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8/218)

Level 14. 메인 퀘스트 : 박수 칠 때 (05)

“대체 무엇이 내 딸의 죄란 말입니까!”

대공의 적반하장에 아빠는 차갑게 분노했다. 살을 엘 듯한 살기가 넓게 퍼져 나간다.

“감히 황녀를 공격한 것이 죄가 아니라면 뭐라는 건가? 이는 반역으로 다스려도 모자라다.”

“내 딸도 황족입니다!!!”

벨론드 대공은 입술을 짓씹으며 외쳤다.

“황족과 황족 사이에는 언제든 서로를 노릴 수 있는 불문율이 존재하지요! 이게 반역이라면, 형제자매와 사촌까지 다섯을 죽인 누군가는 다섯 번은 처형당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저 ‘형제와 사촌 다섯을 죽인 자’가 아빠를 의미한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서리서리 증오와 열등감이 들러붙은 목소리였다.

나는 아빠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싫은 사람이라지만, 이번 생에는 아빠와 피가 이어진 사람이다.

형제에게 저런 말을 듣는 것은 상처가 될지도…….

아빠는 씨익 웃었다.

“네 말대로 나는 이 손으로 혈족을 여럿 죽였다. 꽤나 치열한 싸움이었지. 모두가 목숨과 명예를 걸고 싸웠어.”

“그렇지요! 폐하께서는 참으로 잔인하셨습니다!”

벨론드 대공이 간신히 치켜든 턱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빠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하지만 너는 그 살육의 장에 끼일 자격도 얻지 못하지 않았나.”

“……!”

“너에게는 죽일 가치조차 없었지. 하스토트.”

벨론드 대공의 가장 아픈 곳을 사정없이 찌르는 말이었다.

나도 아빠를 따라 사악하게 웃었다.

‘그렇지! 그래야 우리 아빠지!’

아무리 아빠가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마음이 약하고(?) 순한(?)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이다.

절대 남에게 당하고는 못 살지, 암!

나는 아빠의 어깨를 톡톡 쓰다듬어 주며 칭찬해 주었다.

“잘했어요!”

아빠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

“너에게는 죽일 가치조차 없었지. 하스토트.”

끔찍할 정도로 치욕적인 말이었다.

그의 일생에 있어 가장 크고 치명적인 약점을, 승자인 이복동생의 입으로 지적당한 것이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어린 시절.

그는 한때나마 저 이복동생을 무시했었다.

자신이 태양의 마력을 얻지 못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시절.

“멍청한 카스톨트!”

“그 정도 힘을 가지고 태양의 마력을 가졌다고 하기 부끄럽지 않아?”

“너 따위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황족의 자격을 잃을 거야!”

그때마다 훨씬 어린 주제에 카스톨트는 차갑게 웃을 뿐이었다.

그때는 마주 욕하거나 저항할 용기도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그는 곧 알게 되었다.

기실, 이복동생은 그를 견제할 자격조차 없는 쓰레기로 치부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결국 형제자매, 사촌들 중에서 오로지 그만이 태양의 마력을 각성하지 못했고, 그로써 카스톨트가 옳았음이 증명된 셈이다.

카스톨트는 마지막 반란을 제 손으로 진압하고 황제의 관을 썼다.

그 순간, 하스토트는 황족의 자격을 빼앗겨 더는 ‘전하’라 불릴 수 없게 되었다.

일개 벨론드 백작의 작위를 받은 것이 전부. 황족의 자격이 없었기에 대공위는 받지 못했다. 그의 아들이 태양의 마력을 각성하기 전까지는.

죽느니보다 더한 치욕.

‘죽일 가치조차 없다’는 말은, 그때의 굴욕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게 했다.

벨론드 대공은 분노로 온몸을 떨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보란 듯 태양의 마력을 과시하고 있는 황제. 그 품에 안긴 일곱 살짜리 황녀. 그리고 그 곁으로 다가가 동생을 지키려는 듯이 선 황자.

저 셋 모두 그가 끔찍하게 증오하는 존재였다.

그가 가지지 못한 태양의 마력을 갖춘, 제힘으로 당당하게 황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들.

저들과 지금 자신의 처지는 꼴사나울 정도로 대비되었다.

높은 곳에 오만하게 선 저들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자신.

태양의 책에 이름을 올린 황족인 저들과, 혼자선 황족으로서의 지위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자신.

그때, 대공의 눈에 바닥에 쓰러진 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분노는 늘 그렇듯 약한 쪽을 향했다.

‘세실리아! 쓸모없는 것! 저렇게 한심하게 쓰러져서 내가 이런 치욕을 당하게 하다니!’

게다가 그에게 있어 자식들은 분노를 터뜨리기 만만한 대상이기 이전에.

증오해야 마땅한 대상이었다.

‘내가 가졌어야 마땅한 힘을 빼앗아 간 놈들!’

눈앞의 딸도, 몇 년 전에 쫓아 보냈다 알려진 아들 역시.

그는 자식들에게 늘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식들에게 자신의 마력을 빼앗겼다 믿었기 때문이다.

‘내 자식 중 둘이나 마력을 타고난 것을 보면, 분명하지 않나. 저 둘의 마력은 내 것이었어야 했는데!’

평생을 열등감에 시달려 온 벨론드 대공의 사고방식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본인이 그리 믿는 것이 중요할 뿐.

때문에 벨론드 대공에게 두 자식은 황위를 노릴 수단이면서,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간 도둑이었다.

