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5. 메인 퀘스트 : 재회 (08)
천이나 가위, 자 등, 재봉사에게 필요한 어떤 재료도 필요 없었다.
부담스럽게 빛나는 눈과, 왠지 모르겠지만 “하악하악.” 하면서 거칠게 내뿜는 숨.
그리고 요동치는 마력.
정말이지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사람.
‘어떻게 이건 환생해도 똑같냐!’
그녀는 마력만으로 순식간에 나에게 꼭 맞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어 냈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드레스 완제품이 뚝딱 만들어지는 건, 다시 봐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세, 세상에!”
“마력으로 드레스를 만들 수 있다니! 처음 들어 봐요!”
아멘다나 다른 시녀들만이 아니라, 오빠도 엄청나게 놀랐다.
“설마 이럴 줄은…….”
그리고 다음 순간.
오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리샤한테서 손 떼!”
오빠의 견제는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았던 것이다.
탁!
떨려 나간 알라나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두 손으로 나를 위한 드레스를 들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알라나 몰리아스가 황녀님을 뵙습니다. 일전에 베풀어 주신 은혜에 부족하게나마 보답하고자 왔사오니, 부디 이 진상품을 받아 주세요.”
그녀는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은혜? 무슨 은혜?’
***
알고 봤더니, 오빠와 아멘다의 합작으로 알라나의 황녀궁 방문은 벌써 약속된 거였다고 했다.
당근 꼬다리가 황도 한가운데서 폭주했을 때 거리를 다 태우기 직전이긴 했는데.
‘그때 내가 구해 준 사람들 중에 알라나의 직원들이 많았을 줄은…….’
아멘다가 나에게 받은 도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알라나는 아멘다의 청을 거절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래서 당근 꼬다리 때 대충 만들어 뒀던 샘플을 손봐서 내준 것과 달리.
직접 황궁에 들어와 나의 일곱 살 생일 파티용 드레스를 지어줄 예정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당근 꼬다리가 더욱 폭발해서 가게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재난도 이런 재난이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조차 전화위복이었던 거죠! 황녀님을 먼발치에서나마 뵐 수 있었으니!”
내가 당근 꼬다리의 난장을 막았던 그때.
알라나는 가게엔 있지 않았지만,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한다.
집이 근처였다나.
아슬아슬하게 집까지 날아가는 건 면했다고.
덕분에 그때 나와 당근 꼬다리가 드잡이질하는 걸 직접 봤다고 했다.
나의 마력을 가까이서 느낀 그녀는, 그만 그대로…….
“황녀님의 황홀한 마력을 느끼고, 그대로 각성해 버리고 말았어요!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어요!”
알라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변태같이 보일 정도였다.
그나마 여자라서 다행이지, 만약 알라나가 남자였으면, 아빠랑 오빠가 내 옆에 오지도 못하게 했을지도.
‘나도…… 더 꺼려졌을 거야…….’
알라나가 콧김을 풍풍 뿜는 모습은 더더욱 내 거부감을 강하게 만들었다.
으.
부담스러워.
“부디, 부디 이 드레스를 입어 주세요! 이것은 황녀님께 어울리는 최고의 옷이 될 거예요!”
오빠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알라나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가 바친 옷에는 한 톨의 흠도 잡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드레스 자체가 리샤의 마력 패턴에 맞추어진 마력 구조를 가지고 있어. 이걸 입으면 리샤의 마력을 강화하고, 회복을 도울 수 있겠군.”
그렇다.
나 역시 그걸 확인 중이었다. 시스템 정보 창이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저게 얼마나 엄청난 물건인지.
[아이템 명: ‘천사의 날개옷’(S급)]
[효과 : 마력 운용 효율 20% 증가. 회복력 30% 증가.]
[*귀속 아이템. 한번 귀속되면 타인은 사용하지 못합니다.]
[*귀속 : 아나트리샤 루스템]
옷 이름 누가 지은 거야, 대체.
하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 놀라고 있었다.
퀘스트 보상으로 받았던 아이템 외에, 시스템이 아이템으로 분류해 준 건 이게 처음이다.
그것도 S급.
‘이런 물건은 전생의 김안주도 몇 개 못 만들었는데?’
마왕 소환 직전에 겨우 한두 개를 만들었을 뿐이다.
물론 그 전에 만들었던 아이템도 좋은 것들이었지만, 이 수준에는 못 미쳤다.
그런데 이번엔 각성하자마자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당연히 드레스를 받았다.
그리고 친절하게 웃는 얼굴로 물었다.
“알라나.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어?”
“무엇이든 하명만 해 주세요! 따르겠습니다!”
알라나의 대답 끝에는 여전히 “하악!”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여전히 엄청나게 부담스럽지만.
‘S급 방어구 셔틀을 놓칠 순 없지!’
“내 전속 재봉사가 되어 주지 않겠어?”
“……여, 영광입니다!”
알라나는 내 발등에 키스라도 할 기세였다.
그리고 오빠가 조금 삐지려고 하는 티를 냈기에, 나는 알라나에게 한 가지 당부를 더 했다.
