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1/218)

Level 14. 메인 퀘스트 : 박수 칠 때 (08)

버릇없고 적반하장으로 구는 어린애를 달래고 구슬리는 건 내 특기가 아니다.

게다가 그 어린애가 내 역린인 ‘엄마’까지 건드렸다면 더더욱.

‘분명히 퀘스트에 당근 꼬다리를 협박하거나 위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소리는 없었잖아.’

그렇다면, 설득(물리)으로 대답을 얻어 내도 문제없다는 소리다.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퀘스트 성공이고 나발이고는 다음 문제였다.

‘나 진짜 화났다고!’

나는 환생 이후 처음으로 지금의 몸이 감당해 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살기를 흘렸다.

“아, 아아……?!”

당근 꼬다리의 해쓱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나의 진심 어린 살기를 품은 마력은 당근 꼬다리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지금까지 내가 많이 봐주고 있었다는 걸, 세실리아는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흐, 억?”

[세실리아 : ‘수, 숨이 막혀! 살려 줘!’]

나는 분이 좀 풀릴 때까지 살기를 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신체에 흔적이 남아서 대공이 난리 칠 빌미를 주기 싫어서였다.

이러다가 기절하겠다 싶은 시점에, 나는 당근 꼬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 애는 침대 시트 위로 엎어지며 겨우 숨을 토해 냈다.

“헉! 어억! 으허엉!”

정신적으로는 한번 죽음을 경험한 수준의 공포를 느꼈으리라.

처음 경험하는 두려움에 세실리아는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엉엉 울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제 오빠보다는 나은 점이 있긴 했다.

‘얜 안 지렸네?’

그놈은 이것보다 훨씬 약한 걸 경험해 놓고, 노랑 바지를 만들어 버렸는데 말이다.

그리고 얜 부정적인 의미에서도 내 예상을 뛰어넘어 버렸다.

“헉! 내가, 내가 뭘 어쨌다고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난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너 진짜 엄마 없잖아! 어떻게 이렇게 못될 수가 있어? 그냥 태어난 것만으로 황녀 자리를 손에 넣은 주제에……!”

“…….”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처음에는 내 성미에는 안 맞지만 조금은 구슬려 볼 생각이었다.

다음에는 그냥 대충 겁을 줘서 정보만 듣고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

나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래. 너는 엄마 아빠 다 있어서 좋겠다. 내세울 게 그거밖에 없지?”

“뭐, 뭣?!”

나는 고개를 숙여 당근 꼬다리의 귀에 속삭였다.

“하지만 난 너처럼 자식을 사랑하지도 않고 도구로 생각하는 부모를 가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당근 꼬다리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너, 너!!!”

나는 헤죽 웃어 주면서 당근 꼬다리의 푸슬푸슬 결이 상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널 사랑하지 않는 부모님 곁으로 가렴. 가서,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고통받으면서 죽을 때까지 이용만 당해.”

“뭐, 뭐……?”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당근 꼬다리는 바로 알아들었다.

내가 내밀어 줄 수 있었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그냥 돌아가.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애비 실격 옆에 사교도가 붙어 있는 건 확실하니까.

그 사교도의 정체를 알아내고 족칠 방법은 수없이 많았다.

굳이 당근 꼬다리 따위에게 목맬 필요가 없는 거다.

내가 휙 뒤돌자, 당근 꼬다리는 비명처럼 외쳤다.

“내 정보가 필요하잖아!”

“필요 없어.”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꾸했다.

진짜로 필요 없었다. 기회를 줬지만 차 버린 건 저 애고, 나는 이 이상 자비를 베풀 필요성을 못 느꼈다.

“날 살려 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

방법이야 안다. 물론 그걸 저 애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는 있지만.

하지만 적반하장으로 굴면서, 감히 엄마까지 끌어들여 날 모욕하는 애에게 베풀 자비는 없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서 손을 한번 흔들어 주었다.

“‘능력 증명’ 때 보자. 안녕.”

그리고 그대로 문을 나섰다.

***

“어? 어어?”

세실리아는 당황했다. 정말로 아나트리샤는 방을 나가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혼자 놔두고서.

‘뭐야? 어째서? 나를 구해 줘야지. 살려 준다면서!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불쌍한 나를 왜 무시하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건가.

세실리아는 굶주린 동물처럼 덜덜 떨리는 다리로 뒤늦게 아나트리샤가 사라진 방향으로 움직이려 애썼다.

사실 느끼고는 있었던 탓이다.

“너, 이대로는 죽어.”

아나트리샤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온몸의 상태가 비정상이다. 강해지고 있는 마력이 몸을 망가뜨리고 있는 건 확실했다.

