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4. 메인 퀘스트 : 박수 칠 때 (09)
***
세실리아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건가?
이렇게 힘들고 아픈, 불쌍한 자신을 두고.
아나트리샤는 다시 한 번 차갑게 대꾸할 뿐이었다.
“저번에도 지금도 부탁하는 사람의 말도 아니고, 자세도 아니야. 너.”
“……!”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지난번처럼 악을 쓰고 욕을 할 수는 없었다.
뒤늦게 세실리아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때, 거래를 제안하던 아나트리샤에게 원망을 쏟아 낸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걸.
특히, 아나트리샤에게 모친의 부재를 지적한 부분이.
세실리아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나트리샤의 가장 확실한 약점이었고.
자신이 유일하게 더 가진 부분이라 공격을 한 거였다.
그런데, 그 때문에 아나트리샤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 버린 것이다.
‘겨우 그 정도로!’
세실리아는 억울했다.
‘나는 이렇게 힘들고 아픈데. 그 정도로 삐져서 이렇게 심하게 굴 건 없잖아?’
하지만 적어도 지금 그 기분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건 알았다.
그랬다간 저 속 좁은 아나트리샤가 완전히 돌아서 버릴 테니까.
최소한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얻을 때까지는 참아야 했다.
세실리아는 천근처럼 무거운 입술을 애써 떼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살려 줘!”
털썩.
두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세실리아의 눈에서 서러움과 슬픔, 분노의 눈물이 새어 나왔다.
그날 이후에도 그녀의 부모는 세실리아를 더더욱 몰아붙이기만 할 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하다니……. 황제가 되고 싶다면서!”
“아파요. 죽을 것 같아요!”
“당연히 황제가 되려면 아픔 정도는 이겨 내야지!”
“……이러다간 정말로 죽을 것 같다구요!!”
“그게 뭐 어때서?”
“……네?”
“죽을 때 죽더라도 황녀를 쓰러뜨리고 죽으렴. 그러면 네 쓸모는 다하는 게 아니겠니.”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가 있어요……!”
“별것도 못 될 네 목숨이 이보다 가치 있긴 힘들단다. 그러니, 기쁘게 받아들이렴.”
그녀의 부모는 세실리아를 더더욱 닦달하기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간 그렇게 증오하던 아나트리샤뿐이었다.
이대로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 준 것도.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존재를 알려 준 것도.
세실리아는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자신의 나이 절반에 불과한 어린애에게 빌었다.
“제발, 제발 날 좀…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적어도 이 말 한마디만큼은 진심이었다.
아닐 수가 없었다.
***
[세실리아 : ‘나는 이렇게 힘들고 아픈데. 그 정도로 삐져서 이렇게 심하게 굴 건 없잖아?’]
[세실리아 : ‘정말 너무해! 하지만…… 이대로 말했다간 또 날 놔두고 가 버릴 거야.’]
[세실리아 : ‘죽기 싫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당근 꼬다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과하는 게 아니라는 건 예상한 대로였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고.
하지만 살고 싶다는 건 진심인 모양이니, 적어도 정보는 뽑아 낼 수 있겠지.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인벤토리에서 준비해 둔 걸 꺼냈다.
[아이템 명 : ‘상태 이상 해제 포션’(A급)]
[*부작용 : 단, 반각성 상태 이상을 해제할 경우, 모든 마력 회로가 비활성화 상태로 전환됩니다.]
이것은 ‘쑥쑥 포션’이나 아멘다 언니를 구한 ‘저주 정화 포션’과 비슷한 물건이다.
일일 퀘스트나 서브 퀘스트 추가 보상으로 엄청나게 쌓여 있던 물건.
그리고.
[이름 : 세실리아 벨론드]
[……]
[상태이상 : 반각성(B급)]
이 포션으로 간단하게 반각성 상태 이상을 지울 수 있다. 대가는 필요하지만.
나는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이걸 마시면 네 목숨을 좀먹고 있는 반각성을 지울 수 있어.”
당근 꼬다리의 눈이 빛났다.
“정말이야?”
“그래. 대신 대가가 필요하지.”
“무슨, 대가?”
“이걸 먹는 즉시 넌 마력을 전부 잃게 될 거야. 목숨보다는 싸게 먹히지?”
“……!”
당근 꼬다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고는 곧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에아루스 영애가 먹은 건 그런 문제 없었잖아! 나한테도 그걸 줘!”
아, 맞다. 얘, 내가 아멘다 언니에게 뭘 먹이는 걸 봤었지?
