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2/218)

Level 13. 메인 퀘스트 : 첫 번째 선택 (06)

안서나로서든 아나트리샤로서든 내 인생의 모토를 정리해 보자면 간단했다.

‘생각이나 말보다 주먹이 빠르다.’

‘거슬리는 놈은 다 패고 간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간다.’

‘단것만 삼킨다.’

‘몸이 약하면 머리가 고생한다.’

등등등.

내가 괜히 전생에 S급 망나니라고 불린 게 아니었다.

그런 내가 답지 않게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을 못 하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화병이 날 지경인 게 당연했다.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말 정말 답답했었나 보다.

‘캬! 시원해!’

이 한 방으로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인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 어쨌냐면.

뻑!

반대편도 한 대 더 때려 줬다. 미하일의 얼굴이 반대 방향으로 휙 돌아갔다.

‘이건 오빠 몫이다!’

전생에 미하일 때문에 죽은 오빠의 분풀이도 한 번 하니까, 아주 시원했다.

오빠도 기쁜지 아래에서 주먹을 들어 올리면서 “나이스 샷!” 따위를 외치고 있으니, 나는 정당한 분풀이를 한 것이다. 암.

그러더니 또 아래쪽이 시끌시끌해졌다.

“헉! 경들, 어서 눈을 깔지 못할까! 고개를 드는 놈들은 전부 반역죄로 간주하겠다!”

“눈 감아! 눈 뜨는 놈들은 내가 앞으로 빛을 못 보게 해 주지!”

아빠와 오빠의 흉흉한 협박이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내가 허공에 떠 있어서 치마 속이 보이겠구나.

‘어차피 속바지를 몇 겹이나 입었으니 상관없지만.’

아빠랑 오빠가 알아서 하게 놔두자.

지금은 그것보다 이 녀석 쪽이 문제니까.

내 주먹 두 대를 정통으로 맞고도, 미하일은 쓰러지거나 기절하지 않았다.

‘꽤 센데. 콩나물 대가리나 당근 꼬다리였으면 나가떨어져서 기절했을 텐데.’

미하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웃는 얼굴.

“기분이 풀리셨습니까?”

여유 넘치는 목소리가 이전이라면 꽤나 배알이 뒤틀렸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신나게 패 줬다는 만족감 말고도 이유가 있었다. 아, 조금은 연관 있나.

나는 손가락으로 미하일의 입가를 가리켰다.

“너 피 나.”

“…….”

억지로 여유 있는 척하기는.

놈은 고운 미간을 꿈틀거렸다. 저건 내 기억에 있는 버릇이다. 민망할 때면 꼭 저러곤 했지.

미하일은 소매로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았다. 덕분에 바로 멀끔해진 얼굴을 보니까 주먹이 또 근질거렸다.

‘멀쩡해 보이니까, 한 대 더 패도 되지 않을까.’

전생에 이놈 때문에 고생한 거 생각하면 세 대, 아니, 열 대도 모자란데.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미하일이 말했다.

“이 이상은 좀 참아 주십시오.”

“왜? 아파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맞으면 지금 전 죽을 겁니다.”

“…….”

엄살 피우긴.

나는 피식 비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제대로 인사할까. 나는 아나트리샤 루스템.”

“……미하일 나스카입니다.”

아래에서 아빠랑 오빠가 “어딜 누추한 손을 귀한 손에!” “놔, 놔! 나도 올라갈 거야!” 등등 시끄럽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나와 미하일의 손이 서로 닿았다.

두 대 패 놓고, 이제 와서 손을 내민 건 뒤늦게 외교 활동을 하자는 건 아니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번쩍거렸다.

[스^ <너의 몸 속이 보여>(A급) 적용 &*^%. 적용(*(⁨⁩⁋‱?]

어디, 이것도 피할 수 있나 보자!

***

아빠와 오빠, 그리고 에아루스 후작 부녀를 화해시키는 퀘스트 보상은 별거 없었다.

뭐, 아마도 에아루스 후작 부녀와의 관계 개선 자체가 보상으로 책정되어서가 아닐까.

‘시스템이 제대로 하는 게 있을 리 없지.’

하지만 그 전에 있었던, 딱 봐도 꽤나 중요한 퀘스트는 달랐다.

‘당근 꼬다리를 내쫓고 아멘다 언니를 구하는 퀘스트였으니까.’

그 보상으로 주어진 건, 잘 아는 아이템이었다.

[스킬 업^레이+권]

시스템이 좀 미쳐서 이젠 아이템 설명도 좀 깨지지만, 효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스킬 업그레이드권이 이렇게 잘 나오는 거였나?

어쨌든 개꿀!

소풍을 떠나기 직전, 나는 혼자 있는 동안 보상을 수령했다.

두 번째로 받은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티켓을 들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실험을 한번 해 봤다.

‘다른 스킬들보다, 이게 업그레이드되면 더 효과가 좋을 거야.’

특히 <궁예> 스킬과 합치면 시너지가 엄청날 거다.

내가 업그레이드를 적용하려 한 건 스킬이 아니었다.

