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6/218)

Level 15. 메인 퀘스트 : 재회 (02)

***

‘능력 증명’ 의식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였다.

바로, 황녀의.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실리아와 아나트리샤의 나이 차이는 무려 일곱 살.

이렇게까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건 황위 계승권 다툼에서 꽤나 의미 있는 일이었다.

마력의 성장은 신체의 성장을 따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나트리샤 황녀는 유례가 거의 없을 정도로 어린 나이였다.

보통 루스템의 황족들이 본격적인 황위 계승 다툼에 나서는 건 10대 중반 이후였기 때문이다.

빨라도 열 살은 넘긴 이후가 대부분이다.

황녀의 오빠인 루퍼스리안이 아홉 살에 사촌인 아키러스를 꺾은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이번에 더 어린 여동생이 이를 갱신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일반 참관인들까지 모인 공개석상에서 말이다.

‘능력 증명’의 무대인 대연무장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어 있었다.

“황녀님 만세!”

“우리 황녀님!!!”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환호하지 않는 이들은 패자인 대공녀와 가까운 이들뿐이었다.

이 들끓는 기쁨의 열광은 딸을 품에 안은 황제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순식간에 끝났다.

고요한 와중에 황제는 담담하게 선언했다.

“아나트리샤 루스템과 세실리아 벨론드의 능력 증명 의식은 모두가 보는 바와 같이, 황녀의 승리로 끝났음을 선언하는 바이다.”

“와아아!!!”

“만세! 만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세실리아의 부모인 대공 부부조차도.

당연한,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더없이 잔인한 선언이 연이었다.

“전례에 따라 세실리아 벨론드의 황위 계승권은 박탈된다. 이에 따라, 그 아비인 하스토트 벨론드에게 내려진 대공위와 황족의 명칭 및 권리는 전부 회수된다.”

“……!”

대공은, 아니, 이제는 대공 위마저 빼앗기게 된 그는 이를 악물었다.

벨론드 대공이 황족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자식 둘이 황위 계승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장남인 아키러스가 이미 루퍼스리안으로 인해 계승권을 잃었고.

이번에는 하나 남은 세실리아마저 계승권을 빼앗겼다.

그러니 그가 대공 위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당연한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듯 굴욕과 원망 가득한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황제의 앞에서 대놓고 항의하거나 무언가를 주장할 배짱은 없었다.

“이에 따라, 하스토트 벨론드에게 다시 벨론드 백작의 위를 내린다.”

이제는 벨론드 백작이라 불리게 된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입 안의 살점이 다 뜯겨 피 맛이 났지만, 아픔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저항도 부정의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겐 힘도 권위도 없었기 때문이다.

벨론드 백작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황명에 복종하는 의사를 보였다. 옆에서 그의 아내 역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

‘능력 증명’ 의식이 끝난 직후.

황녀궁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당근 꼬다리를 쓰러뜨린 퀘스트 보상을 확인할 여유도 없을 정도였다.

“당장 궁의를 불러라! 전부 불러라! 우리 아가의 상태를 상세히 확인해야겠느니라!”

“정말,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리샤?”

아빠는 분노와 걱정에 가득 차서 의사를 부르고 있었고.

오빠는 울먹거리면서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유모와 시녀들도 큰 차이가 없었다.

“어허어엉! 우리 아기님이이!! 이런 험한 일을……!”

“대공녀, 아니지! 벨론드 영애 가만 안 놔둘 거예요!”

“감히 우리 아기님에게 그런 위험한 짓을……!”

유모와 시녀들은 내가 ‘아기님’ 소리를 많이 민망해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잘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건 전부 잊어버린 듯했다.

“손도 이렇게 작고 발도 요렇게 뽀짝하게 작은 우리 아기님이 그런 잔인한 능력 증명이라니이……!”

유모는 서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가슴을 탕탕 치고 있었다.

나는 잠깐 아연해졌다.

‘저기, 다들 봤잖아요? 내가 당근 꼬다리 패 주는 거?’

관중들이 열광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이겼다.

당근 꼬다리의 마력은 내게 상처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이 난리라니.

진짜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나라를 통째로 들어 엎을 기세였다.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결국은 나를 사랑하고 생각해서였다.

나는 포롱 날아올라, 테이블 위에 당당하게 섰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리샤 멀쩡해! 하나도 안 다쳤어! 잔뜩 패 줬다고! 걱정 안 해도 돼!”

그리고 내 말을 증명하듯, 테이블 위에서 빙글 한번 돌아서 전신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걱정과 분노의 울음이 아니라 다른 의미의 소리가 마구 터져 나왔다.

“으헉! 뽀짝, 빙글! 너무 귀여우셔요오옷!”

“으헝! 우리 아기님이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시다니! 유모는 여한이 없어요!”

“아아, 오늘의 코디도 너무 잘 어울리세요. 역시 패션의 완성은 귀여움……!”