별문제가 아니라서 전혀 신경 안 쓰고 있었지만.
“그거야 너와 아멘다의 상태가 완전히 다르니까. 애초에 반각성은 신체와 마력 회로를 붕괴시켜 일시적으로 강력한 마력을 생산해 내는 금지된 술법이야. 그런 거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지.”
“나는 몰랐어! 몰랐다구! 그 대가가 마력을 잃는 거라니! 그랬다간 난 황족도 아니게 될 거야!”
징징 짜려고 하는 게 슬슬 짜증 났다.
나는 포션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럼 황족인 채로 죽든가.”
나는 다시 휙 몸을 돌렸다.
그러자 당근 꼬다리는 다급하게 내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아냐! 아냐! 괜찮아! 살고 싶어! 제발, 살려 줘! 제발 그걸 줘!”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러면 먼저 할 게 있지 않아?”
“…….”
당근 꼬다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잠시의 망설임 끝에, 내가 원하는 정보를 토해 냈다.
***
세실리아는 품속에 유리병 하나를 소중하게 품은 채 마차에 올랐다.
이것만 있으면 살 수 있었다. 이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아나트리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걸 마시면 살 수 있는 건 맞지만, 늦게 먹으면 소용없어.”
“늦으면…… 언제?”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아무리 늦더라도 적어도 보름 안에 마셔야 해. 네 상태가 더 심각해지면 지금 그건 소용없어질 테니까.”
세실리아는 갈등에 시달렸다.
마력을 잃는 건 싫다.
하지만 죽는 건 더 싫다.
이렇게 계속 고통받으며 살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녀에겐 ‘능력 증명’이 남아 있었다.
아나트리샤의 말대로 보름 안에 이걸 마시면, 능력 증명 전에 아예 마력을 잃게 될 거다.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아나트리샤가 한 말이 다 맞는 걸까? 보름 안에 먹으라고 한 건, 능력 증명 전에 내가 마력을 잃게 하려는 거 아냐?’
자신이 아나트리샤를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아나트리샤도 세실리아를 싫어했다.
이번에도 정보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걸 내준 게 아닌가.
자신이 비참하게 무릎 꿇고 비는 걸 즐기고 나서야.
‘저 냉혹하고 잔인한 계집애가 사실대로 말해 줬을 리 없어!’
그렇다. 어차피 이걸 먹으면 나을 수 있는 게 맞다면.
최대한 늦게,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고 나서 먹는 게 낫지 않을까?
부모님이 강요하는 비술 때문에 고통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마력이 엄청나게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보름만 지나면 정말로, 정말로…… 아나트리샤를 이길 수 있는 수준이 될지도 몰랐다.
‘그 계집애를 이기고 나서 먹어도 될지도 몰라.’
세실리아는 지금 자신이 자신에게만 유리한 방식으로 아나트리샤의 말을 해석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아나트리샤에 대한 증오와 억하심정.
그리고, 마력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이를 부추겼다.
‘그래. 적어도 나를 가지고 놀고 무릎 꿇게 한 대가는 치르게 한 다음에……, 그리고 그 다음에……!’
세실리아는 희망에 차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진정한 자신의 편이나, 자신을 살려 주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그곳으로.
***
의문이 들었다.
‘정말 보름이 지나기 전에 당근 꼬다리가 상태 이상 해제 포션을 먹을까?’
반각성 등급이 오르는 속도를 보니, ‘능력 증명’ 때쯤에는 최소 A급, 어쩌면 S급을 찍을지도 모른다.
A급까지는 괜찮았다. 내가 준 포션과 같은 등급이라, 반각성 해제가 가능하니까.
하지만 반각성이 S급으로 승급한 뒤에는 아무 소용이 없을 거다.
그리고 나조차 아직 상태 이상 해제 포션이나 저주 정화 포션은 S급이 없었다.
만일 당근 꼬다리의 반각성이 S급이 되어 버린다면……, 그땐 누구도 저 애를 구할 수 없을 거다.
그리고 저 애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알 바 아니야.’
나는 기회를 주었고, 그걸 사용하는 건 본인의 몫이니.
‘뭐, 필요한 정보는 얻었으니 상관없겠지.’
내가 기다리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완료!]
[퀘스트 명 : ‘나쁜 뿌리를 찾아서’]
[보상이 수령 가능합니다. 수령하시겠습니까?]
“오케이.”
퀘스트 보상을 확인하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뭐야……?”
왜 이런 걸?
***
그리고 보름 뒤.
나는 ‘능력 증명’의 의식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세실리아의 선택을 마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