내가 전생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고유 능력.

‘타인의 아우라(마력)를 보는 눈!’

헌터가 가진 모든 능력이 스킬로 취급되는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오빠가 가진 불꽃을 다루는 능력은 스킬로 취급되지 않았으니까.

전생에는 이런 고유 능력은 업그레이드권 대상이 아니었다.

그걸 생각하면 쓸데없는 짓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스템은 내 전용. 이것 자체가 전생과는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었다.

‘내 정보도 안 보이고, 레벨업도 없고 말이야.’

시스템 자체가 전생과 달라졌으니, 어쩌면 이번엔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안 돼도 본전. 되면 대박!

나는 업그레이드권을 내 눈에 살살 비벼 보았다.

‘아우라 보는 스킬(스킬이 아니지만 스킬이라고 우기는 중)을 업그레이드 하겠어!’

원래 게임에서도 여기저기 비비다 보면 버그 덕에 가끔은 못 가는 곳도 기어들어 갈 수 있고 한 거 아닌가!

‘이렇게, 이렇게 잘 비벼 보면 어떻게…….’

그리고, 놀랍게도 이게 통했다!

[스킬 <너의 아우라가 보여>(B급)* 업그략띕랰 가능퓱니다. ‱≒꒾하시겠습니궇?]

당연하지!

그 결과, 갑자기 스킬 취급되어 <너의 몸속이 보여>라는 숭한 이름이 붙은 내 능력은.

A급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이 스킬을 키면, 타인의 아우라만이 아니라 몸속의 마나 흐름을 손금처럼 시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오빠의 폭주를 제어할 때처럼 타인의 마력을 느끼거나 동조하고, 조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거의 해부도를 보는 것처럼 남의 마력 흐름을 세세하게 확인할 수 있는 스킬은 전생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손을 잡고 있어야 한다는 제약이랑 시간제한이 붙어 있긴 하지만.’

스킬의 사기성에 비하면야 그 정도는 제약도 아니다.

‘이 스킬이면 놈의 몸속에 마왕의 마력이 남아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그래서 이번에도 마왕이 되어 우리를 위협할지 아닐지도……!’

그러면 내 고민도 끝이다 이거야!

위험하면 그냥 죽이고, 아니면 냅두든가 쫓아내면 될 일.

[정보룟 시각화%^ 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

‘이게, 이게 뭐야?’

미하일의 몸 상태는 내가 예상한 최고와 최악의 경우 중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왜 전신의 마력 회로가 다 망가져 있는 거지?’

이건 마력 회로가 활성화가 안 된 것이나, 회로가 없는 것과는 달랐다.

그리고 내가 이 능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전 아우라로만 봤을 때의 이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우라가 아예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건, 몸 안에 마력을 흡수하는 블랙홀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

실제로 그러했다.

놈의 심장에는 뻥 뚫린 구멍 같은 것이 있었다. 그곳으로 몸 안의 마력이 전부 빨려 나가고 있다.

지금 놈의 상태는 이 말 하나로 축약이 가능하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미하일이 저렇게 예쁘게 웃고 있는 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다.

더욱 미스터리 한 것은, 저 심장의 구멍이 마왕의 흔적은 아니라는 거였다.

나는 마왕의 마력을 잘 알았다.

한 세계 전체를 증오하고 멸망시키는 것만이 존재 자체의 이유라고 외치는 듯한, 그 절망적이고 사악한 힘.

미하일의 심장 구멍은 그것과는 연관이 없었다.

‘일단 지금 당장 마왕과는 연관이 없다는 건데.’

그건 정말 다행이지만, 더없이 찝찝한 사실이 하나 뇌리에 남아 버렸다.

마력을 빼앗긴다는 건, 곧 생명을 빼앗긴다는 의미.

아마도 지금의 미하일은 그다지 오래 살지 못할 거다. 지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할 만했으니까.

그리고.

‘엄청나게…… 고통스러울 텐데.’

그런데도 내 손을 잡은 미하일은 꽃처럼 곱게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사람처럼.

***

“세, 세상에! 우리 왕자님 뺨을 두 번이나 때리다니요!”

“겨우 깨어나신 분을!”

“아무리 제국의 황녀라지만 너무합니다, 장로님!”

나스카인들은 장로에게 외쳤다.

하지만 장로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왕자님을 구해 주신 분이다. 그 은혜만으로도 우리 일족 전체의 목숨을 바쳐도 모자라.”

게다가 부유성을 소환하여 이곳으로 움직이게 한 미하일이 장로에게 당부한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나서서는 안 됩니다.”

나스카의 왕은 일족의 머리이자 심장.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해 왕자라 하고 있으나, 미하일은 이미 일족의 왕이었다.

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나스카는 없었다.

그때였다.

한참 동안 황녀의 손을 잡고 있던 미하일이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은.

“커헉!”

울컥, 소년의 파리한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소년은 힘없이 앞으로 넘어졌다.

“와, 왕자님!”

“미하일 님!”

다행히 왕자가 땅으로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소년은 앞에 서 있던 소녀의 품속으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꽃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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