아빠와 오빠는 유모와 시녀들의 말에 뭐라고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두 팔을 뻗어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도 마주 끌어안는데, 아빠가 속삭이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는 이런 위험한 일에는 나서지 말아 주지 않겠니? 제발 부탁이란다.”

아빠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긴, 당근 꼬다리의 마력은 반각성 때문에,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갑자기 강해진 주황색 마력을 확인한 아빠와 오빠는 당연히 경악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내가 반각성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랑 오빠에게는 전생의 기억이 없으니…….’

게다가 이런 내심도 있었다.

‘아빠랑 오빠가 위험해지는 건 싫은걸.’

나는 이미 전생에 아빠, 엄마, 오빠의 죽음을 차례로 겪어야 했다.

그 지독한 상실감과 슬픔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마왕과 사교도는 가족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인 제공을 한 자들.

나는 가능한 한, 이번 생엔 가족이 그들과 관계되는 걸 피하게 하고 싶었다.

물론, 영원히 모르게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미루고 싶은 게 진심이었다.

‘아, 정말이지 내 속마음까지 읽을 수 있는 스킬이 여긴 없어서 다행이야.’

아빠랑 오빠에게 이런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해맑게 웃으며 아빠에게 대답했다.

“네, 아빠! 아빠도 약속이에요! 리샤한테 말하지 말고 위험한 일 하지 않기!”

“그래. 그래.”

오빠에게도 말했다.

“나도 그럴 테니까, 오빠도 하지 말기!”

“……응, 리샤.”

오빠는 붉어진 눈가를 슥 닦으며 말했다.

나는 속으로 두 사람이 듣지 못할 사과를 미리 했다.

‘미안해요. 거짓말해서.’

***

대륙 남부의 오지.

나스카의 부유성은 이 밀림의 가운데에 떠올라 있었다.

나스카인들을 이끄는 이는 금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었다.

소년은 차가운 눈으로 밀림의 한 가운데, 기이하게 생긴 구조물을 내려 보았다.

“한발 늦었나.”

장로가 놀라움과 혐오감을 억누르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200년이 넘게 살아온 저지만, 이런 처참한 모습은…… 처음 보는군요.”

밀림의 한 가운데. 정교하게 돌로 세워진 제단이 수십 개 있었다.

그리고 제단 하나하나마다, 처참한 꼴의 ‘제물’이 놓여 있었다.

“이런 대규모의 인신 공양이라니.”

소년은 입술을 사리물었다.

제단에 바쳐진 제물들의 상태로 보아, 이곳은 몇 달 전까지는 사용되던 곳이다.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이 정도 규모라면 꽤나 큰 사교도의 무리들이 쓰던 본거지였으리라.

그렇다면 ‘그 여자’의 신변은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꼬리는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루라도 빨리 놈들을 잡아야 할 텐데.’

그는 제 왼손의 손등을 눌렀다. 왼손 약지에는 분홍빛 리본이 마치 반지처럼 묶여 있었다.

그 감촉을 확인하며, 미하일은 커지려는 불안감을 애써 억눌렀다.

‘괜찮아. 아직 시간이 있어. 아직은…….’

미하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북쪽을 향해.

‘그 소녀’가 있는 곳으로.

‘제발 내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니길.’

그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세계에도, 이번 세계에서도 그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기도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뿐이었다.

***

톡, 톡.

지하실에는 악취가 났다. 천장에 맺힌 습기가 물방울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물방울은 짙은 핏방울에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피와 오물의 가운데에서, 한 소녀가 버르적거렸다.

“아아. 아파. 아파요…….”

마구잡이로 잘린 주황색 머리카락이 비참해 보였다.

사지에는 상처와 멍이 한가득이었다.

세실리아는 두려움과 공포, 고통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선 이를 올려다보았다.

“용서, 용서해 주세요. 제발……!”

‘능력 증명’ 의식이 끝난 뒤 벌써 일주일.

그동안 세실리아는 이 지하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지하실의 주인은 차갑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지. 분명히 열 배 이상으로 증량시킨 마력이 전부 사라지다니…….”

“…살려, 주세요…….”

지하실의 주인은 세실리아에게 다가와 짧게 잘린 머리카락을 잡아 올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아가? 어떻게 네가 지금 살아 있는 건지, 그리고 왜 네 마력이 전부 사라져 버린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되는구나.”

바닥에서 버르적거리는 세실리아를 인간으로 보는 눈빛도, 말투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을 내놓은 건 세실리아가 아니었다.

전혀 침입을 눈치채지 못했는데, 낯선 기척이 갑자기 나타났던 것이다.

귀여운 목소리가 낭랑하게 지하실의 음험한 공기를 울렸다.

“걘 아무것도 몰라.”

지하실의 주인이 경악하여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사랑스러운 금발의 소녀가 서 있었다. 더없이 태연한 태도로.

“아나트리샤 황녀!”

이름을 불린 어린 황녀는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이야, 벨론드 대공비. 아니, 이제는 백작 부인이라고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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