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4. 메인 퀘스트 : 박수 칠 때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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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나 몰리아스의 샵은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주인이 손님을 가려 받기로 유명한 괴팍함은 그대로였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대중의 선망을 불러왔다.
‘어쩌면 나에게는 팔아 줄지도 몰라!’
이런 희망을 가진 이들이 늘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샵의 종업원들 중 대부분은 이런 손님들을 상대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알라나의 이름을 건 드레스에 직접 손을 댈 수 있는 건, 주인과 수석 도제 한 명뿐이었으니.
“오늘은 알라나가 나오지 않은 건가?”
“사장님께서는 예정에 없던 일이 생겨 오늘은 샵에 오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이 소식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쉬워하며 돌아갔다.
하지만 몇몇은 끈질기게 남아 있었는데.
늦게라도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진 이들이었다.
“하아. 우리는 내일 영지로 내려가야 하는데…….”
“얼굴도장이라도 한 번은 찍어 두는 게 유리하지 않겠니?”
이들의 눈에 요새 꽤 유명해진 드레스가 들어왔다.
토르소에 걸쳐진 자줏빛의 드레스는 아주 아름다웠지만, 일부 옷감이 상하고 장식 진주가 떨어져 있었다.
그걸 본 시골 귀족 영애의 눈이 빛났다.
“어머니, 저 드레스가 그 소문의 드레스인가 봐요! 그, 대공녀님이 에아루스 영애님께 받았다가 빼앗겼다는 거요!”
“그러고 보니……. 저기 찢어진 레이스랑 떨어진 장식을 보니 맞구나.”
요즘 사교계에서 가장 핫한 가십이 바로 이것이다.
‘황녀가 대공녀를 능력 증명으로 눌러 버린 것!’
그 결과, 에아루스 후작 영애는 자신을 학대하던 대공녀를 떠나 황녀의 시녀가 되었다.
알라나 몰리아스의 드레스가 찢어진 채 다시 샵으로 돌아온 건 그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황도 토박이인 한 부인이 옆에서 자세한 설명을 보탰다.
“사실 저 드레스. 알라나가 대공녀를 위해 만든 게 아니었다는 거 아세요?”
“네? 정말요? 에아루스 영애의 부탁으로 만들어 준 게 아니라는 건가요?”
“네. 나는 여기 꽤 자주 드나들어서, 알라나에게 직접 들었답니다.”
토박이 부인의 입가에 짙은 조롱의 미소가 번졌다.
“은인인 에아루스 영애가 간곡하게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드레스를 주어야 했는데, 도저히 대공녀를 위해서 따로 만들 수가 없었대요.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아 완성하지 않고 샘플로 가게에 비치해 두었던 걸, 손만 좀 봐서 내줬다더군요.”
“세상에!”
“실제로 저 드레스는 2년 넘게 완성되지 않은 채로 늘 저기 걸려 있었어요.”
안 그래도 요즘 가장 유명한 가십의 흥미로운 배경까지 알게 되니, 두 사람의 눈빛이 몇 배로 반짝였다.
“하긴, 알라나는 벨론드 대공비의 주문도 거절했었다고 들었어요.”
“정말, 평생에 한 번이라도 알라나의 가봉을 받을 수 있으면 죽어도 좋을 텐데……!”
꿈꾸는 얼굴을 한 영애는, 한편으로 토르소에 걸린 뜯어진 드레스를 흘겨보았다.
“물론, 저런 걸 받고 싶은 건 아니고요.”
작은 웃음이 번졌다.
“그나저나, 오늘 알라나는 대체 어디를 갔기에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운 걸까.”
알라나 샵의 터줏대감인 토박이 부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해 주었다.
“사실, 알라나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한 거긴 한데…….”
“알고 계신 거예요?”
시골 귀족 모녀는 눈을 빛냈다. 장소를 알면 거기라도 달려갈 기세였다.
“……글쎄, 황녀궁에 부름을 받아서, 그 준비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뭐라고?”
음산한 목소리.
이 반문은 시골 귀족 모녀나 샵의 고용인들에게서 나온 게 아니었다.
막 샵의 문을 열고 들어선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주인공이었다. 푸른 눈에서 비정상적인 안광이 번뜩였다.
시골 귀족 모녀나 토박이 부인도 소녀의 정체를 몰랐다.
하지만 샵의 고용인 중 최선임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세실리아 대공녀님!!!”
바로 에아루스 영애를 내세워 위세를 부리던 걸 봤기 때문이다.
이 말에 한창 가십을 떠들던 이들 모두 경악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 대공녀님을 뵙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
하지만 세실리아는 그들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제 물건을 되찾기 위해 여기 왔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오로지 한 가지 사실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알라나가 그 계집애에게 간다고?’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저기 걸려 있는 드레스를 받았을 때조차, 직접 여기 와야 했었다.