사랑하거나 아끼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열등감과 치욕으로 바닥에 처박힌 그의 머리 위에 황제의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

“당장 대공과 대공녀를 구금하라. 대공녀에겐 마력을 남용하여 민간에 피해를 입히고 또한 감히 황녀를 공격한 죄를, 대공은 이를 조장한 죄를 정식으로 물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는 못 합니다!”

벨론드 대공은 다시 발악했다.

다들 의아한 눈을 했다. 이미 모두가 보지 않았나.

대공녀가 발광하며 황도에서 마력을 써서 재난을 일으킬 뻔했다.

이것만으로도 중죄였다. 황족이 가진 태양의 마력은 만민과 대륙을 위해 써야 했다.

그런데 도리어 죄 없는 사람들을 공격했으니, 황족으로서 자격이 없었다.

그냥 놔뒀다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났을 터다.

별 피해가 없었던 건 전적으로 어린 황녀 덕분이었다.

그런데 대공녀는 그런 황녀마저 공격했다.

이 죄를 처벌하지 않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벨론드 대공은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며 외쳤다.

“이미 이 자리의 모두가 증인입니다. 세실리아와 황녀가 서로를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능력의 증명’이 이미 시작된 것이라 봐야 할 터!”

“능력 증명은 이미 세실리아가 리샤에게 패한 것으로 결론이 났는데.”

벨론드 대공은 시건방진 말투로 끼어드는 조카 루퍼스리안을 노려보았다.

“그건 지난번의 ‘능력 증명’이지. 그때는 세실리아가 패배하고 금광을 빼앗기고 끝났지만. 세실리아의 황위 계승권은 아직 건재해. 다시 한 번 ‘능력 증명’에 도전할 자격은 충분하다!”

지금 대공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전 대공녀가 황녀를 공격한 일은 어디까지나 황족 사이의 ‘능력 증명’을 위한 도전이었을 뿐이다.’

-라고.

그는 다시 외쳤다.

“세실리아는 아나트리샤 황녀에게 도전했다. 황녀가 이를 받아들이는 건 황족으로서의 의무!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하셔도, 황족 간의 ‘능력 증명’에는 관여하실 수 없습니다!”

대공의 말대로이긴 했다. 

황위 계승권자 간의 결투, 즉 ‘능력 증명’은 타인이 끼어들 수 없는 절대적인 의식이었다.

황제라도, 아니, 황제이기에 더더욱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것.

대공 측이 직접적으로 주장한다면 이 사건을 능력 증명으로 해석할 여지는 충분했다.

‘지금 내가 나서면 아나트리샤의 권리와 정통성이 위협받게 된다.’

루퍼스리안이 다급하게 외쳤다.

“리샤는 아직 너무 어립니다, 아바마마! 제가 도전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이를 막았다.

“아니. 이 도전은 내 거야. 오빠는 나서지 마. 아빠도요.”

어린 황녀는 더없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벨론드 대공이 알아서 덫으로 기어들어 와 줬다.

먼저 나와 당근 꼬다리가 공격을 주고받은 걸, ‘능력 증명’으로 몰고 가 준 것이다.

‘나이스!’

내가 거부할 리가 없었다. 내가 도전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아빠와 오빠는 놀란 눈을 했다.

또 뾰롱뾰롱 아빠와 오빠의 착각이 줄줄이 이어졌다.

[아빠 : ‘겨우 일곱 살의 나이에 능력 증명이라니! 너무 일러! 위험하다! 루퍼스에게도 너무 이른 것을, 이렇게 작은 아이가…….’]

[오빠 : ‘내가, 내가 하려고 했는데! 리샤가 또 날 지켜 주려고!’]

난 분명히 대놓고 말했다. 내가 패 주려고 하는 거라고.

그런데도 두 사람은 알아서 착각의 나래를 마구 펴고 있었다.

걱정과 감동의 파도에서 휩쓸리는 두 사람의 착각을, 나는 이번에는 정정해 주지 않았다.

‘그래, 그냥 그런 거로 하자. 이 기회에 효도하는 거지. 뭐.’

내 말이 취소될세라, 대공은 냉큼 못을 박으려 들었다.

“분명히 황녀께서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번의 ‘능력 증명’은 폐하께서도 취소하지 못하십니다!”

“알았어. 나도 동의했어.”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대공의 미간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대공 : ‘저 새파랗게 어린 계집애가 버릇없이……! 됐어. 어쨌든 이걸로 된 거야. 뭣도 모르는 계집애가 물러나기 전에 확정을 지어야…….’]

그때 시간이 다 되어 <궁예> 스킬의 부가 효과가 꺼졌다.

더 확인할 것도 없었다.

남은 건 표정으로 다 보이는 속내뿐이었으니까.

어린 조카가 반말했다고 발끈하면서도, 겉으로는 제대로 티도 못 내는 비겁한 인간.

차라리 당근 꼬다리나 콩나물 대가리가 이 인간보단 나았다.

‘그걸 생각하면, 역시 쟤만 대공이라고 불러 주는 건 불공평해.’

저런 인간 이름을 외우는 것도 귀찮고 짜증 나니까. 나는 간단하게 마음속으로 그의 별명을 결정지었다.

‘애비 실격.’

좋아. 딱 맞아.

나는 헤죽 웃으면서 애비 실격에게 물었다.

“근데 말이야. 그렇게 보면 두 번째 능력 증명도 내가 이긴 거 아냐?”

“무, 무슨……!”

나는 한 대 팼다고 맥없이 피 토하고 기절한 당근 꼬다리를 가리켰다. 시든 당근처럼 늘어진 애를.

“쟤 지금 기절했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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