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4/218)

Level 14. 메인 퀘스트 : 박수 칠 때 (01)

나스카의 부유성은 갑자기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조금 아쉬운 건지 후련한 건지 모를 감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시 지상으로,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아빠와 오빠는 안도하는 웃음으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리샤!”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구나.”

두 사람 모두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꼭 묵혔던 체증이 싹 내려간 사람들 같네.’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아빠와 오빠의 옆을 쌩하니 지나쳤다.

“아가?!”

“리샤?”

두 사람의 경악을 무시하고서, 나는 유모와 시녀들이 타고 온 마차로 날아 들어가며 외쳤다.

“실망한 거 아직 안 풀렸거든?”

그렇다. 내가 미하일을 두고 어떤 결정을 내렸고, 어떤 행동을 했든.

한 가지 변치 않는 사실이 있었다.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숨기고 멋대로 행동했어! 나 삐졌어!’

쾅!

마차 문이 꽤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내 기분이 안 좋은 건 분명히 티가 났겠지.

밖에서 아빠와 오빠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 아빠가 잘못했다. 제발 용서하고 같이 마차를 타고 가자꾸나. 그 마차는 황족 전용 마차와는 달라!”

“맞아! 리샤의 연약한 피부가 다칠지도 몰라! 원래 타던 우리 마차 타면 내가 리샤 계속 안아 줄 테니까…….”

또 은근슬쩍 자기 좋은 일만 하려는 거 봐라.

나는 우리 집 기강을 바로잡기로 했다.

마차 창문을 탁 열고는, 혀를 쏙 내밀며 외쳤던 것이다.

“싫어! 리샤 삐졌어! 아빠, 오빠랑 안 탈 거야!”

그리고, 다시 쾅!

문을 닫아서 보이진 않았지만, 아빠와 오빠가 닫힌 마차 문 앞에서 심하게 좌절한 건 불 보듯 뻔했다.

죄지은 두 남자는 불행했고.

“꺄아! 우리 아기님이랑 한 마차라니!”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 아니, 아니죠. 부디 제 무릎 위에 앉아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두 사람도 참. 폐하와 황자님께서 저렇게 슬퍼하고 계신데…….”

그렇게 말하는 엘제가 제일 환하게 웃고 있는데.

나와 오래 지낸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한 신입 아멘다는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저, 저도 황녀님과 함께 마차에 타게 되어 정말 무한한 영광입니다!”

다들 호들갑 떨고 있으니 어떻게든 보조를 맞추려는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아멘다. 지내는 건 어때?”

“당연히 아주 잘 지냅니다! 유모님들도, 선배 시녀님들도 아주 잘 대해 주십니다!”

“…….”

으음. 전생에 비해 덜 친해진 상태인 데다, 신분 차이도 나고.

아멘다가 개인적으로도 가문 입장에서도 빚을 진 상태다 보니 심하게 긴장한 것 같았다.

아직 유모나 셀리나, 모냐와도 서먹한 것 같고.

나는 조금 도움을 주기로 했다.

“그래, 그래! 황녀궁은 쎄씨네랑 다를 거야! 걱정하지 마!”

“다, 당연히 전혀 다릅니다! 무엇보다, 세실리아 대공녀는 정말로…… 정말로 너무했으니까요.”

아멘다의 얼굴에는 숨기기 힘든 분노가 묻어났다.

나는 저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인비저블 아이’로 당근 꼬다리가 언니를 어떻게 대하는지 봤으니까.

‘나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는데. 언니는 더하지.’

아멘다 언니의 기색에 유모와 시녀 두 사람은 가벼운 위로를 건넸다. 원래 같은 적을 두면 친해지기 쉽다고 했던가.

눈앞에서 그 적절한 예시가 펼쳐지고 있었다.

“앞으로는 걱정할 것 없어요. 영애!”

“맞아요! 대공녀 따위와 황녀님은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으시니까요!”

“그 말라붙은 당근 쪼가리 같은 대공녀랑 우리 귀염뽀짝뀨띠빠티한 아기님이랑 어떻게 비교를 하겠어요!”

셀리나가 다시 폭주를 하려 했다.

그걸 끊어 줄 겸, 그리고 아멘다 언니가 모두와 빨리 친해질 수 있도록 도울 겸.

한마디를 던졌다.

“맞아! 우리 궁 사람들은 벨론드 대공의 대공저의 못된 사용인들과는 전혀 다른걸! 전부 다 착하고, 멋지고, 똑똑하고, 암튼 최고라고!”

나는 윙크하며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스킬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S급)>을 사용 가능합니다. 적용하시겠습니까?]

아니, 아니. 그거 아니야.

나는 재빠르게 <궁예> 스킬 사용을 취소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지금 시스템 메시지 하나도 안 깨졌네.’

드디어 시스템이 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아, 하지만 에러까지 완전히 나으면 안 되는데.’

그랬다가 나한테 유리하게 다 퍼 주던 것도 그만두면 손해 아닌가 말이다.

아무튼 내 입에 발린 말 한마디에 유모와 시녀들은 열정적으로 반응해 주었다.

“당연하죠, 아기님!”

“우리를 그렇게 믿어 주고 계셨다니……. 정말 감동이에요. 훌쩍.”

“반드시 황녀님의 믿음에 부응할 거예요!”

세 사람은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져서, 조금 전보다 열정적으로 신입을 챙겨 주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어렵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꼭 우리에게 이야기해요?”

“네, 넵!”