에아루스 영애를 내세웠는데도 그랬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그 계집애에겐 직접 간다고? 어째서? 왜?’
황제의 무릎을 제 옥좌처럼 생각하고 건방지게 앉아 있던 황녀가 떠올랐다.
증오스러웠다.
자신을 비웃는 표정이. 사랑받는 아이 특유의 당당함이.
아니, 그 아이의 모든 것이 거슬렸다.
설마, 그 콧대 높고 재수 없던 알라나가 황녀에게는 직접 찾아가 드레스를 지어 바치는 건가?
세실리아의 불타는 눈이 망가진 자줏빛 드레스에 닿았다.
‘저것처럼 대충 던져 준 하자품이 아니라, 제대로 된 걸?’
모든 게 치욕적이었다. 그중에는 오늘 하찮은 것들의 대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설마, 대충 만든 하자품을 준 거였다니.’
분노 때문에 머리가 얼얼했다. 온몸의 피가 바짝 마르는 듯했다.
아니, 아니다.
기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온몸의 피가 끓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숯을 삼킨 것처럼.
‘그때’부터.
그 이후 세실리아는 자신의 마력이 엄청나게 강력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아파! 아파! 아파!’
온몸이 아프고, 고통스럽고,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세실리아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참고 싶지 않았다.
주황색 불꽃이 그녀에게 치욕의 상징과도 같은 드레스를 불태웠다. 동시에 그 주변에 있는 무고한 이들까지도.
“아아아악!!!”
“꺄악!!!”
처참한 비명이 높게 치솟았다.
인근에 세워진 마차에 탄 채 지팡이를 짚고 있던 남자, 벨론드 대공은 낮게 혀를 찼다.
“쯧. 역시 제대로 된 완성작이라 보기엔 무리군.”
“어쩔 수 없지요. 감당할 수 없는 마력에 그릇이 깨져 버리는 것까진 저희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이 말이 벨론드 대공에겐 지독한 조롱으로 들렸다.
태양의 마력도 가지지 못한 대공의 자식이 가진 그릇은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하지만 대공은 이 불만을 드러낼 수 없었다. 도움을 받는 건 그였으므로.
대공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사뭇 친절한 체하며 웃었다.
“하지만, 아드님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가 아닙니까. 적어도 살아서 저렇게 강대한 태양의 마력을 쓰고 있으니까요.”
거대한 불꽃이 거리 한가운데에서 치솟았고.
이에 호응하듯 저 멀리 태양석이 타올랐다. 세실리아가 타고난 태양의 마력으로는 저렇게까지 태양석을 밝힐 수 없었다.
그렇게 본다면 세실리아에게 가해진 ‘실험’은 어느 정도는 성과가 있었던 셈이라 봐야 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군.”
벨론드 대공은 태양석의 빛을 바라보다가 황궁으로 초점을 옮겼다.
‘세실리아는 망가졌지만, 마력은 확실히 강화되었어. 저 마력으로 황자 황녀를 꺾을 수 있다면 실패는 아니라 봐야겠지.’
이제 세실리아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황자 황녀를 한 번 더 ‘능력 증명’으로 끌어들이면 된다.
세실리아로 적어도 황자나 황녀 중 한 명은 처리해야 했다.
‘태양석을 밝힌 정도를 생각하면, 황자를 노리는 게 더 가능성 높으려나…….’
하지만 대공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난데없이 날아온 금빛의 작은 빛 덩어리 때문이었다.
슝! 꽈광!
엄청난 충격파가 주변을 울렸다.
***
황도 르펜시아 동편의 번화가에서 주황색 불꽃이 치솟았다.
10카르(=M) 정도 높이의 거대한 불꽃이라, 황도의 신민 대부분이 이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그 불꽃에 휩싸인 이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꺄아악……아?”
“살려 줘, 어?”
그래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주황색 불꽃 기둥은 그 크기와 기세가 무색하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그라졌다 볼 수도 없었다. 지우개로 깨끗하게 지워 낸 듯 한순간에 사라졌다.
꼼짝없이 불타 죽었다 생각했던 이들은 자신이 살아 있음에 경악했다.
“뭐, 뭐지?”
“아가! 아가! 괜찮으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가족들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고.
대부분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한편으로, 의아해했다.
“불꽃은 어디로 간 거지……?”
“꿈이었나?”
하지만 그들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파란 하늘이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분명 가게 안에 있었는데.
가게 전체가 새까맣게 전소되어, 그들은 지금 실외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조금 전 알라나의 가게를 안에 있는 사람과 함께 통째로 태워 버리려 들었던 세실리아는 허공을 살기 어린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흘러넘쳐 주체 못 하는 마력을 불꽃처럼 인 채였다.
너무나도 귀여운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당근 꼬다리?”
분명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귀여운 목소리인데, 어째서 이렇게 위엄이 넘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은 이 목소리에서 증오 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세실리아는 비명처럼 외쳤다.
“아나트리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