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4. 메인 퀘스트 : 박수 칠 때 (06)
***
황녀의 날카롭고 당연한 지적에 주변에 모인 황도 주민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마, 맞아! 대공녀가 한 대 맞고 기절했으면 끝난 거지!”
“우리도 다 봤어! 황녀님이 귀여운 주먹으로 한 대 때리니까 대공녀가 곧바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이미 황녀님이 이기신 거야!”
워낙에 규모가 큰 난리였기 때문에 증인이 너무 많았다.
벨론드 대공이 저들이 ‘능력 증명’의 증인이라 말한 이상, 스스로 저들의 증언 능력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대공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말도 안 돼! 내가 얼마나 세실리아에게 공을 들였는데, 이따위로 시작도 못 해 보고 끝낼 수는 없어!’
대공은 어떻게든 억지 논리를 쥐어짜 내려 애썼다.
“아. 아직입니다! 아직 세실리아는 더 싸울 수 있어요! 저 애가 재각성한 지 얼마 안 되어 마력이 불안정해서 쓰러진 겁니다! 황녀에게 당해서가 아니라!”
잘 들어 보지 못한 단어에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재각성? 이게 무슨 말이지?”
“처음 들어 보는데, 억지 부리는 거 아냐?”
하지만 황제는 당연히 대공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었다.
“세실리아가 마력 재각성을 했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때때로 마력을 각성한 이후에 다시 마력이 급속도로 느는 것이 ‘재각성’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얼굴에 자신감 어린 미소가 번졌다.
“다름 아닌 폐하께서도 직접 경험하신 것이니, 누구보다도 잘 아시겠지요.”
“…….”
카스톨트 황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다물었다.
대공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제는 3세 무렵 태양의 마력을 각성했으나 그 능력이 미약했다.
그런데 갑자기 10대 중반에 재각성하며 능력이 급격하게 개화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세실리아가 잠시 이성을 잃은 것도, 조금 전에 피를 토하며 의식을 잃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재각성 직후에는 마력이 불안정하고, 자칫 잘못하면 폭주할 위험성도 크니까요. 폐하께서 잘 아시는 것처럼.”
“…….”
아나트리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재각성이라고?’
전생에도 헌터들에게 재각성의 개념이 있었다.
실제로 멀리 갈 것 없이 이번 생에, 그녀가 오빠를 <궁디팡팡>으로 두 번째 마력을 각성시켜 준 적이 있지 않나.
그 두 번째 각성이 바로 재각성 현상이었다.
전생에도 몇 번 본 적 있었고, 재각성한 직후 헌터의 마력이 불안정해지고 폭주 위험성이 생기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당근 꼬다리의 상태는 그거랑 좀 달라 보였는데.’
그때였다. 누구도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졌다.
아나트리샤가 포로롱 날아가 세실리아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리샤!”
“세실리아!”
두 부친의 상반된 목소리가 울렸다.
한 명은 순전히 딸의 안위를 걱정하여 외친 말이었고, 다른 이는 무언가가 들킬까 염려한 불안한 외침이었다.
동시에 아나트리샤의 눈에만 비치는 시스템 메시지가 빠르게 나타났다.
[스킬 <너의 아우라가 보여(A급)>이 적용 가능합니다. 적용하시겠습니까?]
[정보를 시각화합니다…….]
기절한 세실리아의 체내 마력 회로 상태가, 아나트리샤의 눈앞에 상세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공은 두려움에 머뭇거리면서도 제 딸과 황녀를 떼어 놓으려 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설마 세실리아를 해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일곱 살짜리 어린 소녀를 위협하는 말투.
아나트리샤는 일부러 순진하고 귀여운 표정을 짓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우웅? 내가 왜요? 리샤는 쎄씨가 걱정되어서 온 건데. 괜찮아, 쎄씨? 많이 아파? 어떡해……. 히잉.”
“…….”
대공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이 영악한 계집애가!’
황녀가 진심으로 대공녀를 걱정하는 것일 리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은 전혀 다른 구도였다.
겨우 일곱 살의 작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해맑은 어린 황녀가 사촌의 손을 잡고 걱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황녀는 조금 전에 대공녀가 일으킬 뻔한 엄청난 인명 사고를 막아 준 사람이었다.
당연히 주변의 여론은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황녀님은 얼굴만 귀여우신 게 아니라 마음씨도 어쩜 저렇게 착하실까.”
“우리를 구해 주신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을 위협한 사촌까지 걱정하시다니.”
“아무리 딸 편을 들어도 그렇지. 대공께선 왜 저렇게 경계하실까요?”
“저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우신 분께 저렇게 냉혹하게 굴다니! 인간의 마음이 없는 게 분명해!”
“딸 편들겠다고 저 어린 황녀님께 ‘능력 증명’ 같은 가혹한 일을 강요하다니, 짐승!”
아무리 벨론드 대공이 민중의 여론을 무시하는 사람이라지만, 눈앞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눈총과 험한 말들까지 무시하긴 힘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황녀에게 살짝 머리를 숙였다.