“우리는 황녀님의 믿음만큼 성실하고 착하기 위해 노력할 거니까요!”

“마, 맞습니다! 저도 노력하겠어요!”

“우리 황녀님 아기 시절 그림 볼래요? 내가 그려 놓은 것들인데…….”

“그거 나도 안 보여 주던 거잖아, 셀리나!”

“세상에. 너무 귀여우세요! 어쩜……. 핫. 무, 물론 지금도 엄청나게 귀여우시지만요!”

셀리나가 야심 차게 내놓은 내 애기 적 초상화 컬렉션을 보고 아멘다의 표정이 흐물흐물해졌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지금의 내 귀여움도 함께 찬양하기 시작했다.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 전에…… 셀리나 왜 내 초상화를 늘 갖고 다니는 건데?

내 경악을 모르는 셀리나는 열정적으로 신입에게 영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자아, 이건 우리 아기 황녀님 네 번째 생일날 모습을 그린 거고! 그리고 이건……!”

그림은 이해한다 치자. 어차피 셀리나 본인이 그린 거니까.

그런데 왜, 품속에서 내 머리카락을 모아 묶은 거랑 찢어져서 버리라고 한 아기 양말이 나오는 건데?

“이건, 우리 아기님 생후 4개월일 때! 이건 두 살 무렵! 그리고 이건, 네 살, 요건 여섯 살 때 머리카락이에요!”

아멘다는 조금 질린 표정을 했다. 당연하다. 나도 질리니까.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셀리나는 화들짝 놀라서 변명했다.

“아,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자연적으로 떨어진 머리카락만 모은 거예요! 절대로, 생머리를 뽑거나 하는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고요!”

맞는 말이긴 했다. 셀리나가 그동안 내 머리를 마구 뽑았으면, 내가 모를 수 없으니까.

‘그치만…, 머리를 뽑았건 주웠건 자연적으로 떨어진 머리를 나이대별로 모아서 정리해 둔 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그렇지 않나?’

그때였다. 마차 지붕에서 오빠의 헛소리가 들려온 건.

“아니! 그런 중요한 컬렉션이 있으면 나한테도 알려 줘야지, 셀리나!”

오빠 놈이 매미처럼 마차 지붕에 딱 달라붙은 건 나도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외치면 모르는 척, 무시해 줄 수가 없지 않은가.

나는 마차 문을 열고 포릉 날아올랐다.

“시끄럽……엥? 아빠?”

마차 밖으로 나온 나는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다.

오빠가 마차 지붕에 딱 달라붙은 모습 말고도.

“왜 그러니, 아가? 내가 좀 불편하게 몰았니?”

아빠가 아주 태연하게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황제답게 으리번쩍한 옷을 입었으면서, 마부석에 앉아 말채찍까지 들고 계셨다.

“……언제부터 마부 대신 앉아 계셨던 거예요?”

“우리 아가가 이 마차에 타고 나서 바로!”

오빠 놈의 움직임은 마력 감지로 눈치챘는데, 아빠까지는 몰랐다.

‘내가 눈치 못 채게 움직이다니. 역시 우리 아빠 마력 컨트롤 정말 대단……, 아니, 이게 아니지!’

잠시 어이가 없어서 화내던 것도 까먹을 뻔했다.

다시 불퉁한 표정을 만들어서 외쳤다.

“둘 다 원래 자리로 가요! 주변에 피해 주지 말고!”

그렇다. 이 두 주접남의 피해자는 사방에 산재해 있었다.

졸지에 마부석에서 쫓겨나 황제의 마차에 실려 앉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마부라거나.

나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 나누다가, 자기가 무려 황제가 모는 마차에 타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놀란 아멘다 언니라거나.

“폐, 폐, 폐하께서……!”

아멘다 언니는 조금만 더 놔두면 경기할 것 같았다.

나는 아빠와 오빠의 말도 안 되는 헛짓을 빠르게 진압했다.

“어허! 둘 다 빨리 원위치!”

“그럼 리샤도 같이 가는 거지?”

“아빠는 우리 애기들과 떨어지면 손이 떨리는 지병이 있어요.”

나는 작은 발로 마차 지붕을 탕! 하고 구르며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빨리 원위치 안 하면, 둘 다 한 달간 황녀궁 출입 금지야!”

후닥닥! 슈슉!

아빠와 오빠는 순식간에 원 자리로 돌아갔고, 좌불안석이었던 마부는 자기 자리를 찾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유모랑 시녀들 옆으로 돌아왔다.

“내가 아주 늙는다니까, 늙어.”

“…….”

“…….”

유모는 물론, 시녀 셋 모두 웃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진심인 걸 어떡해.

그렇게 파란만장한 우리의 소풍 길은 계속 이어졌다.

***

소름 끼치는 비명이 울렸다.

“아악! 으, 아아아……. 흐윽, 으허어헝!”

주황색 머리카락이 엉망이 된 채, 지하실 바닥을 구르는 소녀는 비명의 끝에 처절한 울음을 토해 냈다.

벽에 기대선 채 그것을 내려다보는 벨론드 대공의 눈에는 조금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고통스러워하는 딸을 보는 아비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모습.

곁에 서 있던 사람이 작게 중얼거렸다.

“목표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효과는 확실하군요.”

벨론드 대공은 딸의 몸에서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강력한 태양의 마력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 정도면 한번 시도해 볼 만하겠군.’

다시 한 번, ‘능력의 증명’을.

그래서 저 밉살스러운 이복동생 카스톨트 황제의 두 자식들을 끌어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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