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5. 메인 퀘스트 : 재회 (11)
가르텐 소공작의 겉과 속이 다른 말과 시스템 메시지는 쭉 이어졌다.
“황녀님께서 무얼 바라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가르텐으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코넬 가르텐 : ‘저울의 가르텐답게, 늘 공정을 지켜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코넬 가르텐 : ‘이분 앞에서는 지키기가 힘들 것 같아.’]
[코넬 가르텐 : ‘조금만 방심하면, 간도 쓸개도 다 내드려 버릴지도. 안 돼.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 두 분께서 의가 좋으신 듯하니,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다른 황위 계승권자께서 계셨다면, 이런 초대는 맹약을 깨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니…….”
[코넬 가르텐 : ‘아아. 이렇게 험한 말을 해야 하다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구나. 한눈에도 마음이 여린 분 같은데.’]
겉은 재수 없는 애늙은이처럼 장황하게 말하고 있고.
표정 역시 얼음이 차갑다고 달달 떨 정도로 냉랭했다.
완벽한 포커페이스!
그런데, 속은…….
‘이런 걸, 겉바속촉이라고 하나?’
나는 뜨뜻미지근한 표정으로 겉과 속이 반대로 구는 꼬맹이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시스템이 알려 준 저 녀석의 호감도는…….
[호감도 : 코넬 → 아나트리샤 = ♥♥♥♥♥♥♥♥♥♥]
그리고 놀랍게도, 실시간으로 하트 개수가 꾸물꾸물 늘어나고 있었다.
조금 쳐다봤더니 하트가 하나 더 늘었다.
‘솔직하지 못한데 아주 쉬운 꼬마구나.’
그냥 속이 다 보여 버리니 어이없고, 하찮고, 귀엽기만 했다.
그런 내 표정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 옆에서 오빠가 견제를 하기 시작했다.
“가르텐 소공작은 내 동생에게 아주 유감이 많아 보이는군? 혹시 나에게 아첨하려고 하는 건가? 공정의 저울이라 불리는 가르텐 가문의 후계자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러자 겉바속촉 꼬맹이는 발끈했다.
“저는 황자 전하께 아첨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히…… 황녀 전하께도 그렇지요.”
[코넬 가르텐 : ‘황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이니, 내 속내가 들키진 않았겠지.’]
아니, 투명하게 다 들켰어.
그것참 겉과 속이 일관되게 다른 녀석이네.
얘도 참 재밌고 웃기고, 이 녀석의 호감은 나에게 여러모로 유리할 테지만.
당장 중요한 건 얘가 아니었다.
‘그랑디오르 쪽이지.’
그래서 나는 가르텐의 꼬맹이가 한 말에서 꼬투리를 잡아, 미끼를 던졌다.
“리샤는…… 그런 어려운 건 잘 모르겠어. 그냥 친구가 갖고 싶었어!”
“친구, 말입니까?”
[코넬 가르텐 : ‘그냥 순수한 친구……부터 시작하면, 괜찮지 않을까?’]
왜 겉바속촉 꼬맹이 네가 동공 지진 하는 건데? 그리고 뭘 시작해?
태클 걸고 싶은 걸 참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응! 얼마 전에 슬픈 일이 있었거든. 새로운 친구와 같이 놀면 슬픔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이번에도 눈치 없게 가르텐의 꼬맹이가 끼어들었다.
“……대공녀, 아니, 벨론드 영애의 사고 소식은 저도 들었습니다. 황녀 전하와 ‘능력 증명’을 치렀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사이가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싸우다 보니까 친구가 되었어!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야지 하고 있었는데…….”
사실이다.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 친구라기보단 내 부하가 된 거지만, 뭐, 비슷한 거니까.
나는 일부러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걱정을 시스템 메시지로 마구 띄우고 있는 가르텐 소공작이 아니라.
라이언 그랑디오르에게 집중했다.
‘자, 어서 반응해! 하라구!’
반가운 소리가 울렸다.
띠롱띠롱!
