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3. 메인 퀘스트 : 첫 번째 선택 (05)
내가 손가락질을 하자 아빠와 오빠의 시선 역시 그쪽을 향했다.
숲 위, 꽤 먼 곳에 검은 그림자가 둥둥 떠 있었다.
꽤나 기괴한 광경이었다.
‘무슨 까만 UFO도 아니고.’
그건 느리지만 분명하게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아빠의 얼굴이 확 굳었다.
“저건…….”
뭔지 아시는 걸까.
오빠 역시 나와 비슷하게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뭔지 아세요, 아빠?”
“네가 알 필요 없는 거란다.”
아빠답지 않은 대답이다.
하지만 저게 뭔지 나에게 알려 주지 않으려던 아빠의 시도는 소용없어지고 말았다.
‘그것’이 엄청난 속도로 우리를 향해 날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하늘에 뜬 성?”
***
오빠와 나는 당연히 황족으로서 제왕학과 행정, 기타 교양 등의 수업을 듣고 있었다.
선생들은 모두 아빠의 사주를 받은 건지, 내가 뭐만 해도 칭찬하기에 바빴다.
“세상에. 이렇게 이해력이 뛰어나시다니. 제국의 홍복입니다!”
“말씀해 주신 발상은 전혀 생각 못 해 본 이론입니다. 제가 한번 적용하여 새로운 논문을…….”
“명쾌한 결론이시군요! 감탄했습니다!”
등등등.
사실 이미 전생에 지구에서 고급 교육 과정을 마친 나에게는 너무 쉬운 것들 뿐이었다.
그리고 이곳보다 과학이나 기술이 더 발달한 부분도 많아서, 지구의 상식을 이야기한 것만으로 학자들은 엄청난 컬쳐 쇼크를 받곤 했다.
‘이게 바로 환생 보정!’
황족으로서의 교육은 날로 먹고 있었지만.
한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진심으로 매진하고 있었다.
검술과 마법 등 전투에 관한 부분.
이 분야는 따로 선생을 두지 않고 있었다.
“우리 애기랑, 우리 큰 애기는 1000년에 한 번 나올 천재가 틀림없다!”
왜냐면, 아빠가 나와 오빠를 직접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원래는 따로 선생을 뽑으려 했는데, 아빠의 극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때, 유력한 검술 선생 후보였던 기드온 아저씨가 아빠를 원망했었다.
“제 커다란 기쁨을 빼앗아 가시다니, 치사하십니다. 폐하! 피오나에게도 벌써 자랑해 뒀었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기드온. 정 애기들의 선생이 되고 싶으면 나부터 이기게나.”
아빠는 아주 치사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난…… 뭐, 아빠랑 오빠만 즐거우면 되니까.
생각이 좀 샜는데, 여하튼 부지런히 이어진 황족 교육 덕분에 나는 ‘저것’이 무엇인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는 소리다.
워낙에 특이한 것이라 대륙 각국과 각 부족들에 대해 배운 내용 중, 유달리 기억에 남았으니까.
‘나스카의 부유성!’
그렇다.
나스카 일족은 어둠과 밤을 다스리는 용의 후예.
그렇기에 그들은 지상에 거하지 않았다.
달을 일부 베어 내어 만들었다는 전설을 가진 부유성으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부유성은 황도보다는 작지만 어지간한 도시 하나 정도의 크기라, 숫자가 적은 나스카 일족이 모두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나스카의 부유성은 낮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는데?’
늘 별빛 속을, 혹은 달 근처에서 날아다니는 모습이 목격될 뿐이다.
‘그러고 보면 미하일이 황궁에 왔을 때, 부유성이 안 나타난 게 이상했는데.’
그런데 지금 여기서 뜬금없이 튀어나온다고?
나는 물론, 우리 일행 모두가 경악해 있는 사이.
부유성은 천천히 우리 앞에 내려앉았다.
아예 땅에 앉은 것은 아니었고, 나무들의 바로 위쪽에 멈추어 섰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으면 숲 하나가 통째로 납작해졌을 거다.
그리고 부유성에서 반투명한 회색의 그림자로 만들어진 계단이 하나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단이 우리 가족이 탄 마차의 앞에 도달했을 때.
계단 가장 위쪽에 사람 한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멀리서도 금빛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미하일!’
내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자기가 알아서 저주에서 풀려나 버린 뒤.
처음으로 보게 된 미하일이었다.
당혹감이나 이런 것은 다 제쳐 두고, 가장 먼저 내 머리를 점령한 감상은 단 하나였다.
‘더럽게 예쁘네.’
그렇다. 한 번의 죽음과 환생을 거쳤어도, 저놈의 미모만은 그대로였다.
***
나스카의 왕자, 미하일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나 바로 황족들이 탄 마차 앞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제국 최고의 기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앞에 선 광휘 기사단장 기드온이 크게 외쳤다. 치켜든 칼날이 날카롭게 빛났다.
“멈추시오! 더는 가까이 갈 수 없소!”
미하일은 계단의 중간에서 멈춰 섰다.
