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80/218)

Level 13. 메인 퀘스트 : 첫 번째 선택 (04)

“에아루스 후작 영애는 아까 말했지. 아버지인 후작의 죄를 대신하고 싶다고.”

“네! 황녀 전하!”

“황녀 전하. 부디 죄는 저에게만…….”

아멘다 언니는 기쁘게 외쳤고, 후작 아저씨는 어떻게든 딸을 지키려 애썼다. 

나는 그런 후작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후작이 맹약을 깨트린 건 딸을 위해서였지? 게다가 본인이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까, 나는 영애가 책임을 지게 하고 싶어.”

후작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그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웃으며 아멘다 언니에게 다가갔다.

“내가 바라는 소원을 하나 들어줘.”

“무엇이든, 제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정말이지 우리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은 목숨을 너무 쉽게 건다.

나는 언니를 야단치듯 외쳤다.

“목숨 건다는 말은 쉽게 하는 거 아냐! 특히 소중한 가족 앞에서는!”

특히 나는 이미 본 적 있었다.

열음 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영한 아저씨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

그때 아저씨는 언니를 지키지 못한 나에게 화낼 힘마저도 없었다. 그야말로 빈껍데기.

이번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고 말 거다.

그러자 아멘다 언니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말대로, 슬픈 눈을 하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고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아버지가 보시는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었는데.”

“아니다. 전부 내가 부족한 탓인 것을…….”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잠시 두 사람이 가족의 애정을 확인할 시간을 주고 기다리자, 아멘다 언니가 정신을 차리고 말을 정정했다.

“어떤 소원이든 하명해 주세요, 황녀 전하. 성심을 다해 받들겠습니다.”

나는 비로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럼 나랑 친구가 되어 줘, 언니!”

이번 생에도.

-라는 말은 소리로 낼 수 없었지만.

아멘다 언니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곧 언니의 두 눈이 감격으로 젖어 들었다.

“한번 황실에 등 돌리는 죄를 저지른 저와 가문에 기회를 주시다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성심을 다해 황녀님을 모시겠습니다!”

“부디 아직 부족한 제 딸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녀 전하.”

엥?

난 그냥 또 친구 하자고 한 건데?

옆에서 유모 엘제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에아루스 후작 영애 정도의 신분이라면, 대공녀의 시녀보다는 황녀님의 시녀 자리가 더 어울리지요.”

덧붙여서 작게 중얼거리는 말은 내게만 들렸다.

“우리 아기님 시중들 라이벌이 느는 건 싫지만…….”

나는 시녀로 들이겠다는 소리가 아니었는데, 어째 그렇게 진행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빠와 오빠는 불만스레 퉁퉁거렸다.

“처벌을 한다고 해 놓고 상을 주면 어떡해, 리샤.”

“맞다. 지금도 우리 애기 옆을 노리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 귀찮을 정돈데 말이다.”

나를 아기 때부터 봐 온 시녀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황녀님을 단장해드리는 일은 더 이상 뺏기기 싫은데…….”

“우리 황녀님의 귀여움을 나누어야 할 사람이 또 늘어나다니…….”

셀리나는 진짜로 손수건을 물어뜯고 있었다.

아멘다 언니는 엄청나게 긴장한 표정으로 아빠와 오빠, 그리고 유모와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첫 출근한 인턴이 우르르 몰려온 임원진 앞에서 얼어붙은 듯했다.

언니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마,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잘…… 된 거겠지?

어차피 아멘다 언니와는 가까이 지내는 게, 언니를 지키기도 나을 테니까.

오빠가 조금 앙탈을 부리긴 했지만 바로 진압되었다.

“새 시녀. 언니라고 부르지 마, 리샤. 으응? 리샤 오빠는 나 하나뿐인데.”

“그래? 그럼 오빠보고 언니라고 불러도 돼?”

난 이러면 오빠가 기겁할 줄 알았다.

전생에 장난으로 언니라고 불렀더니 질색팔색을 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오빠는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응!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좋아. 나한테만 불러 줘!”

……뭐 잘못 먹은 건가? 아닌데? 아침 같이 먹었을 때 이상 없었는데?

아멘다 언니는 오빠의 억지를 듣고 웃으며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제 황녀 전하를 모시는 영광을 입게 되었으니,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언니라는 말씀은 너무 황송합니다.”

정말이지 착해라. 누구랑은 아주 달랐다.

저기서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아빠 아들과는 말이다.

음, 뭐 이쪽은 신분제가 강하니까 맞춰 주는 게 낫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응. 아멘다.” 

그리고 오빠를 바라보며.

“언니?”

놀랍게도, 오빠는 진짜로 만족했다.

대체 환생이 오빠 놈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친 걸까. 저게 환생 페널티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한 건 낙찰.

[퀘%^ ※료!]

[보상 수€― 「√합니꒾.]

좋아. 좋아.

그나저나 시스템은 언제 정신을 차리는 걸까?

***

하루아침에 벨론드 대공가의 상황도, 세실리아의 처지도 비참해졌다.

“이게, 이게 뭐예요?”

세실리아가 멍하니 제 부모에게 물었다.

그녀의 침실이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방 안 가득 채워져 있던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드레스룸 가득하던 옷이며 액세서리들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그러자 대공비로부터 싸늘한 대답이 들려왔다.