[라이언 그랑디오르 : ‘그러고 보니까, 그 바보 같았던 주황색 머리 여자애가 벨론드 영애였지? 황녀랑 친했던 건가? 의외인데.’]
역시 바로 앞에서 그 사람에 대해 언급을 하면, 당연히 관련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얼마 전 직접 만났던 사람이면.
자, 어서 다 토해 내라구!
“갑자기 마차 사고가 났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훌쩍.”
억지 눈물까지 조금 짜 줬다.
[라이언 그랑디오르 : ‘그러고 보니 그날 내가 배웅해 주고 나서 돌아가는 길에 사고가 났다고 했지. 찝찝하게…….’]
[라이언 그랑디오르 : ‘그런데, 그날 왜 어머니가 그런 명령을 내리신 걸까.’]
[라이언 그랑디오르 : ‘황위 계승권도 잃은 몰락한 황족 따위에게 왜 접근하라는 건지.’]
‘이거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라이언, 즉, 하무현 본인은 사교도와 직접 연관은 없는 듯했다.
물론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랑디오르가 사교도와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으니까.
라이언 역시 모친의 명령으로 세실리아에게 접근한 듯하고.
‘제일 긍정적인 경우라면, 라이언 본인은 사교도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저 어머니의 명만 따랐을 뿐이라는 거겠지.’
그러면 그냥 내가 아는 하무현의 환생으로 대하면 그만이다.
전생에 연이 있던 사람들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이건 너무 좋게만 해석한 걸 수도 있었다.
‘최악이라면 라이언도 사교도인 거겠지. 시스템 창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고위급의.’
이 경우엔 전생 때부터 내가 속은 걸 수도 있었다.
‘음. 하지만 <궁예> 스킬 부가 효과는 라이언한테는 전혀 오류를 안 냈어.’
그걸 생각하면 지금으로서는 긍정적인 해석 쪽에 좀 더 무게를 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경계를 풀면 안 되겠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사교도와 연관된 일이니 신중해야지.
‘어쨌든 그랑디오르 쪽을 더 파 보면 되겠다는 걸 알아냈으니 좋아, 힘내자!’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조금 이상한 걸 깨달았다.
옆자리가 허전하고, 오디오가 많이 비었다.
‘그러고 보니까 오빠는 왜 갑자기 나간 거야?’
요즘 생일 파티 준비를 시작하면서, 무슨 핑계를 대서든 내 옆에 붙어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오빠에 대한 내 생각은 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잠깐 안 보였던 셀리나가 갑자기 나타나, 나에게 말을 걸어 왔기 때문이다.
“황녀님. 황자님은 어디 계신가요?”
“응? 모르겠는데? 갑자기 볼일이 생겼다고 다녀온다고 하고 갔어.”
“……우리 황녀님. 저랑 잠시만 어디 가시지 않을래요?”
“응?”
셀리나는 처음 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거기 서. 너희 둘.”
루퍼스리안은 동생이 봤다면 삥 뜯는 양아치 같다고 생각했을 말투로 시비를 걸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 아나트리샤의 초대를 받는 영광을 얻었던 두 소년에게 말이다.
코넬 가르텐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무슨 일로 부르시는지요, 황자 전하?”
지금의 그는 겉도 속도 똑같은 공정한 가르텐 그 자체였다.
소년이 겉과 속의 동질성을 잃는 건, 충격적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황녀 앞에서뿐이니까.
“경고하려고. 착각하지 말라고.”
“착각? 무슨 착각 말입니까?”
라이언 그랑디오르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에 대한 루퍼스리안의 대답은 더없이 퉁명스러웠다.
“리샤는 너무 착하고 마음이 여린 아이라 너희들에게 아주 작은 은혜를 베풀어 준 것뿐이야.”
“그래서요? 무슨 착각을 하지 말란 말씀이십니까?”
“리샤가 너희에게 조금이라도 호감이 있다거나 하는 게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라고!”
루퍼스리안은 진지했다.
그리고, 라이언 그랑디오르는 전생에도 현생에도, 루퍼스리안의 천적이었다.
