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5. 메인 퀘스트 : 재회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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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비명, 피와 땀이 어우러진 시간이 지나갔다.
누군가엔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지만, 또 누군가에는 짧고 아쉽게 느껴진 시간.
피떡이 된 하스토트의 멱살을 잡고 아나트리샤는 혀를 찼다.
“아쉽지만 이 정도로 할까.”
세실리아는 공포 어린 눈으로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자신의 모친으로 변신한 사교도에게 혹사당한 것보다, 아나트리샤가 사교도와 부친을 패는 모습이 더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멱살을 잡고 흔들며 협박하는 태도가 꽤나 거칠었다.
“자, 아는 거 전부 불어. 더 맞기 싫으면.”
보는 이들마다 얼굴 근육이 흐물거릴 정도로 귀여운 일곱 살짜리 소녀.
하지만 그 기세와 힘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흉흉했다.
하스토트는 진심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그 두려움의 기반에는 조금 전까지 그의 뼈에 새겨진 폭력의 강도가 있었다.
‘죽을 거야! 반드시 죽는다! 아니, 죽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 거야, 틀림없어!’
피와 침이 범벅이 된 입으로, 그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사려, 사려주세여…. 머든… 다 마라게씀미……쿨럭!”
별로 귀엽지 않은 중년남이 혀짤배기소리를 흉내 내는 것일 리는 없었다.
앞니가 절반 가까이 부서져서 발음이 형편없이 새는 것이다.
아나트리샤는 피식 웃었다.
“그래. 애비 실격도 어울리지만, 강냉이가 낫겠네. 당근 꼬다리랑 콩나물 대가리 아빠니까. 모자란 강냉이!”
하스토트는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마씀미다. 제발 목슘마는…….”
“비는 건 됐으니, 빨리 아는 거나 불어. 살고 싶다며.”
소녀의 작은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냉정하고 살기 어린 목소리.
하스토트는 제가 아는 걸 전부 토해 내려 했다.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 윽?”
부정한 기운의 새카만 마력이 순식간에 하스토트의 몸을 집어삼켰다.
“으아악!!!”
비명은 길지 못했다. 순식간에 하스토트가 있던 곳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던 것의 흔적만 남았다.
“꺄아아악!!”
한발 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세실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다.
아나트리샤가 고개를 돌렸을 때.
방구석에 쓰러져 있던 사교도 역시 하스토트와 비슷한 꼴이 되어 있었다.
타의에 의해 어떤 증언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부정한 검은 마력의 흔적을 보며, 아나트리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미리 대비를 해 둔 건가. 자신에게 닿을 만한 정보를 말하려 하면 죽어 버리도록.”
전생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놈들.
아나트리샤는 기절한 세실리아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
촤악!
찬물이 머리 위로 쏟아부어졌을 때, 세실리아는 깨어났다.
“어?”
그리고 의식을 잃기 전 보았던 광경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 졸도할 뻔했다.
인간이었던 자들의 피와 살점의 흔적이 너무 처참했던 것이다.
게다가 저것들은 모두 그녀가 아는 이들이었고, 눈앞에서 저 꼴이 되는 광경을 봐 버렸다.
“욱! 우우욱!”
아나트리샤는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또 기절하면 그냥 버리고 갈 거야. 그리고 토해도.”
세실리아는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눈물 가득한 눈으로 아나트리샤를 올려다보았다.
“너 운이 좋았어.”
무슨 운이 좋았단 말인가.
아나트리샤의 말에 토를 달 용기는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력은 다 잃었고. 고문으로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인데. 게다가 끈끈한 가족애 같은 건 없었다지만 코앞에서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는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반각성 상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었으면, 방금 너도 저렇게 죽었을 테니까.”
“……!”
저 말이 맞다는 걸, 세실리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녀의 마력을 단시간에 열 배 가까이 늘려 준 건 바로 정체 모를 저들이었다.
그들이 입막음을 위해 그녀의 아버지와 자신들의 끄나풀을 죽였다면.
자신 역시 살려 두려 할 리가 없었다.
바들바들 떠는 세실리아를 잠깐 바라보다, 아나트리샤는 빙글 몸을 돌렸다.
“아, 허탕만 쳤네. 나는 이만 돌아갈게. 뒤처리는 네가 알아서 해.”
“아! 나, 나는…… 나는요?”
아나트리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네?”
“내가 네 목숨 살려 줬을 때 이미 우리 거래는 끝났어. 지하실에서 끄집어내 준 건 그냥 덤이었고. 오물통에 안 빠지게 해준 건, 길잡이 시키려고 한 거고.”
“아…….”
아나트리샤는 작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뭐, 마력은 없지만 백작 위랑 남은 재산은 이제 네 거잖아? 알아서 잘살아 봐.”
아나트리샤의 말대로였다.