“딸의 폭주를 막아 주시고, 걱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공은 굴욕감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교활한 계집애 같으니. 기어이 내가 머리를 숙이게 만들다니.’
한편으로 그는 쓰러진 딸에게 증오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뛰쳐나가서는 일을 이따위로 만들어!’
그제야 아나트리샤는 세실리아의 손을 놔주며 환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주변에서는 어린 황녀의 사랑스러운 미소와 그 비단 같은 마음씨에 대한 감탄이 속출했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귀여우실까. 저런 딸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대공가는 엄청난 은혜를 입은 거네요. 대공녀의 폭주를 막아 줬으니!”
“그런데도 저렇게 어린 조카에게 적대적으로 구시다니. 대공녀야 폭주 위험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아니, 폭주 때문이라고 해도 너무 이상했어요. 사실 대공녀께서 아랫사람들에게 얼마나 가혹한지는 이미 소문이 다 나 있다고요.”
온갖 부정적인 쑥덕거림 속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그러면 ‘능력 증명’은 어떻게 되는 거죠?”
“아까 대공께서 이미 황녀님과 대공녀의 능력 증명 의식이 시작된 거라고 주장하셨는데.”
“하지만 지금 대공녀 상태가…….”
“능력 증명이 맞다 해도 황녀님 말씀대로 이미 황녀님이 이기셨다고 봐도 되지 않나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대공은 당황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아직 ‘능력 증명’ 의식은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세실리아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조금 전에 이미 ‘능력 증명’이 시작되었다고 우긴 건 어디의 누구였지?”
“……!”
황제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조롱이 가득했다. 여론 역시 황제에게 동조했다.
하지만 대공은 물러설 수 없었다.
이제 그의 자식 중 황위 계승권이 명목상이나마 남은 건 세실리아 하나였으니까.
“황족 간의 ‘능력 증명’은 신성한 것! 지금은 무리지만 세실리아의 상태가 회복된 후에는 반드시 재개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딸에게만 유리한 주장을 펼치는 그의 뻔뻔함에 혀를 차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순진한 황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쎄씨가 다 낫고 나서 해요! 나도 정정당당하게 이기고 싶으니까!”
주변에서 어린 황녀의 순진함에 대한 감탄과 걱정의 말들이 터졌다.
대공의 비열함에 대한 비난 역시.
하지만 당연히 벨론드 대공은 눈곱만큼도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됐다! 그래,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계집애를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지!’
조금 전까지 아나트리샤를 영악하다고 욕하던 건 잊어버린 듯한 태도였다.
아나트리샤는 다시 아빠의 품에 폭 안겼다.
“아빠!”
영락없이 착하고 순진한 일곱 살짜리 아이다운 모습이었다.
다만 누구도 아빠 품에 안기는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사악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
‘헹! 재각성 좋아하네!’
이미 스킬로 세실리아의 상태 확인을 마쳤기에 나올 수 있는 확신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씁쓸한 표정 역시 떠올랐다.
아나트리샤는 대공의 명령으로 시종들이 세실리아를 끌고 가려는 것을 묘한 눈으로 보았다.
‘조금, 불쌍할지도……. 애비 실격 놈, 딸에게 저런 짓을 하다니…….’
그래서였다.
아나트리샤가 불쑥 나선 것은.
“내가 쎄씨 보살펴 줄게!”
“……네?”
“뭐라고?”
“왜?!”
대공은 물론 황제, 황자에게서도 경악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
세실리아는 타는 듯한 목마름과 함께 깨어났다.
“아……. 목, 말라.”
잔뜩 쉰 목소리가 낯선 곳의 공기를 긁었다. 처음 보는 천장의 무늬에 의아하기도 전에.
세실리아는 들끓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 백치 계집애가 감히!!!”
동시에 불안정한 태양의 마력이 용암처럼 흘러넘쳤다. 이는 세실리아의 마력 회로를 붕괴시키고, 몸에 고통을 주었다.
세실리아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아악! 아파! 아파아!”
침대 위에서 바르작거리는 세실리아에게 전혀 예상 못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렸네?”
‘이 목소리는?’
잘 아는, 그것도 증오해 마지않는 목소리.
세실리아는 고통도 잠시 잊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침대 맞은편에 호화롭게 차린 티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은 작은 소녀.
붉은 기운이 도는 금빛 고수머리가 몽실몽실 흔들린다.
분홍빛 뺨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세실리아는 맞은편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몰골을 볼 수 있었다.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 눈앞의 황녀와 너무나도 대비되었다.
비참하리만치.
으득.
세실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아나트리샤는 자그마하게 한숨을 쉬고는 중얼거렸다.
“난 백치 아니라니까. 너 학습 능력 진짜 없구나.”
“이익! 너……!”
세실리아는 다시 분노하여 날뛰려 했다. 하지만 가슴속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그대로 엎어져 헐떡거릴 뿐이었다.
“으, 아윽…. 아으으…….”
너무 끔찍한 고통이었다. 귀하게만 자란 몸으로는 버티기 너무 힘든 통증.
세실리아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런 그녀에게, 귀여운 목소리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가혹한 선언이 들려왔다.
“너, 이대로는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