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7/218)

Level 14. 메인 퀘스트 : 박수 칠 때 (04)

***

잠깐 못 본 사이 당근 꼬다리의 꼴은 꽤 기이해져 있었다.

비쩍 마른 몸에, 안색은 회색빛. 눈 밑이 거뭇거뭇했고, 머리카락은 산발이다.

누가 봐도 그다지 좋아 보이는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나한테 금광을 빼앗겼으니 그 충격으로 저럴 수도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단기간 안에 저 꼴이 됐다고 보기엔 뭔가 좀 이상했다.

특히 이해하기 힘든 건 당근 꼬다리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마력이다.

몸 안으로 다 갈무리되지 못해 새어 나오는 마력이 일반인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일렁이는 불꽃을 등에 인 듯한 모습.

“아나트리샤!”

나를 올려다보는 당근 꼬다리의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과 분노가 느껴졌다.

“너 때문에! 너 같은 백치 따위 때문에, 내가!”

당근 꼬다리가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걸 보며,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진짜 멍청하구나, 너.”

“뭐라고?!”

“계속 내가 백치가 아니라는 걸 잊어버리는 거 같아서 말이야. 기억력 좀 키우는 게 어때?”

“너, 너, 너……!!!”

나는 대놓고 비웃음을 머금었다. 팔짱을 끼고, 눈을 최대한 내리깔고서.

“그리고 내가 백치면 나한테 진 너는 뭐가 되는 건데? 생각을 좀 하고 말해.”

“죽여 버리겠어!!!”

당근 꼬다리가 다시 마력을 방출했다.

‘오? 꽤 센데?’

아까 가게를 하나 불태우고, 거리를 날려 버릴 뻔했던 그 불꽃보다 더 강한 마력.

역시 이상했다.

‘쟤, 절대 저 정도 마력량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단기간에 마력이 증가하는 게 가능한 건가?

이런 경우는 분명히…….

하지만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당근 꼬다리가 방출한 마력은 명백하게 나를 공격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주황색 불꽃이 살기를 띠고 날아들었다.

파아앗!!

나도 마력을 방출하여 맞섰다. 마력이 금빛의 새 모양으로 내 온몸을 감쌌다.

나는 어렵지 않게 당근 꼬다리의 불꽃을 상쇄해 냈다.

그러자 당근 꼬다리가 분노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이익!”

‘분노 조절 장애라도 생긴 건가.’

나는 저런 정신 상태에 대한 특효약을 가지고 있다. 작은 주먹에 힘을 쥐었다.

‘바로, 이게 특효약(물리)이지. 한 대 맞으면 다들 ‘분노 조절 잘해’가 된다구!’

나는 주먹에 빛나는 마력을 휘감은 다음, 당근 꼬다리를 향해 재빠르게 날아갔다.

당근 꼬다리를 위한 특효약(물리)를 약하게 써 주었다.

쾅!!!

당근 꼬다리도 결계를 펼쳤지만, 그 위로 대놓고 내려친 내 마력이 몇 배는 강력했다.

당연하게도 당근 꼬다리의 결계가 박살 났고.

결계를 펼친 당사자는 비명과 함께 피를 토했다.

“커헉!”

‘좋아. 이제 분노를 조절 잘하게 되었군.’

그 광경을 보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이 조금 전 상황을 깨닫기 시작했다.

“화, 황녀님이시다! 분명해! 황녀님께서 우릴 살려 주신 거야!”

“건물이 새까맣게 타 버렸는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나 했는데……!”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감사, 감사합니다!”

특히 딸을 끌어안은 중년 부인은 아예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깨달음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당근 꼬다리의 마력 폭발 전조를 감지하고 내가 가장 먼저 한 게 그거였으니까.

그냥 놔뒀다간 뼈도 못 남기고 타 버릴 사람들을 결계로 보호해 줬다.

‘살릴 수 있는데 죽게 놔두는 건 찝찝하니까. 나랑 척진 사람들도 아니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내가 가까이 있었으니 다행이지.’

조금만 더 멀리 떨어져 있었더라면 이들을 구하진 못했을 것이다. 황궁까지의 거리라면 분명히.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띠링띠링 떠올랐다.

[퀘스트 완료!]

[퀘스트 명: ‘유해 당근의 구제 대책’]

갈수록 시스템의 작명이나 제목 짓는 센스가 맛이 가는 것 같다.

이건 아까 내가 당근 꼬다리의 움직임을 깨달은 순간 주어졌던 돌발 퀘스트였다.

그런데 좀 이상한데?

왜 벌써 퀘스트가 완료된 거지?

아직 당근 꼬다리 제압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악! 꺄아아악!!”

피를 토하고 조금 얌전해졌던 당근 꼬다리가 제 몸을 긁으며 발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누가 봐도 광인의 모습으로.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살려 줘…….”

그러다가 당근 꼬다리는 그대로 푹 엎어져 버렸다.

‘아, 이래서 퀘스트가 완료된 거구만.’

기절한 당근 꼬다리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빠…….”

그때 정말 어쩔 수 없이 끼어든다는 티를 팍팍 내는 방해자가 나타났다.

“벨론드 대공?”

당근 꼬다리와 콩나물 대가리의 부친이자, 아빠의 이복형.

‘전생에는 아빠도 엄마도 가족이 없었는데 말이야. 차라리 없는 게 나은 가족이라니. 아빠도 불쌍해.’

그는 시종을 시켜 기절한 당근 꼬다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대공저로 데려가라.”

그런데 그 말투며 태도에서 위화감이 너무나도 강하게 느껴졌다.