‘진짜 죽을지도 몰라.’

황녀의 지적은 화가 나고 짜증 나지만 세실리아의 두려움을 정확하게 집어냈다.

그래서 먼저 황녀가 손을 내밀었을 때, 세실리아는 분명히 조금 안도했다.

황녀 따위가 대체 무슨 수로 자신을 살릴 방법을 안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당장 도움의 손길이 간절했다.

부정하고 싶고 수치스럽지만 사실이었다.

그래서 조금 심술을 부리고 떼를 쓴 것뿐이다.

이렇게 불쌍하고 가여운 자신은 조금쯤은 그래도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다 가진 아나트리샤라면 당연히 받아 줘야 하지 않은가.

세실리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날 그냥 두고 갔다고? 정말?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원망과 서러움이 왈칵 치솟았지만, 그 이상으로 두려움이 컸다.

살고 싶었다.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세실리아는 비틀거리면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아나트……!”

하지만 그곳에는 세실리아가 찾는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벌써 저 멀리, 가족과 주변인들의 애정 어린 시선에 둘러싸인 채 사라지는 아나트리샤가 보였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로는 달려가도 잡을 수 없었다.

아니, 잡더라도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일어났느냐, 세실리아.”

“너무 늦었지 않니.”

어느새 부모님이 와 있었다.

분명히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 주어야 할 가족이다.

그런데 저들은 왜 저렇게 차갑고 비난하는 눈으로만 자신을 보는 걸까.

대공 부부는 딸에게 빈말로도 아프지 않으냐는 걱정을 입에 담지 않았다.

“어서 돌아가자. 가서, ‘능력 증명’을 준비해야지.”

세실리아는 지독한 불안감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은 유일하게 주어진 기회를 제 손으로 쳐 내버린 게 아닐까.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

당근 꼬다리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도살장으로 가는 소처럼 대공저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공은 한 달 뒤에 ‘능력 증명’ 의식을 치르자고 제안했다.

‘그 사이에 당근 꼬다리의 마력을 더 끌어올릴 생각이군.’

그러면 안 그래도 위험해진 당근 꼬다리의 목숨이 더 짧아지겠지.

그리고.

[완료해야 할 퀘스트가 있습니다.]

퀘스트 실패가 뜨지 않았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당근 꼬다리, 진짜 살고 싶긴 한 모양이네. 내 말에 혹하긴 했다는 소리니까.’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건 진심이다.

어차피 나한테는 <궁예> 스킬도 있고, 저번처럼 인비저블 아이로 대공저를 감시하기 시작할 예정이기도 하니까.

‘대공저에 있는 사교도 끄나풀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야. 당근 꼬다리 따위, 알 바 아니라고.’

그런데 상황은 내 예상과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System Error! 아이템 ‘인비저블 아이’의 적용이 불가능합니다.]

“쳇.”

그 사교도 놈이 무언가 방어책을 꺼낸 모양이다.

하긴, 전생에도 사교도 중 고위에 있는 이들은 철저하게 정체를 숨길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전생에 열음 언니가 암살당한 거기도 하고.’

이렇다면 아마도, <궁예> 스킬로 속내를 확인한 자라도 완전히 안심하기 힘들었다.

이제 어떻게 한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 액션을 취하기도 전에 당근 꼬다리로부터 연락이 도착했다.

그러니까.

‘항복인 거네.’

나는 히죽 웃었다.

***

당근 꼬다리와의 ‘능력 증명’ 의식을 보름 앞둔 때에.

나는 황궁 외곽의 빈방에서 비밀리에 누군가와 접선했다.

당연히 그 상대는 당근 꼬다리였다.

나는 방긋 웃으며 감탄했다.

“그새 마력이 더 늘었네. 축하해?”

겨우 보름 사이, 당근 꼬다리는 거의 해골에 가까운 꼴이 되어 있었다. 빼빼 마른 손끝에는 붉은 수포가 터져 고름이 새고 있었다.

전형적으로 반각성 부작용에 시달리는, 죽어 가는 인간의 모습.

당근 꼬다리는 거의 보라색으로 물든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한 말, 진짜야? 날 살려줄 수 있어? 그런 방법이 정말 있긴 한 거야?”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근 꼬다리는 진물이 새는 손가락으로 내 망토 자락을 잡아 당겼다.

더없이 절박하게.

“나, 나 좀 살려 줘! 제발!”

나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틀렸어.”

“뭐?”

“부탁을 하려는 거라면 말도 자세도 틀렸다고 말하는 거야.”

내 귀로 듣기에도 내 목소리는 얼음보다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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