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9/218)

Level 13. 메인 퀘스트 : 첫 번째 선택 (03)

아나트리샤는 당황했다.

‘뭐, 뭐야? 이 심각한 분위기는?’

카스톨트 황제는 분명히 에아루스 후작과 아멘다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후작이 바닥에 이마를 ‘쿵!’ 하고 찧었다.

“전부 이 몸의 죄입니다. 다만 황가와의 맹약이 깨진 것에 대한 죄는 저에게만 물어 주소서. 죄인이 감히 청합니다.”

다급한 얼굴로 아멘다가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전부 저 때문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저를 살리기 위해서 필사적이셨을 뿐입니다. 모든 일의 원인은 저이니,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둘 다 자신만을 벌해 달라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황제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마음 약한 내 딸 앞에서 그렇게 굴면 이제 와 죄를 탕감받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이래서 아바마마와 제가 옆에 있어야 하는 거죠. 리샤는 너무 착하고 마음이 여려서 이용만 당할 겁니다.”

루퍼스리안은 황제의 말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아나트리샤는 작은 두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마음 약하고 여려? 그게 어디 누군데?! 둘 다 진짜 눈 정상 맞아?!’

하지만 이를 모르는 후작 부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어찌 감히 용서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가문의 죄는 가주인 저의 것, 오래 저주로 고통받아 온 딸에게만은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이미 내 딸의 자비는 넘칠 정도로 받지 않았나. 그대의 딸이 멀쩡한 걸음걸이로 걸어 들어온 것이 그 증거지.”

“…….”

에아루스 후작은 말없이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다만 어리석은 아비 된 자로서 가문과 딸을 양 저울 끝에 달아 놓았을 때, 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작은 시종에게 가져오게 한 상자를 들어 황녀에게 바쳤다.

“맹약을 깨트린 죄, 가문과 이 몸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시종이 상자를 열어 보이자, 안에는 휘황한 황금 티아라가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태양의 일부를 잘라 내어 박아 놓은 듯한 루비가 빛을 낸다.

‘화룡의 눈!’

초대 황제가 에아루스 후작가에 내린 충성과 영광의 증거. 이는, 곧 에아루스 후작가 자체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건 후작가 자체를 황가에 바치겠다는 소리잖아?!’

하지만 에아루스 후작의 이어진 말은 아나트리샤의 예상마저도 벗어나 있었다.

“아나트리샤 황녀 전하께 이를 바칩니다.”

“네?!”

아나트리샤는 경악했다.

당연히 초대 황제로부터 받은 보물, 가문의 작위와 재산 전체를 황가에 되돌려주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나트리샤 개인에게 바친다는 것인 모양이다.

‘이게 말이 돼?’

아나트리샤는 경악하여 황제와 후작, 에아루스 영애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덧붙여서 루퍼스리안까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냥 놔두면 안 되겠는데?’

이번에도, 아나트리샤가 생각을 떠올린 순간, 퀘스트 알림이 떠올랐다.

[$%^ 퀘▩트]

[퀘스◀ 명 : ‘과잉 충※을 저지%*@’]

[……오류 조정 중. 임의로 간략화 하여 표시……]

[설명 : 에아루스 @#가와 황+의 균열을 봉★;;‘라.]

[완료 조건 : $%#$^^ &*&!! @[email protected]@ #$ 용서]

[보상 : #[email protected]*&……]

‘시스템, 진짜 패 버리고 싶다.’

아나트리샤의 자그마한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

‘진짜 제대로 하는 게 거의 없어졌잖아, 시스템.’

최근 며칠 사이에 시스템 상태가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이전엔 몇몇 중요한 듯한 퀘스트를 빼면 내용을 다 못 띄우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일 퀘스트, 일반 퀘스트 내용도 다 못 띄우고 저렇게 간략화를 시키고 있었다.

‘잠깐씩 먹통이 되는 경우도 잦아졌어.’

몇 년 전에는 꽤 길게 시스템이 아예 작동하지 않은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재작동된 뒤로는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며칠 전까지는.

‘뭐야, 대체…….’

지금까지의 작동 패턴을 보면, 환생 이후 시스템은 나에게만 적용되었다.

나만 시스템 창을 볼 수 있고, 나만이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으며, 나만이 보상을 받는다.

‘그야말로 나 혼자 시스템이지.’

퀘스트 발생 시점을 보면 보통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스템이 발동한다.

‘이걸 보면 꼭 시스템이 내 일부가 된 것 같단 말이지.’

어쩌면 환생만이 아니라 이것까지 합쳐서, 마왕을 죽인 보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만 보기엔 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전생에 내 것이 아니었던 스킬과 아이템을 퍼 주고. 일부 미래를 예지하는 것 같은 퀘스트 내용이나, 보상을 주는 타이밍을 생각하면 또 아닌 것도 같고.’

이건 꼭 누군가가 떠오르는 패턴이었다.

보석처럼 깜빡이던 금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나스카의 미하일이, 은인에게 인사 올립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시스템이 내게 준 보상 중에는 그것들이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스킬이나 아이템.

뭔가 머릿속이 엉키는 기분이었다.

내가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상황은 순조롭게 악화되고 있었다.

아빠는 차갑게 대답했다.

“대단한 부정(父情)이시로군, 에아루스 후작. 그대의 간청대로 에아루스 후작가의 작위와 가산을 에아루스 가문으로부터 거두어, 황녀에게…….”