이건 내가 아빠에게 사랑을 듬뿍 받는 딸이라서 아는 걸지도 모른다.

당근 꼬다리를 곁눈질로 내려다보는 벨론드 대공은 절대 누군가의 부친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저 꼴로 쓰러졌다면, 우리 아빠는 당연히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와서 끌어안았을 것이다.

저렇게 차가운 눈으로 보며 아랫사람들에게 짐짝처럼 넘기는 게 아니라.

“딸이 능력 증명에서 패한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놓은 모양입니다.”

저렇게 책임을 딸에게만 미루고, 남의 이야기 하듯 말하지도 않겠지.

그러니까, 지금처럼.

“잘도 그따위 말을 하는군. 지금 보지 않았나? 네 딸이 감히 내 딸을 공격했어.”

어느새 달려와 나를 안아 들고 살기 가득한 눈으로 대공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 아빠처럼.

“그 죄는 너와 네 딸 모두의 목숨으로 사죄해도 모자랄 거다!”

쿵!

아빠의 분노는 그대로 마력으로 분출되었다.

나에게는 더없이 다정하고 안온했지만, 외부에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조금 전 나를 위협한 당근 꼬다리 부녀에겐.

“큭!”

벨론드 대공은 아빠의 분노를 견디지 못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항복의 표시가 아니라, 선 채로 이 압력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오히려 내 예상보다 조금 더 버틴 편이다.

태양의 마력을 갖지 못해, 계승권이 없는 황족이었지만. 다른 종류의 마력은 갖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아빠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지만.

대공은 입술이 피나도록 씹으며 아빠를 노려보았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 자는 아빠를 단순히 싫어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강력한 태양의 마력과 황위. 본인이 갖지 못한 모든 것을 다 손에 넣은 것이 아빠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아빠를 증오하고 있었다.

마치, 당근 꼬다리가 나를 노려볼 때의 눈빛 같았다.

‘그렇게 보면 참 닮은 부녀긴 하네.’

분노한 건 아빠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불꽃이 난동을 부린 덕분에 주변 공기는 꽤나 후덥지근했다.

그런데 그 공기가 일순간에 얼어붙었다.

쩌적, 쩌저적!

당근 꼬다리를 옮기던 시종들은 당혹했다. 멀쩡하던 땅이 얼어붙으며, 그들의 발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오빠가 근처 옥상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감히 죄인을 끌고 도망치려 하다니.”

아빠와 오빠는 나보다 한발 늦게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내가 당근 꼬다리의 마력 방출 전조를 느낀 순간.

아빠랑 오빠를 마력으로 묶어 놓고 그대로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아가!”

“리샤!”

내 마력을 전력으로 풀었다간 나에게 충격이 갈 것을 염려해서 살살 푸느라, 두 사람은 현장에 조금 늦은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런 짓을 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내가 패 버릴 거니까!’

둘이 바로 쫓아오게 놔뒀다간 내가 뭘 해 보기도 전에 방해할 확률이 컸다.

그렇다. 난 몇 년 전 콩나물 대가리와의 일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냥 놔뒀다간 둘이 “리샤를 지킬 거야!” “우리 애기를 공격하는 걸 어떻게 두고 보란 말이냐!” 이럴 게 분명해서였다.

그리고 나의 계산은 정확히 맞았다.

‘좋아! 그래도 이번엔 내가 선빵(?) 쳤다!’

나는 아빠의 품에 안긴 채 승리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아빠의 작은 속삭임이 귓전을 울렸다.

“이렇게 위험한 짓은 제발 하지 말아다오. 아빠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빠의 말은 진심이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리며 뛰는 것이 내 귀에 다 들릴 정도였다.

나는 아빠를 안심시킬 겸 해맑게 웃었다.

“괜찮아요. 내가 훨씬 세니까!”

이건 순수한 100% 사실이다. 실제로 내가 패 주고 싶어서 달려온 거기도 하고.

그런데 아빠랑 오빠의 반응이 예상외였다.

아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작은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렇게까지 아빠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빠는 어른이고 충분히 강해.”

오빠는 얼음의 마력으로 당근 꼬다리와 벨론드 대공까지 꽁꽁 묶어 놓고, 나와 아빠의 곁으로 날아왔다.

오빠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괜찮은 거지, 리샤?”

아빠랑 오빠 표정만 보면, 내가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위험에 뛰어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 설마?

나는 혹시나 해서 <궁예> 스킬의 부가 효과를 켜 보았다.

운 좋게 한 번에 성공.

[아빠 : ‘우리 애기가 그만큼 가족을 사랑하고 지키고 싶어하는 건 기특하지만, 그래도 아빠를 좀 믿어 주면 좋으련만…….’]

[오빠 : ‘리샤, 이번에도 또 날 지키려고……!’]

아닌데.

그냥 난, 짜증 나는 당근 꼬다리를 혼자 패려고 득달같이 달려온 것뿐이다.

둘 다 너무 확대 해석 하고 있어서, 실토했다.

“난 그냥 당근 꼬다리 빨리 혼자서 패 주려고 온 건데.”

하지만 역효과가 났다.

[아빠 : ‘크흑, 또 아닌 척 우리를 생각해 주는 변명이라니. 어쩌면 내 딸은 이리도 착하고 다정하단 말인가.’]

[오빠 : ‘리샤아! 오빠가 더 강해질게! 그래서 믿고 의지할 수 있게 하고 말 거야!’]

“…….”

사실대로 말해도 통하지 않으니 이길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벨론드 대공의 발악이 우리의 귀를 사로잡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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