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5. 메인 퀘스트 : 재회 (07)
그렇다고 해서 아멘다와 세실리아의 사이가 좋아진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아멘다는 치를 떨면서 세실리아를 노려보고 있었고.
‘뻔뻔하기도 해라!’
세실리아 역시 아멘다에게는 여전히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황녀님 권위로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굴다니. 게다가 아까 와인, 일부러 옷 다 망치게 쏟은 게 틀림없어. 그럴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이들은 자기감정을 드러내놓고 싸우지는 못했다.
가장 먼저 지켜야 하는 명령이 있었으니까.
세실리아는 와인에 젖은 드레스를 대충 닦으며 말했다.
“아직까진 나에게 따로 접근하는 사람이 없어요. 황녀님 명령대로 사교 모임에 최대한 많이 참석하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
“그리고 따로 목숨을 노리는 시도도 없었어요. 저택에서도 밖에서도.”
아멘다는 차갑게 말하고 먼저 휴게실 문으로 다가갔다.
“알겠어요. 앞으로도 최대한 황녀님의 명령을 완벽히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해요.”
“굳이 지적해 줄 필요 없어요. 그거 주제넘는 거 알아요?”
원래 성질을 참지 못하고 세실리아가 한마디를 쏘아붙이자, 아멘다는 피식 웃었다.
“내가 주제넘어 봤자, 황녀님께 아주 무례했던 누구보다야 더하겠어요?”
“……!”
세실리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정신을 좀 차린 지금은 확실하게 알았다.
자신이 얼마나 주제넘고 또 망나니처럼 겁 없이 굴었는지.
또한 황녀에게 더 가까운 쪽은 아멘다라는 것도.
세실리아가 입을 다물자, 아멘다는 더 시비를 걸지 않고 문을 나섰다.
어차피 지금 아멘다와 세실리아의 접촉은 외부에 보여주기식이 강했다.
세실리아는 황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랑 당근 꼬다리 네가 여전히 아주 아주 사이가 나쁘다는 걸 잘 보여 줘야 해. 절대 손잡았다거나 내가 널 보호해 줄 거라고 아무도 상상 못 하도록.”
“……그래야 아버지의 뒤에 있던 자들이 저에게 접근할 테니까요?”
“그래. 널 이용하려고 하든 아니면 입을 막으려고 하든.”
세실리아는 새삼 등골이 오싹해졌다.
스스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겐 이용 가치가 이제 거의 없어.’
마력도 전부 잃은 하찮은 존재가 되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버지의 뒤에서 조종하던 자들은, 자신을 이용하기보단 죽이려 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나트리샤의 말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꽤 위험할 거야.”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 거라는 두려움으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이건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는 내 목숨을 아무도 장담 못 할 거야. 설사,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제대로 사는 게 아니겠지.’
희망이 있다면 하나뿐이었다.
아나트리샤 황녀의 손을 잡는 것.
세실리아는 더러워진 드레스와 헝클어진 머리로,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주변의 멸시와 험담은 분명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반각성으로 인한 고통이나, 사교도에게 고문당할 때와 비교하면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
황궁 안은 내 생일 파티 준비로 아주 분주했다.
시작부터 규모가 내 예상외였다.
“그레이트 홀의 인테리어를 전부 바꿔라!”
참고로 그레이트 홀은 황제의 대관식과 결혼식, 공식적인 알현과 접견이 열리는 가장 큰 홀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중요한 파티라도 황녀 개인의 행사는 보통 여기서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전례는 아빠에겐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큰 애기 일곱 살 생일 파티도 같이하는 거니까, 그레이트 홀 정도는 써야지!”
아빠는 마구 폭주하고 계셨고.
너무 기뻐 보여서 막기 힘들었다.
게다가, 저 말을 듣는 ‘큰 애기’도 꽤 기뻐 보여서, 더 말리기 그랬다.
‘아닌 척해도 아빠가 자기 챙겨 주는 거 좋으면서.’
결국 나는 아빠와 오빠의 폭주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포기한 것에 가까웠다.
덕분에 황궁은 엄청난 격변을 겪고 있었다.
그레이트 홀이 뼈대만 놔두고 아예 다 뜯어서 새로 단장되었고.
외궁 파티가 열릴 정원 역시 싹 새로 정리되었다.
대륙 동서남북 곳곳의 진귀한 꽃과 나무들이 날라져 와 정원을 장식했다.
각기 서식하는 기후가 제각각이라, 환경을 유지시키기 위해 엄청난 양의 마력석과 마도구들이 곳곳에 세워졌다.
이쯤 되자, 나는 조금 질리기 시작했다.
‘이건, 좀, 과하지 않나……?’
못 참고 태클을 걸려고 시도를 해 보았다.
“이건 너무 심한 거 같은데요? 너무 사치스럽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요?”
원래 황족의 사치는 망국의 지름길 아닌가.
