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3. 메인 퀘스트 : 첫 번째 선택 (07)
***
그렇다. 미하일이 쓰러지는 모습은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 같았다.
무슨 불치병 걸린 드라마 주인공처럼 피를 울컥거리면서 쓰러져서 더 그렇다.
‘잘생기면 쓰러지는 장면도 영화의 한 장면이 되는구나.’
이런 어이없는 생각 한편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뻗어 미하일을 부축하고 있었다.
“…….”
아, 좀 놀라긴 놀란 모양이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보면.
장미 꽃잎 같은 핏방울을 흩뿌리며 내 품에 쓰러진 미하일의 모습은 꽤나 낯설었다.
‘뭐, 누구든 사람이 눈앞에서 피 토하고 쓰러지면 놀라지.’
나는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정신을 수습했다.
미하일이 피 토하고 쓰러지는 건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정말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니까.’
스킬로 확인한 미하일의 마력 회로는 마력이 고갈되다 못해,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이러면 마력을 생산하는 원천 중 하나인 심장에서 온몸으로 마력을 전혀 운반해 주지 못한다.
그것만으로도 온몸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텐데, 미하일의 상태는 더 심했다.
마력을 생산할 원천인 심장에 도리어 마력을 빼앗아 가는 구멍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다행히 마력을 생산하는 두 원천 중 하나인 두뇌는 멀쩡했다.
그나마 지금 살아 있는 건 그 덕분이겠지.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뿐인데.’
나에게는 지금의 미하일에게 딱 맞는 스킬이 하나 있었다.
‘<궁디팡팡> 스킬.’
오빠의 마력 회로를 활성화시켜 주었던 그 스킬이다.
분명히 스킬 설명에 마력 회로의 활성화 외에도 ‘복구’라고 언급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 귀한 스킬을 이놈한테 써줘도 되나? 횟수 제한이 있는 건데.’
나는 잠시 갈등에 빠졌다.
늘 그랬다. 나답지 않게 고민하고 망설이고, 갈등하는 건, 늘 이 녀석 때문이었다.
나는 시스템 창을 흘긋 보았다.
내가 뭔가 하려는 마음을 먹었을 때, 보통 시스템은 알아서 퀘스트를 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기이할 정도로 잠잠했다.
아니, 오히려…… 강조하듯 메시지가 깜빡거리는 중이다.
[완료해$ 할 퀘*트가 ※⁜√니다.]
내가 지금까지 완료하지 않고 방치해 둔 퀘스트.
미하일을 죽이라는 퀘스트.
갈등은 짧았다. 그리고,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
주변의 기사들과 시중인들은 전부 땅을 향해 고개를 박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와중에 카스톨트 황제와 루퍼스리안만이 불안에 가득 찬 눈빛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나스카의 왕자를 다정하게 부축해 주고 있는 아나트리샤를 향해.
조금 전에 호쾌하게 주먹을 날리는 걸 보고도, 두 사람이 다정해 보이는 건, 루퍼스리안의 불안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저놈, 마음에 안 들어!’
그렇다. 갑자기 등장한 나스카의 왕자가, 루퍼스리안은 정말로 아니꼬웠다.
감히 동생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모자라서, 감사의 인사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접근하는 게 너무 싫었다.
루퍼스리안은 저놈을 볼 때면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쾌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이건 그러니까, 집안에 들어온 도둑놈을 보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당장에라도 공중으로 솟구쳐서 아나트리샤의 품에서 놈을 떨쳐 내고 싶었다.
그걸 막고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아빠도 오빠도 나서지 마. 절대.”
동생의 준엄한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직전에 처음 보는 눈으로 “실망했다.”고까지 하지 않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리샤에게 숨기고 쫓아내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소중한 동생의 곁을 맴도는 날 파리를 치우고 싶은 건 오빠로서 어쩔 수 없는 마음이었다.
옆에 선 부친과 루퍼스리안의 시선이 침묵 속에 교환되었다.
‘역시 저놈 마음에 안 들어요.’
‘동감이다. 아들.’
두 사람이 이심전심을 직접 체험하고 있는 사이.
아나트리샤가 미하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허공은 아니고, 다행히 아직 유지되고 있는 나스카의 그림자 계단 위에.
그리고.
“……?”
팡팡!
엎어진 미하일의 엉덩이를 팡팡 때리기 시작했다.
당혹감과 물음표가 온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뭐, 뭐지? 지금 황녀님이 우리 왕자님을……?”
“엉덩이를 때리고 있, 는 거죠?”
그 와중에 루퍼스리안만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 <궁디팡팡>을 당해 본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나트리샤가 너무 어릴 때라 손힘이 부족해서 ‘팡팡!’이 아니라 ‘퍙퍙!’하는 소리가 났었지만.
‘아, 많이 자라서 이제 건강해졌구나, 리샤. 정말 다행……, 아니. 이게 아니지!’
잠시 동생의 성장에 뿌듯해할 뻔한 오빠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도끼눈을 떴다.
‘저건, 저건…… 리샤가 나한테만 해 줬던 건데!’
대다수의 당혹스러움과 의문 사이에 한 명의 맹렬한 질투가 섞인 가운데.
갑작스러운 빛이 소년과 소녀를 둘러쌌다.