“생활비가 부족해서 팔았단다.”

“어머니의 새 드레스를 사기 위해서요?”

세실리아의 눈에 분노와 억울함이 어렸다.

“어쩔 수 없지 않니! 파티에 가려면 새 드레스가 필요하니까! 누구 때문에 집안에 돈이 부족하게 되었는데.”

세실리아가 능력 증명에 패배하여 금광에 대한 권리서를 빼앗긴 지 겨우 며칠 만이었다.

그동안 세실리아는 계속 부모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부모도 자신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냐고 물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세실리아의 부모는 자신들의 실수나 흠까지 전부 자식의 몫으로 돌려 버리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걸로도 모자라서…… 내 옷과 가구까지 전부 빼앗아 가겠다고?’

세실리아는 조롱하듯 외쳤다.

“새 옷을 입고 가면 뭐 해요! 어차피 이제 누구도 어머니를 상대해 주지 않을 텐데!”

“너, 너!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대공비는 분노하여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어머니와 달리 풍부한 마력을 가진 세실리아는 어머니의 손찌검을 가볍게 막아 냈다.

“악!”

오히려 딸을 때리려던 대공비가 손에 상처를 입을 정도였다. 대공비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

“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난 네 어머니야!”

“……마력도 없고 별 볼 일 없는 집안 출신 주제에.”

“뭐라고?”

“지금까지 나한테 기생해서 호의호식하고 권력을 누린 주제에 이제 와서 제대로 된 엄마인 척하지 마요.”

“세실리아!!”

세실리아가 뿜어내는 압박감은 일반인인 대공비로서는 견디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때, 딸을 말리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쯤 해 둬라, 세실리아.”

“여보!”

세실리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오늘은 왜 집에 오셨어요? 늘 밖으로만 도시더니.”

이미 이들의 관계는 파탄 나 있었다. 더는 가족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대공은 여전히 차가운 증오가 가라앉은 눈으로 딸을 지켜보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에아루스 후작 영애가 황녀의 시녀가 되었다더구나.”

“……!”

세실리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 은혜도 모르는 것이!”

세실리아는 악을 쓰며 사방으로 마력을 쏘아냈다.

부서질 만한 가구가 거의 치워져 있었기에, 벽지와 문이 불타고, 벽에 구멍이 파였다.

딸이 마력을 마구 난사해 대는 것을, 대공은 증오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자신의 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하지만 그는 곧 감정을 수습했다. 그리고 서두를 뗐다.

“아직 네 계승권은 살아 있다.”

“그래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직 그 잘난 대공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거죠! 아니면 또 황족 지위를 빼앗기셨을걸요!”

대공이 입술을 짓씹었다. 딸의 막말은 그의 가장 역린을 건드리고 있었으므로.

“그러니 네가 황자 황녀를 뛰어넘는 수준의 태양의 마력을 가졌다고 증명할 수 있다면, 상황은 역전될 수 있어.”

세실리아는 산발이 된 머리를 흔들며 외쳤다.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이제 와서 그딴 당연한 말을 뭐라도 되는 것처럼……!”

“네 마력을 늘릴 방법이 있다면 어찌하겠느냐?”

분노로 이성을 잃고 난동을 부리던 세실리아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뭐라고, 하셨어요?”

***

당근 꼬다리를 물리친 날로부터 대충 일주일쯤 뒤.

나는 아빠와 오빠, 수행원들과 함께 별궁으로 소풍을 나왔다.

아빠의 강력한 바람에 따른 것이었다.

“아빠는 평생 소원이 있단다. 우리 애기가 아빠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정말로 기쁠 텐데.”

“뭔데요? 말만 하세요!”

“아빠는 우리 애기와 소풍을 가고 싶구나.”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우리는 바리바리 짐을 싸서 황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별궁으로 소풍을 나왔다.

그러고 보면 환생 이후 궁 밖으로 나가는 건 처음이라 좀 들떴다.

물론 호위 인원을 빵빵하게 두르고, 반나절 정도 움직이는 것뿐이긴 했지만.

‘그래도 바깥나들이인걸!’

오랜만의 가족 나들이라는 즐거움 한편으로 미묘한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내가 답지 않게 미뤄 두고 있는 문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하일은 여전히 나스카인들과 함께 하카만 별궁에 있었고.

나는 그들의 알현 요청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들이 가는 것은 분명히 즐겁지만, 어쩌면 내가 소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건, 미하일을 만나기 싫어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

고민은 짧았고, 결론은 간결했다.

‘됐어. 그런 거라도 알 게 뭐야.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는 거지!’

2회 차 인생. 난 단것만 삼키기로 했다구!

나는 다시 희희낙락하며 마차 창문을 통해 바깥 경치를 구경했다.

아빠와 오빠는 안 먹어도 배부른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기분 좋구나, 아가.”

“역시 소풍을 가자고 하길 잘했어!”

역시 아빠의 소원이라는 말은 그냥 핑계고, 나를 위해 둘이 작당을 한 모양이다.

정말이지.

나는 코를 쓱 문지르고 바깥 구경에 집중했다.

번화한 황도 시내를 지나, 꽤 깊은 숲으로 들어섰을 때쯤.

높은 숲의 나무들 위쪽으로 뭔가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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