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8/218)

Level 15. 메인 퀘스트 : 재회 (04)

***

세실리아는 반파된 바닥이 당장에라도 무너질까 벌벌 떨면서 최대한 벽 가까이에 붙었다.

지금 그녀는 마력 없는 일반인이라, 하수로에 빠지면 몸을 보호할 어떤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저런 더러운 데 빠지긴 죽기 보다 싫어!’

새삼 자기 자신에게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황족이라는 자존심으로 살다시피 했는데.

그때는 황족의 자격을 잃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막상 마력을 잃고 황족이 아니게 되었어도, 살아 있는 게 낫다 싶었다.

그걸 생각하면 저런 데 빠져서 구르게 되더라도, 아마 자신은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이게 나아진 건지, 아니면 바닥까지 떨어져 닳아 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세실리아가 복잡한 번민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아래쪽에서는 요란한 매타작 소리가 울렸다.

퍽! 퍼버벅!

거기에 온갖 종류의 비명이 하모니처럼 어우러진다.

“컥! 으억! 꿱! 끄억! 사, 살려……!”

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처음에는 안도도 되고, 무엇보다 조금 속이 시원했다.

자신을 학대한 이가 (게다가 어머니조차 아니었다)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다.

아나트리샤에 대한 원한은 잠깐 잊고 응원하게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뻑! 쿵! 콰직!

“으……, 어…, 끄어…….”

매타작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고.

사교도의 비명은 갈수록 작아지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순수한 두려움을 느꼈다.

‘잘못하면…… 내가 저 꼴이 될 수도 있었던 거 아냐?’

놀랍게도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일곱 살이나 어린 사촌 동생이 그녀를 나름대로 봐주고 있었다는 걸.

정말 안 봐줬으면, 지금 저 아래서 구르는 꼴이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모골이 송연했다.

황족이니 귀족이니 하는 자존심 이전에, 인간으로서, 아니, 생명체로서의 두려움이었다.

자신보다 압도적인 강자 앞에서 감출 수 없는 공포.

“…….”

시궁쥐처럼 벽에 붙어 달달 떨고 있는 세실리아의 앞에, 마침내 아나트리샤와 사교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녀는 금빛 마력으로 온몸을 두르고 있어서인지, 오물이나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깨끗한 모습.

반면에 피와 오물에 전 사교도는 이런 생각이 절로 드는 몰골이었다.

‘살아, 있나?’

놀랍게도, 피떡이 되었지만 목숨은 붙어 있었다.

“끄륵…….”

그리고 아나트리샤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얼굴로 보람차게 이마의 땀방울을 훔쳤다.

“후. 아, 개운해!”

“……개, 개운?”

세실리아의 두 눈이 공포로 떨렸다.

“역시 BQ벌레 같은 놈들은 두들겨 패 줘야 제맛이지! 내가 요즘 너무 순하게 살았어!”

“수, 순하게?”

아나트리샤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야, 당근 꼬다리!”

“……아, 네!”

존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워낙 두려움에 졸아붙어 있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존댓말이 튀어나와 있었다.

하지만 이걸 수치스러워할 여유도 없었다.

아나트리샤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존댓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너 아는 거 전부 불어.”

전처럼 말하면 어떻게 해 주겠다는 거래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명령.

하지만, 세실리아는 이에 대해 뭐라고 말을 붙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네, 네! 전부, 전부 말씀 드릴 게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세실리아는 아는 걸 전부 토설했다.

그걸 듣는 동안 아나트리샤의 청보라색 눈동자는 꽤나 위험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

“……그으래. 그렇단 말이지.”

세실리아가 한 말들은 대충 예상 범위 내였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부친의 주변에 언젠가부터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가장 상황이 이상해진 건, 세실리아가 금광을 잃은 뒤, 모친이 아예 다른 사람처럼 바뀐 일이다.’

‘부친은 누군가에게 명령이나 지원을 받는 것으로 보였다. 그게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부친은 가끔 지방으로 돌아다니다 오곤 했는데, 모친은 그걸 부친이 다른 곳에 정부를 두어서라며 투덜거리곤 했다.’

“이, 이게 제가 아는 전부예요.”

당근 꼬다리는 달달 떨며 굳이 필요 없는 정보까지 줄줄 불었다.

나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결국 제대로 아는 건 거의 없다는 거네? 너를 반각성 시켜 준 사람이 네 엄마로 가장하고 있었고, 부친이 연관 있다는 거야 저번에 이미 알려 준 거니까.”

“어, 그러니까…, 그게…….”

당근 꼬다리는 어물거리며 손가락을 꿈질댔다.

자기도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럼 더 아는 사람을 족치면 되겠네!”

“……네?”

나는 마력으로 다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냥 천장을 뚫어 버렸다.

쾅!

