전장치를 해 둔 것이지. 다행히 에아루스는 대대로 그 역할을 잘 해 왔단다.”
카스톨트 황제는 차가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그 목소리에는 명백한 비난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