“그리고 우리 오빠를 위한 옷도 만들어 주지 않을래? 오빠한테 선물해 주고 싶어!”
오빠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
세실리아는 놀랍게도 황녀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일부러 더 후줄근하고 얕잡아 보일 만한 차림새로 곳곳을 돌아다녔다.
어떻게든 귀족 신분만은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이도록 애쓰면서.
그것이 거의 한 달 가까이 되자, 조금 초조해졌다.
‘이제 슬슬 미끼를 물때도 되지 않았나? 이대로 쓸모를 증명 못 하면, 황녀님이 날 내칠지도 몰라…….’
솔직히 언제 내쳐져도 할 말이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촥!
차가운 칵테일이 세실리아의 드레스에 뿌려졌다.
가해자는 세실리아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움직임을 좀 조심하지 그러셨어요, 벨론드 영애?”
차가운 눈을 한 소녀는, 언젠가 세실리아가 비슷하게 모욕을 준 영애였다.
옷이 불타고 칵테일을 뒤집어썼던.
세실리아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땐 내 앞에서 고개도 못 들었던 주제에!’
그녀는 엄청나게 참아 왔다.
황녀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찮기 짝이 없던 것이 똑같이 모욕을 돌려주자, 이성이 뚝 끊겼다.
“이 무례한 것이……!”
“꺅! 이거 놔요!”
덥석!
세실리아는 칵테일을 부은 소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곧 파티는 난장판으로 변했다.
“흑…….”
세실리아는 정원 구석에서 넝마가 된 꼴로 훌쩍거렸다.
너무 슬프고 분하고, 또 억울했다.
싸움까지 벌이자, 주변의 시선은 세실리아에게 더욱 차가워진 걸 넘어서.
“이만 돌아가 주세요, 벨론드 영애.”
파티 주최자에게 쫓겨나기에 이른 것이다.
덕분에 지금 세실리아는 정원 구석에 쪼그려 앉아 궁상을 떨고 있었다.
‘앞으로 어떡하지? 이제 초대장도 안 오면, 황녀님 명령을 따르기가…….’
눈앞이 깜깜했다.
그렇게 넝마처럼 구겨져 있는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고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다.
“저런. 도움이 필요해 보이시는 군요, 영애.”
“……예?”
세실리아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그녀와 비슷한 나이 대로 보이는 잘생긴 소년이 서 있었다.
짧게 자른 갈색 머리카락과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선해 보이는 미소년.
아직 10대 중반임에도 키가 성인 남성 못지않게 컸고, 망토 아래로도 엄청난 근육이 엿보였다.
아마도 성인이 되면 꽤 거구에 근육질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얼굴은 꽤나 섬세하고 미려해서 좀 언밸런스한 느낌을 주었다.
세실리아는 소년의 이름을 알았다.
“……그랑디오르 공자?”
그렇다.
소년은 오늘 파티에서 가장 주목받은 손님 중 한 명이었다.
세 개국 공신 가문 중 하나인, ‘방패의 그랑디오르’의 적통 후계자.
그랑디오르 소공작의 장남이자, 현 공작의 손자였던 것이다.
그는 눈웃음치며 손을 내밀었다.
“자아, 울지 마시고 일어나세요. 귀여운 영애.”
세실리아는 자신의 꼴도 잊고, 붉어진 얼굴로 그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한 채로.
“감사합…, 헉! 공자의 옷이 더러워졌어요. 어, 어떡하지.”
“……괜찮습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도리어 세실리아를 위로했다.
“저는 황도 사교계는 잘 모르지만, 오늘 영애가 당하신 일은 분명히 너무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세실리아도 알았다.
오늘 그녀가 벌인 짓은 누구든 눈살을 찌푸려 마땅하다는 걸.
게다가 정말 편을 들어줄 거면, 무도회장에서, 그 상황에 했어야 했다.
지금처럼 비밀리에 손을 내밀 게 아니라.
소년의 달콤한 미소와 듣기 좋은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세실리아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랑, 디오르.’
이전의 세실리아였다면, 그냥 넘어가 버렸을 것이다.
이 소년이 자신의 미모에 반해서 호의를 보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나락까지 떨어진 데다 황녀의 명을 이행하는 데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의심하는 중인 지금은 불가능했다.
물론, 이를 겉으로 드러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그랑디오르 공자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오르면서도 긴장을 잃지 않았다.
“그럼 조심해서 가십시오. 그리고, 뺨에 상처가 났군요.”
그랑디오르 공자는 깨끗한 손수건으로 세실리아의 뺨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그 손수건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 마차를 보냈다.
마차가 저택을 떠나는 순간, 세실리아는 비로소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빨리 가서……, 황녀님께 알려야 해…….’
때문에, 세실리아는 손에 쥔 손수건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이기 시작했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히히잉!
“우아악! 뭐야! 갑자기!”
마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미쳐 날뛰기 시작한 말은, 인근의 번화가 벽으로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콰광!
마치 폭탄이 터진 듯한 굉음.
끔찍한 마차 사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