통로를 통해 이리저리 올라가자니 귀찮았기 때문이다. 짜증 나지만 버릴 수 없는 짐도 있었고.

“꺄아아악!!! 엄마야!!”

당근 꼬다리의 비명은 좀 아이러니했다.

나는 떡이 되어 늘어진 사교도와 당근 꼬다리를 뒤에 동동 띄우고서, 위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물었다. 휴대용 내비게이션(당근 에디션)에게.

“너네 아빠 방 어디야?”

“제, 제일 위층에서 가장 큰 방이에요! 방향은……!”

지금까지는 내가 방음 결계를 펴고 있었기에 저택 내부에 전혀 소리가 퍼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부턴 아니었다.

그럴 필요도 없다.

벨론드 대공, 아니, 백작, 아니, 애비 실격 놈을 잡아 족칠 거니까!

***

벨론드 대공, 아니, 이제 수치스럽게도 벨론드 백작이라 불리게 된 남자는 깊이 잠들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준비하고 노력해 온 많은 것들이 일순간에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전부 세실리아 그 멍청한 것 때문에!’

이제는 대공 전하라 불릴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는 끔찍한 치욕감을 느꼈다.

‘하다못해 황녀나 황자 둘 중 하나는 제거를 해 줬어야지!’

그랬더라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쪽’에도 훨씬 할 말이 생겼을 텐데 말이다.

‘이대로면 입막음만 당하고 버려질 수도……. 아냐. 아니야! 그렇더라도 그쪽과 황실의 연은 결국 나밖에 없어! 나까지 버리진 못해!’

그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독한 브랜디를 한 잔 마셨다.

그때였다.

꽝!

밤의 고요함을 박살 내는 작고 귀여운 침입자가 나타난 것은.

“이 몸 등장!”

“……화, 황녀?!”

허공에 동동 뜬 일곱 살짜리 조카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게다가 그 뒤에는 퀭한 꼴의 세실리아와 무슨 누더기 덩어리 같은 것이 보였다.

조금 뒤에야 그는 그 덩어리가 아내로 가장하고 있었던 ‘조력자’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지금 감히 내 집에서 무슨 짓인가, 황녀! 나는 황녀의 백부다!”

아나트리샤는 자그마한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복슬복슬한 금빛 머리카락이 사랑스럽게 살랑거렸다.

“아니. 아니지. 이제 너는 황족도 아니니까, 우리 아빠 형도 아니고, 당연히 내 큰아빠도 아니야!”

아이는 기세 좋게 손뼉을 짝짝 치며 외쳤다.

“너 같은 인간이 한때나마 우리 아빠 형이라고 뻐겼다니, 아빠가 불쌍해!”

하스토트 벨론드는 분노했다.

“너, 너, 너! 감히! 감히……!”

하지만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더 심한 말을 하거나, 마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이미 세실리아와의 ‘능력 증명’ 의식 때 봤기 때문이다.

아나트리샤의 힘을.

조력자의 힘으로 마력을 엄청나게 키운 세실리아조차 상대가 되지 못했다.

태양의 마력도 아니고, 일반적인 마력을 평범한 상위급 정도를 갖추고 있을 뿐인 그다.

당연히 아나트리샤에게는 저항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아나트리샤는 픽 웃었다.

“헹. 겁쟁이. 딸 뒤에 숨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간.”

“……!”

하스토트는 눈앞이 새하얘지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는 그 분노를…….

“……아?”

세실리아를 향해 날려 보냈다.

펑!

하스토트가 날린 마력탄은 중간에서 허무하게 무효화 되었다.

세실리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 아버지? 왜, 왜 나를?”

“큭!”

하스토트는 낭패감을 느꼈다.

‘황녀가 세실리아까지 보호하리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어차피 마력을 잃은 세실리아는 그의 공격을 당해 낼 수 없을 테니까.

황녀와 워낙 사이가 나쁘니 당연히 살려 주려 할 리 없다 생각하고, 입막음이라도 하려 한 것이다.

‘젠장! 입막음은 실패인가!’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그는 손목에 검은 보석이 달린 팔찌를 손에 쥐었다. 검은 보석을 빠르게 두드리자, 곧, 검은 마력이 일렁이며 그를 감쌌다.

하스토트 한 명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는 이동 마법구였다.

그러나.

스컥!

어느새 다가온 황녀의 금빛 마력 칼날에 팔찌의 보석이 동강 나 떨어졌다.

“어?”

아나트리샤는 사악하게 웃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리고 아나트리샤는 작은 손을 말아 쥐었다.

아이의 귀여운 주먹이 하스토트의 명치를 짧게 후려쳤다!

앙증맞은 주먹이 낸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뻑!

“커헉!”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리며, 하스토트의 몸이 벽까지 날아갔다.

아나트리샤는 더더욱 환하게 웃었다.

“네가 제일 나빠. 넌 일단 더 맞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