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6. 메인 퀘스트 : 진실 (03)
아빠의 입이 열렸다. 고해하듯 아빠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실 그때 나는…….”
그와 동시에 금이 간 거울에 아빠의 파란 눈이 비쳤다.
그 순간.
거울에서 엄청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
갑자기 바닥이 쑥 꺼지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던 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당황했다.
‘여기가 어디야?’
처음 보는 장소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각이며 주변이며 온통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시야가 묘하게 빛바랜 느낌.
‘이거 드라마나 영화에서 뭔가 회상할 때의 효과 같은데?’
내 깨달음 때문인지, 필름이 돌아가는 듯한 ‘차르르-’ 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내 앞에, 익숙한 사람이 나타났다.
‘아빠!’
지금보다 더 젊은 시절의 아빠다.
아빠는 호위나 시종도 없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아빠를 부르다가 가까이 다가가 만져 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고, 아빠가 만져지지도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과거의 기억 속이구나!’
아이템 ‘진실의 거울’이 보여 주는 아빠의 기억 속. 실제 일어났던 과거의 한 장면.
그러니 내가 말을 걸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게 당연했다.
아빠가 달려가는 곳은, 내가 잘 아는 익숙한 곳이었다.
‘황후궁!’
본궁은 변화가 있어서 좀 낯설게 느껴졌는데, 황후궁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엄마가 떠난 이후, 황후궁은 거의 변화 없이 그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누구의 의지인지는 분명했다.
아빠가 달려간 곳은, 당연히 엄마가 있는 곳이었다.
지금과 달리 긴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엄마가 아빠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황후궁에 남아 있는 초상화와 꼭 닮은 엄마의 모습.
“이즈!”
“카티.”
엄마와 아빠는 서로의 애칭을 부르며, 끌어안았다.
태도와 목소리, 눈빛 모두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한 쌍의 잉꼬처럼 다정한 모습.
내가 기억하는 전생의 부모님과 똑같았다.
“정무는 어쩌고 직접 달려온 거야? 이따가 저녁에 얼굴 봐도 될 텐데.”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그냥 있어. 당연히 당신을 보러 와야지. 몸은 좀 어때?”
“응. 이번엔 더 가뿐해. 입덧도 거의 없고.”
두 사람의 대화로 나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어느 시점인지.
엄마가 나를 임신한 사실을 처음 안 날.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아빠는 한달음에 엄마의 곁으로 달려온 것이다.
아직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은, 평온하고 행복하던 우리 가족의 한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나 역시도 엄마 배 속에서 함께하고 있었던 시간.
옆에서 작은 칭얼거림이 들렸다.
“히잉.”
“아, 루퍼스! 깼구나.”
“아빠가 너무 떠들어서 우리 아기가 깬 모양이네.”
아빠는 다섯 살짜리 오빠를 안아 들었다.
명명식 직후 막 깨어나서 보았던 때보다 더욱 어린 티가 나는 오빠.
가장 다른 건 오빠의 행동과 태도였다.
아빠에게 칭얼거리며 안기는 오빠는, 영락없는 다섯 살배기 어린애였다.
조금의 그늘도 없는.
그리고 나를 가끔 짠하게 만들던, 아직 어린데도 오빠랍시고 날 지키겠다는 웃자란 태도가 거의 없는, 그냥 어린애인 오빠.
이렇게 보니까 알겠다. 요즘 아빠랑 오빠가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때에 비하면 아직 다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거였다.
새삼 가슴이 쓰렸다.
아빠는 오빠의 귀에 다정하게 속삭여 주었다.
“루퍼스. 좋은 소식이 있단다.”
“우응?”
“곧 루퍼스에게 동생이 생길 거야.”
“덩생?”
졸음으로 반쯤 감겨 있던 오빠의 눈이 댕그래졌다.
“동생이요?”
“그래. 여기, 엄마 배 속에 루퍼스 동생이 있어.”
“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
오빠는 신기한 듯 엄마에게 머뭇거리며 다가가지 못했다.
자신이 혹여나 잘못 건드렸다가 엄마랑 배 속의 나까지 다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엄마는 그런 오빠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이마에 뽀뽀를 해 주었다.
“아직 모른단다. 루퍼스는 오빠가 되고 싶니, 형아가 되고 싶니?”
“형아!”
오빠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두 형아가 되어서, 같이 전쟁 놀이 할 거예요!”
호오. 그랬구나. 그랬단 말이지.
아마 이때의 오빠는 나중에 자기가 오빠가 되어서, 인형 놀이를(물론 마왕이 짱 먹는 내용이지만) 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특히, 우리 가족이 이렇게 갈라지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겠지.