전생에 배운 역사에도 백성들의 곤궁을 무시하고 사치 부리다가 망한 왕족들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아빠의 대답은 간단했다.
“걱정 말렴, 아가. 아빠가 6년 동안 안 쓴 내탕금의 일부만 쓴 거란다.”
“…….”
알고 봤더니, 아빠가 실의에 빠져 일하는 기계처럼 보낸 1년간.
거기에, 그 이후 우리 가족만의 꽁냥꽁냥 위주로 보낸 기간 동안.
황가의 살림에 배정되는 엄청난 황실 예산이 안 쓰이고 그냥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는 이걸 내 생일 파티 한방에 다 쏟아붓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자, 옆에서 시종장이 흐뭇하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황녀님. 이번 일로 제국 내 경기 부양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기뻐하는 여론이 대부분입니다.”
“…….”
그래. 부자들이 돈을 써야 돈이 좀 돌긴……하지.
황가는 대륙 제일의 부자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폭주 중인 건, 아빠만이 아니었다.
오빠도 난리였다.
“리샤, 리샤! 이리 와 봐!”
“왜, 또, 뭔데.”
나는 정신적으로 살짝 허름해진 상태로 오빠 궁에 불려 갔다.
그리고 그곳은 무시무시한 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다, 뭐야?”
황자궁은 이제 황자궁이라기보단…….
“왜 오빠 궁이 의상실이 된 거야?”
황자궁 입구부터 안쪽까지 쭉 토르소나 진열대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는 하나하나 오빠가 쓸 수 없는 물건들만 걸려 있었다.
일곱 살짜리 여자애들이 입을 법한 드레스, 원피스, 구두, 모자, 액세서리 등등등.
오빠는 방긋 웃었다.
“이게 내가 원하는 생일 선물이야!”
“……생일 선물은 오빠가 쓸 거로 골라!”
하지만 오빠는 요지부동이었다.
“리샤가 내 선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입고, 생일 파티에 내 에스코트를 받고 나가는 게, 내가 원하는 선물인걸.”
“…….”
오빠는 간절한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일곱 살 생일에는 아닌 척했지만, 많이 외로웠어. 그때 리샤는 아직 침대에서 잘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고…….”
큭! 치사하다!
이러면 뭐라고 할 수가 없잖아!
결국 나는 다섯 시간 동안 오빠가 사들인 물건들을 이리저리 걸쳐 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녹초가 되어 버렸다.
‘히, 힘들어!’
솔직히 당근 꼬다리랑 ‘능력 증명’으로 싸우는 것보다 이게 몇 배는 더 힘들었다.
그리고 이날, 오빠의 선물인지 내 선물인지 모를 퍼레이드는 누군가의 등장으로 정점을 찍었다.
아멘다가 웃는 얼굴로 ‘누군가’를 데리고 왔던 것이다.
“황자 전하. 지난번에는 사정이 생겨서 늦어졌지만, 명대로 데려왔습니다.”
“알라나 몰리아스라 합니다.”
깐깐한 얼굴을 한 중년 부인의 얼굴은 처음 보지만, 꽤 익숙한 사람의 것이었다. 아우라 역시.
‘어? 저 사람 분명히……?’
[이름 : 알라나 몰리아스(김안주)]
김안주.
전생에 내가 아주 학을 뗐던 사람이다.
‘저 사람이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 건데?!’
전생에 김안주는 지구에서도 엄청나게 유명했던 디자이너이자, 헌터였다.
원래도 유명한 디자이너였는데, 헌터로 각성하면서 희귀한 직업을 얻었기 때문이다.
‘패션 헌터……, 였지, 아마?’
이 이상한 이름의 직업은 아주 희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이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결과물일수록, 엄청난 성능을 가진 방어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만 보면 열음 언니 못지않게 대단한 사람이니, 껄끄럽게 여길 이유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발이 알아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슥, 김안주, 아니, 이번 생에는 알라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위험하게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이렇게 가까이서 뵈니 더더욱 잘 알겠습니다! 저는 황녀님을 위해 태어난 게 틀림없어요!”
그녀의 전신 마력 회로가 강렬하게 마력을 내뿜기 시작했다. 내 마력에 공명하면서.
‘벌써 각성한 상태인 거야?’
전생에 평범한 디자이너였던 그녀는 우연히 내 전투 장면을 보고 각성했다고 했다.
생산계 헌터로서.
그리고 유명한 내 스토커가 되었다. 어떻게든 내 옆에 있으려고, 더 나아가 내 몸에 달라붙으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안서나 헌터! 아아, 역시 최고예요. 당신의 마력만 한 것이 없어요! 너무나도 빛나고, 강렬하고, 진하고, 아름다워!”
그녀는 내 마력을 가까이서 느낄수록, 접촉할수록,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건 그대로였다.
덥석!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