기드온의 추궁이 이어졌다.
“나스카는 루스템 제국을 적대하려는 것이오? 어째서 감히 황제 폐하의 앞을 막는 것이오. 그것도 부유 요새를 앞세워서!”
“나스카는 루스템 제국을 적대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왕자인 내가 황녀께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적대하겠습니까.”
이 말에 잔뜩 긴장했던 기사들이 안도했다.
하지만 기사단장 기드온만은 달랐다. 그는 긴장과 결의를 풀지 않고서 외쳤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무례를 저지른 것이오!”
악기가 울리는 듯한 소년의 미성은 분명히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너무나도 선명하게 일행의 청각을 자극했다.
“황제 폐하께 오늘까지 즉시 퇴거하라는 명을 받아, 더는 황궁에 머무를 수 없었기에 부유성을 소환했습니다.”
의외의 말에 마차 안에 있던 아나트리샤의 눈이 커졌다.
‘뭐? 쫓아냈다고? 난 그런 소리 들은 적 없는데?’
아나트리샤가 쳐다보자, 황제는 식은땀을 흘리며 사랑스러운 딸의 시선을 피했다.
화해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지간히 찔리는 게 있지 않으면 이럴 리가 없었다.
아나트리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설마…… 미하일을 쫓아낸 걸 내가 모르게 하려고 소풍 얘기 꺼낸 거야?’
자신의 생각이 정곡이라는 걸, 아빠의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저어, 아빠는 나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애기가 너무 걱정되어서…….”
그리고 루퍼스리안은 방긋방긋 웃고만 있었다. 자신은 이번 공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순진하게.
하지만 아나트리샤의 날카로운 감은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는 조금의 틈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빠도 아빠가 꺼낸 소풍 얘기에 열심히 동의한 거구나.”
“…….”
루퍼스리안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일곱 살짜리 소녀의 째려보는 시선에, 두 부자는 죄인이 된 듯 고개를 숙였다.
아나트리샤는 불퉁하게 딱 한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실망했어.”
“……!”
“……!!”
두 부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무려 아나트리샤의 입에서 ‘실망했다’는 말이 나오다니!
세상이 무너지는 급의 충격이었다.
“잘못했어, 리샤!”
“이 아빠의 죄다! 용서해다오!”
소녀의 날카로운 말이 떨어졌다.
“아빠도 오빠도 나서지 마. 절대.”
그렇게 경고하고 아나트리샤는 마차 문을 열고 포르릉 날아올랐다.
“리샤!”
“아가야!”
두 부자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렸다.
***
‘아빠랑 오빠 두고 봐.’
난 진짜 좀 단단히 삐졌다.
내가 전생에도 현생에도 가장 싫어하는 게 딱 하나 있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걸 방해하는 것!
그건 아빠랑 오빠라도 용서… 못할 정도는 아니고, 조금 삐질 정도는 된다.
사실 나도 미하일을 다시 대면하기 불편해서 미루고 있었다는 건 잊은 척하기로 했다.
내가 보기 싫으니 안 보거나, 내쫓아 버리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이 강제하는 건, 설사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이라도 다른 문제다.
어쨌든 아빠와 오빠의 방해와 내 망설임에도, 결국 미하일과 나의 재회는 성사되었다.
그림자 계단을 밟고 선 미하일의 앞에 다가갔다.
검은 망토가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멋들어지게 휘날렸다.
햇볕 속에서도 유달리 창백한 소년의 얼굴이 너무나도 가까워졌다.
나는 띠껍게 툭, 하고 던졌다.
“뭐, 왜.”
내가 들어도 뜬금없다.
그럼에도 미하일은 곱게 웃었다.
땅까지 드리웠던 그림자 계단이 한 칸 한 칸 들어 올려지며, 나의 앞으로 이어졌다.
그 위를 밟으며 다가오는 소년의 얼굴은 여전히 예뻤고 또, 너무너무 얄미웠다.
새삼 내가 왜 답지 않게 이 녀석을 피하고 있었는지 깨달음이 왔다.
‘그러고 보니까 결심했었지…….’
이번 생에서 미하일을 다시 만나기 전에 나는 혼자 결심했었다.
그를 죽이겠다고.
그것만이 아니었다. 한 가지 더 있었다.
미하일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은혜를 입은 몸으로 황녀님께 아무런 인사 없이 물러나는 것이 더 큰 무례라 생각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유성을 움직이는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부디, 양해해 주시길.”
나보다 훨씬 큰 녀석이 무릎을 꿇으니까 높이와 각도가 아주 좋았다.
그러니까, 무슨 높이와 각도인가 하면…….
퍽!
주먹을 이 빌어먹을 녀석의 뺨에 날려 주기에 아주 적절한 각도였다!
“헉!”
“커헙!”
기드온 아저씨마저 경악하여 숨을 삼키는 소리들 사이에서.
“리샤! 나이스!”
오빠 놈의 환성이 들린 것 같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번엔 내 결심을 제대로 지켰다.
‘다시 만나면 한 대 패 버리겠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 손맛이 꽤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