하지만 이때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는 그림처럼 화목하고 다정한 가족이었다.
현재의 상황을 다 알고 시스템을 통해 몇몇 힌트도 얻어 둔 나에게는 이 광경에서 의미심장한 부분이 보였다.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우리 가족을 바라보는 엑스트라들 사이.
유일하게 질투심과 분노로 불타는 눈을 한, 이질적인 이가 있었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
이제 알 것 같았다.
시스템이 어째서 그때 저 여자를 죽이지 말라고 했는지.
아직 써먹어야 할 곳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아빠의 입장에서 재생되는 과거는 내 눈앞에서 빠르게 진행되었다.
엄마의 임신 소식을 안 지 사흘 후.
아빠는 새벽녘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고 황후궁으로 곧장 달려오게 된다.
한 시녀가 엄마의 용태가 갑자기 안 좋아졌다는 소식을 전해 온 것이다.
아빠는 따르겠다는 시종들도 만류하고 경악하여 달려왔다. 황후궁 구석의 잘 쓰지 않는 침실로.
“이즈!”
그리고, 아빠의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다음 날 아침, 처음 보는 여자가 아빠의 옆자리에 누워 있었고.
그 뒤는 내가 들은 대로였다.
***
“……아가! 정신 차려라!”
내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아빠는 너무 놀란 상태였다.
거울을 통해 아빠의 기억을 보는 동안, 내가 혼이 빠진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아빠는 그걸 내가 너무 놀란 것으로 받아들였고.
“괜찮아요.”
“정말, 정말이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묻는 아빠는 너무 슬프고 또 힘들어 보였다.
아빠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당장이라도 날 품에 안고 확인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막상 손을 내밀지는 못했다.
차마 손을 댈 수 없는 것처럼.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그런 아빠의 팔을 끌어다 품에 폭 안겼다.
***
그날 밤.
나는 <은신의 호흡> 스킬을 이용해, 혼자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머리가 아릴 정도로 차가웠다.
이 사건의 진위와 관계없이 근본적인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게 우연일까?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겼었다는 게.’
그 때문에 우리 가족은 몇 년을 갈라져 있었다.
엄마는 상처받은 채 우리의 곁을 떠났고.
아빠는 자신을 탓하며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겼다.
오빠는 그 어린 나이에 외롭게 지내야 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을 갈가리 찢어 놓은 사건이 정말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고?’
도저히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건 아빠를 믿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의 판단이었다.
사실 환생하고 처음 눈을 뜬 순간부터, 계속 의문을 가져 왔던 것이다.
어떻게 환생이 가능했던 걸까.
처음엔 단순히 마왕을 처치한 보상이라 생각했지만, 정말 그뿐일까.
하필이면 시스템이 나만을 위해 움직이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시스템에 따르면 지금의 생은, 환생한 세계는 불완전했다.
시스템이 이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바꾸기 위해 나를 돕고 있다면.
반대의 목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 세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사교도 놈들.’
아직 확정지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직감은 점점 더 뚜렷해졌다.
그리고 나는, 이런 감이 아주 예리했던 편이다.
전생부터, 지금 역시.
의혹과 분노를 조용히 지르밟아 가며, 나는 지하 감옥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다.
내 기척을 가려 주던 스킬은 바로 해제했다.
어둠은 나에게 전혀 방해가 되지 못했고.
악취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시궁창의 벌레처럼 버르적거리던 누군가가 내 기척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끄, 어어…… 우욱. 흐윽……, 우, 으…?”
“…….”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한때 다브네스 후작 부인이라고 불리던 여자.
지금은 그냥 죄인 중 죄인으로서 고통받고 있는 오물.
마침내 그 여자는 눈앞에 있는 것이 나임을 알아보았다.
“으어……?”
[폴카 : ‘황녀? 황녀가 왜 여기에?’]
이제는 말도 제대로 못 하게 된 모양이다.
뭐, 상관없었다. 필요한 정보를 얻어 내는 데에 목소리는 필요 없으니까.
시간을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도 없었고.
내 예상이 맞다면, 이 여자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가족을 위협한 적이었으니까.
나는 거울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7년 전, 그때의 일. 너랑 연관이 있지?”
“……어?”
“엄마가 나를 임신하신 걸 안 지 사흘 후. ‘그 날’의 일 말이야. 너, 알지?”
추레해진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정곡을 찔렀음은 표정만이 아니라 다른 걸로도 알 수 있었다.
[폴카 : ‘설마, 설마 그걸 어떻게……? 그때는 태어나지도 않은 어린애가 어떻게……?’]
동시에 이 여자의 떨리는 눈이 비친 거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빠 때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