“음? 황녀님께서 직접 저희에게 친구가 되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호감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그냥 친구로서의 호감을 말하는 게 아니야! 괜한 흑심을 품지 말라는 거다!”
“……?”
여전히 라이언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고.
코넬은 흠칫했다.
‘아, 아냐. 나는 흑심 같은 게 아니라……, 황녀님의 순수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감탄한 것뿐…….’
루퍼스리안은 매의 눈으로 코넬의 동요를 눈치챘다.
그러나 그가 자신보다 네 살이나 어린 소년을 닦달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천적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하!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뭐?”
“이런 걸 시스터 콤플렉스라고 하는 거군요!”
“아니거든!!!”
아직 두 사람은 모르지만, 전생에 수도 없이 반복된 광경이 다시 한 번 펼쳐지고 있었다.
***
갑작스러운 셀리나의 부탁을 따라 함께 향한 곳은, 황녀궁과 이어진 북쪽 정원이었다.
아빠가 내 생일을 맞아 거의 새로 짓다시피 하면서, 각 정원은 아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동서남북으로 구획을 나누어, 각 구역마다 대륙의 네 방향에서 자라는 특이한 식물과 환경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중 북쪽 정원은 당연히 대륙 북쪽에서 가져온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기이한 침엽수들과.
겨울에만 눈 같은 꽃이 핀다는 새하얀 나무도 있었다.
꽃이 꼭 팝콘 같아서, 팝콘 나무라고 별명을 지어 준 나무였다.
‘저건 하스티아에서 가져왔다고 했었지.’
겨울이나 추운 날씨에서 잘 자라는 식물들이 많다 보니, 주변의 공기를 시원하게 유지해 주는 마도구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마력석을 통째로 깎아 마법 술식을 새긴 것이라 주변의 공기를 차갑게 하는 것도 모자라.
공기 중의 수분을 얼려 자잘한 눈 결정을 만들어 뿌리고 있었다.
게다가 몸체 자체가 얼음처럼 빛나는 마력석이라, 그 자체가 예쁜 장식 역할도 했다.
이것들 덕분에 주변의 공기가 꽤나 싸늘해졌지만, 나와 셀리나는 괜찮았다.
루스템 황족의 마력은 기본적으로 불꽃과 빛 속성.
당연히 내 마력으로 나와 셀리나의 몸을 따뜻하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셀리나,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도착하시면 알게 되실 거예요.”
셀리나의 기색은 조금 많이 이상했다.
어딘지 모르게 아련하고 슬퍼 보이기도 했지만.
또 기쁘고 벅차 보이기도 했다.
사실 무슨 생각인 건지 알아보는 건 간단했다.
<궁예> 스킬을 쓰면 되니까.
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믿는 가족들이나 주변 시녀들에게는 요즘 잘 안 쓰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적이나 타인에게서 정보를 뽑아내야 할 때에만 집중적으로 쓰려고 마음먹었었다.
그래서 그냥 얌전히 셀리나를 따라 걷기만 했다.
셀리나의 손을 잡고 쫑쫑 걸어서 도착한, 북쪽 정원 끝에는.
하얀색의 가제보가 서 있었고.
그리고 그곳에, 흰 인영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어?”
너무나도 익숙하고 그리운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은색 단발이 마력석의 푸른 빛 아래에서 시리게 빛났다.
아래로 숙이고 있던 고개가 천천히 위로 들리자, 숨겨져 있던 청보라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리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알고 있는 얼굴이다.
모를 수가 없었다.
설사 몇 번 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생이라면 이질적이라고 생각했을 은발과 청보라색도, 지금은 낯설지 않았다.
오빠와 똑같은 시린 은발이었고.
매일 거울에서 보는 눈동자 색과 똑같은 빛깔이었으니까.
나는 숨 쉬는 법을 겨우 배운, 갓난아기가 된 것처럼 겨우 말을 토해 냈다.
“어, 엄마?”
내 부름에 대답하듯, 엄마가 두 팔을 뻗으며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