그것은 몇 년 전, 황녀가 오빠에게 <궁디팡팡>을 시전했을 때와는 다른 빛이었다.
태양의 마력 특유의 빛과 열기가 아니라, 고요한 밤과 어둠, 그림자의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나스카인들은 경외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들의 주인이 가지지 못했던 힘이기도 했다.
***
퀘스트는 없었다. 달리 무슨 보상도 없다.
뭐, 나스카인들이야 고마워하겠지만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얻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이 스킬은 횟수 제한이 있고, 너무나도 성능이 좋아 아껴 두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걸 미하일에게 썼다.
이유?
모른다, 그런 건.
‘그냥 하고 싶으니까지!’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게 내 모토다. 하고 싶으니까 한다.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할까.
‘어차피 지금 이 녀석이 마왕과 연관 없는 것도 확인했고!’
[대(의 마력 회로가 복궇‱⁜다. 복# 비율 20%.]
겨우 그거밖에 안 돼?
이 스킬 한 번에 오빠는 태양의 마력을 전부 각성했고, 두 번째에는 눈과 얼음의 마력을 각성했다.
그런데 한 번에 20%라면, 남은 두 번을 다 써도 마력 회로 전체가 복구 안 된다는 소리다.
‘하긴, 전생에도 이놈 마력 돼지긴 했지.’
참고로 내가 붙인 별명이었다. 워낙 마력이 넘쳐나는 놈이라, 전투 중에 마력 부족하면 내가 좀 많이 뜯어다 썼었다.
‘에라이!’
나는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팡팡!
[…*구 비^ 40%…]
팡팡팡!
[…[email protected] 비# 60%…]
눈물 나게 아까웠지만, 남은 <궁디팡팡> 스킬을 미하일에게 전부 써 버렸다.
놈의 마력 회로가 급속도로 복구되며, 주변에 놈의 마력이 강렬하게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밤과 어둠, 그림자의 마력.
그렇지만, 마왕처럼 악의와 증오, 사악함으로 가득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안온하고 다정한 어둠.
그 마력에 감응하듯 나스카의 부유성이 빛나기 시작했다. 미하일의 마력과 같은 빛으로.
마치, 낮의 한 가운데에, 고요한 밤이 찾아온 듯한 광경이었다.
***
루스템의 황녀는 쓰러진 왕자를 마력으로 들어 올려 나스카의 부유성으로 접근했다.
그림자 계단을 내린 입구 쪽에 장로를 비롯한 나스카의 중진들이 모여 있었다.
아나트리샤는 그들에게 미하일을 휙 던졌다.
“왕자님!”
“미하일 님! 정신 차리세요!”
나스카인들은 다급하게 왕자를 받아 들어 상태를 살폈다.
두 번이나 황녀에게 얻어맞고, 궁디팡팡까지 당한 왕자의 상태는…….
색색. 고른 숨소리. 혈색이 도는 뺨.
무엇보다 밖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한 밤의 마력.
“…….”
그렇다. 왕자의 상태는 아주 좋았다.
왕자가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스카인들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하면서도 얼떨떨했다.
조금 전 그들의 왕자가 황녀에게 당한 건 분명히 둘도 없는 모욕이었다.
아무리 황녀가 왕자의 은인이라지만, 항의하지 않고 넘어가기 힘들 정도로.
그런데 지금 왕자의 상태를 보니 그런 생각은 깡그리 저 멀리로 날아가 버렸다.
그들의 왕자는 이제 정말로 살아난 것이다.
“세상에! 왕자님!”
장로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감격에 젖어 있을 여유는 길지 못했다.
루스템의 황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기 때문이다.
“부유성을 제국에서 치워.”
겨우 일곱 살짜리 소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위압감이 넘치고 있었다.
“황녀님, 이십니까? 이번에도?”
아나트리샤는 이번에는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다만 이렇게 선언할 뿐이었다.
“미하일이 깨어나면 전해. 두 번 구해 줬으니까, 그 목숨은 내 거라고.”
그리고 장로가 왕자에게 이를 전해 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왕자가 흐린 눈을 뜨고 대답했던 것이다.
“내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할게.”
지금까지 왕자의 입에서 나온 어떤 말과도 다른 울림과 힘을 가진 말.
그건 그 말 자체가 누구도 벗어나기 힘든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왕자님! 용언(龍言)을……!”
나스카의 왕만이 쓸 수 있는 말 자체가 힘을 가진 맹세.
용언은,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건 것이라면, 나스카의 왕이라도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나스카의 혈족인 이상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용의 피를 이은 자들이므로.
처음으로 왕자의 입에서 나온 반말에, 아나트리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전생의 미하일은 거리감을 과한 예의로 표현하던 사람이다.
때문에 그가 말을 편하게 하는 대상은 단 하나뿐이었다.
안서나.
전생의 아나트리샤.
‘역시…….’
하지만 소녀가 무어라 더 추궁을 하거나 비난을 하기 전에, 소년은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어차피 제 손으로 내게 목숨을 쥐어주기도 했으니까.’
잠시 소년을 바라보던 소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자신의 가족들에게로 돌아갔다.
거친 바람에 풀린 분홍색 리본이 마치 꽃잎처럼 미하일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소년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로도 본능적으로 리본을 부여잡았다. 너무나도 소중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