그냥 놔뒀다가는 진짜 에아루스 후작가가 내 것이 될 기세라, 나는 아빠의 말을 잘랐다.

‘아니, 작위랑 재산도 중요하지만…… 사람도 손에 넣어야지!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나 행동으로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살짝 훌쩍거리는 척을 했을 뿐.

“흑……,”

하지만 효과는 굉장, 아니, 무서울 정도였다.

“우리 애기!”

“리샤!!!”

아빠랑 오빠가 거의 세상이 멸망하는 걸 목도한 듯 비명을 지르며 내가 달려들었다.

“왜 그래, 리샤? 누가 괴롭혔어?”

“누가 우리 아가를 울렸느냐! 뼈까지 전부 태워 버리겠다!”

지금 내가 아무리 일곱 살짜리 어린애라도, 이런 상황에서 훌쩍거릴 꼬꼬마가 아니라는 건 아빠랑 오빠도 잘 알 거다.

실제로 가까이 있는 두 사람은 내가 눈가가 빨개지지도 않았고,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 테니까.

그런데도 과민 반응하는 건, 첫 생일 전까지의 내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일 거다.

그때의 안쓰러움과 죄책감을 늘 가지고 있으니까.

뭐라도 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두 사람이니까.

덕분에 내 가짜 울음에 아빠와 오빠의 살기가 애꿎은 아저씨랑 언니에게 쏠렸다.

“에아루스의 배신이 문제구나! 우리 애기가 그것에 너무 상처를 받은 거야!”

“후작가를 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충분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해요!”

……진짜 알고 있는 거 맞지?

잠깐 식은땀이 흘렀다.

***

나는 재빠르게 태세를 바꿨다. 말 한마디만 더 잘못하면, 아저씨랑 언니가 대역죄인이 될 기세였기 때문이다.

‘그건 안 되지!’

나는 작은 손으로 눈가를 비비는 척하며, 해맑게 외쳤다.

“리샤는 감동했어!”

다시 ‘리샤는 일곱쨜!’ 모드 발동이다!

두려움에 떨던 아저씨가 눈을 크게 떴다.

“감동이요?”

닮은 부녀가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웅! 딸을 사랑하는 후작 아저씨를 보니까, 꼭 우리 가족 같아!”

아빠랑 오빠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에아루스의 딸과 우리 애기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단다. 우리 애기는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사랑스럽고, 어여쁘고, 장하고, 뛰어나고…… 아무튼 최고니까!”

“맞아! 어떻게 저런 거랑 리샤랑 비교할 수 있겠어.”

나는 울망거리는 눈으로 아빠랑 오빠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회심의 일격!

“그치만, 내가 아멘다 언니처럼 아프면 아빠랑 오빠는 후작 아저씨처럼 뭐든 할 거잖아? 아니에요?”

“……!”

아빠와 오빠의 머리 위로 느낌표 표시가 수십 개 떠오른 듯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빠와 오빠의 호언장담이 쏟아져 나왔다.

“당연한 일이 아니냐. 이 제국, 아니, 대륙이라 해도 아가와는 견줄 수 없어. 이 아빠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지켜 낼 거란다.”

“그래. 아빠보다 내가 먼저 리샤를 지킬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리샤가 울거나 아프게 두지 않을 거니까.”

오빠는 남들 앞에서는 아빠를 근엄하게 아바마마라고 부르는 것도 깜빡했다.

사실 아저씨랑 언니 때문에 낚시질처럼 던진 말이다.

그런데 예상대로, 아니, 예상 이상으로 아빠랑 오빠가 애정을 드러내는 걸 듣고 있자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말은 언제나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아빠랑 오빠를 끌어안았다.

“그럴 줄 알았어요! 하지만 리샤는 아빠랑 오빠가 다치는 건 싫으니까 목숨은 걸지 말아요! 절대!”

“우리 애기는 어쩜 이리도 마음이 고운지…….”

“걱정 마, 리샤. 오빠는 불사신이야!”

“리샤가 아빠랑 오빠가 다치지 않게 지킬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 가족 셋은 서로를 안고 둥글게둥글게를 시전했다.

잠시 감동과 웃음과 눈물로 가득한 우리 가족만의 세상이 펼쳐졌다.

이마에 피가 맺힐 정도로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죄를 청하던 아저씨도.

어떻게든 부친을 구명하려던 언니도 잠깐 저 멀리로 잊혔다.

“……,”

“…….”

***

세상에 우리 가족만 있는 것 같은 시간이 흐른 뒤.

아빠는 침착하게 다시 선언했다.

“아비로서 딸을 위한 심정은 내 깊이 이해하는 바이다.”

좋았어! 조금 전과 완전히 다른 반응.

하지만 이어진 아빠의 말은 예상과 달랐다.

“하지만 에아루스 가문이 맹약을 깨트린 것은 바뀔 수 없는 사실이다.”

“아빠!”

내 질책에 아빠는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띠고는, 눈을 한번 찡긋해 보였다.

“후작이 맹약을 깨트리고 대공녀의 편을 든 잘못의 피해자는 우리 애기이지. 그러니 후작가에 대한 처벌 역시 우리 애기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역시! 내 방법은 효과가 아주 좋았던 모양이다.

‘그치만 아빠. 진지하게 명령하시면서 우리 애기라는 호칭은 좀 그만둬 주시면 안 될까요.’

……라는 말은 지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잠시 타격을 받은 25+7세의 자아를 지그시 눌러두고서.

내가 내릴 판결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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