그녀가 더는 세실리아를 돕거나 살펴 줄 이유가 하등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그동안 아나트리샤과 적대하고, 비난해 왔지 않은가.
설사 반대 상황이었더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아니,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의외라 봐야 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세실리아가 매달릴 수 있는 대상은 눈앞의 작은 아이뿐이었다.
“제가,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무슨 도움?”
세실리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려다 다 포기했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은 아나트리샤를 절대 이길 수 없었다.
황족의 권리니, 재산이니 하는 건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제발 살려 주세요!”
“난 너 안 죽인다니까.”
“하지만 제가 이대로 벨론드 백작이 된다고 해도, 아버지를 죽인 놈들이 결국 저도 죽일 게 뻔하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살려 달라, 뭐든 하겠다, 이 소리였다.
“전 살고 싶어요! 미끼든 뭐든 좋으니까, 시켜만 주세요. 전부 다 할게요!”
세실리아는 두 손을 비비며 빌었다.
아나트리샤는 ‘흠.’하고 고개를 모로 꼬았다.
“너 내 생각보다 머리가 덜 나쁘네? 본인 목숨이랑 연관된 일이라 그런가.”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세실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나트리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다음 날.
황족의 지위에서 격하된 충격으로, 벨론드 백작 부부가 저택 가장 높은 곳에서 몸을 던졌다는 소식이 널리 퍼졌다.
그리고 백작 영애 세실리아가 작위와 남은 재산을 잇게 되었다는 소식 역시.
***
루스템 서쪽의 광활한 평야 지대.
이곳은 제국의 세 개국 공신 가문 중에서도 제일가는 위세를 자랑하던 가문의 근거지였다.
한때 황가의 방패라 불리던 가문.
방패의 그랑디오르.
현 그랑디오르 공작 크레디온은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여름이라 날이 더워 벽난로는 막혀 있어야 정상이건만, 그랑디오르의 벽난로는 기이했다.
연료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데 맹렬히 타오르는 검은 불꽃은 분명히 이상했고.
무엇보다 이렇게 강한 불꽃에서 한 줌의 열기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더욱 그러했다.
오히려 보는 이를 두렵게 하는 공포심과 이가 딱딱 부딪치게 만드는 냉기를 느끼게 하는 불꽃이었다.
그랑디오르 공작은 나직이 한탄했다.
“하스토트는 실패한 모양이군.”
그런 반푼이 따위에게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태양의 마력을 타고났다 해도, 반푼이 하스토트의 자식들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예상을 벗어난 것이 있었다.
‘하스토트와 사제 중 하나에게 심어 둔 주술이 발동했다는 건, 누군가가 우리의 실체에 접근을 했다는 소리인데.’
게다가 한 가지 더.
‘왜 하스토트의 딸이 살아남은 거지?’
이미 ‘능력 증명’을 시도할 정도로 반각성이 심화된 상태라면, 절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연히 하스토트와 함께 핏물이 되어 죽었어야 맞는데.
“……왜 살아 있는 거지?”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어찌 되었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겠지만.”
약 6년 전.
그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각’한 순간부터 내내 준비해 온 일이었다.
아쉬운 건, 시간과 그의 능력이 너무도 부족했다는 것.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남은 건 희미한 사명에 대한 의식뿐. 그것만으로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으나, 한계가 명확했다.
“언제…… 돌아오시는 겁니까.”
그의 한탄을 들어줄 주군은 지금 여기 없었다.
이미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는 끝났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주인이 되돌아오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
그는 설렁줄을 잡아당겨 딸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오랜 침묵을 깨고 그랑디오르 소공작 부부와 그 아들이 황도 르펜시아를 향해 출발했다.
명목상의 이유는 간단했다.
아나트리샤 황녀의 일곱 살 생일이 한 달여 남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제국 황족은 명명식 이후로 일곱 살 생일을 중요시 여겼다.
그때까지 마력을 각성하여 황족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냐 아니냐가 평생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명명식과 성인식 다음으로 화려하게 치러지는 것이 바로, 황족의 일곱 살 생일이었다.
이번에 황녀의 생일 파티는 유달리 화려하게 치러질 예정이라고 벌써부터 소문이 자자했다.
***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황가의 두 남자는 아주 들떠 있었다.
“좋아. 역시 금을 바른 탑을 세우는 것이……!”
“그것도 좋지만, 태양석보다 큰 리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는 거예요! 금과 은, 보석을 갈아 만든 물감으로 그리게 하면……!”
“좋은 의견이구나, 루퍼스!”
큰 명분을 잡아 마구 폭주하려는 두 남자의 고삐를, 아나트리샤는 단단하게 죄었다.
“무슨 말이에요! 어차피 오빠 일곱 살 생일도 그렇게 화려하게는 안 했으면서!”
그러자 루퍼스리안의 새파란 눈이 감동으로 촉촉이 젖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