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6. 메인 퀘스트 : 진실 (04)
***
차르륵-.
귓가에 필름이 감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앞이 온통 세피아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주변을 보았다.
이번에는 아빠 때보다 훨씬 빠르게 기억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여자’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아주 초조하고 불안한 걸음.
나는 가볍게 따라붙었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손에 반짝이는 보라색 유리병을 들고 어두운 밤, 황후궁 복도를 걷고 있었다.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빨리 가서 준비를 해 둬야 해. 그래야 타이밍을 놓치지 않지.”
그리고 그녀는 황후궁 구석의,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침실로 향했다.
그곳에 작은 향로를 꺼내어 놓고, 유리병 속의 내용물을 반쯤 떨어뜨렸다.
향로에 떨어진 액체는 물이 아닌 듯, 불을 꺼트리지 않았다.
오히려 불꽃이 옮겨붙더니, 기묘한 보랏빛 연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그걸 내려다보며,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제 그분이 오시기만 하면……,”
그때였다. 등 뒤에서 다브네스 후작 부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은.
“부인.”
“……!”
놀라서 뒤돌아본 곳에는, 내가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벨론드 대공비!’
한때 그렇게 불리던 사람.
세실리아가 계승권을 잃으면서 백작 부인으로 격하되었고.
내가 대공과 그 옆에 붙어 있던 사교도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녀도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아마도 죽었을 게 분명한 사람.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브네스 후작 부인을 그 방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갑자기 무슨, 아?”
수면 침으로 다브네스 후작 부인을 쓰러뜨렸다.
후작 부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다음 날 아침, 자신의 거처였다.
이미 모든 일은 끝난 뒤.
황제와 홀덴 백작 영애의 스캔들이 퍼졌고.
다브네스 후작 부인이 매수하여 황제를 불러들이는 데 이용한 하녀는, 이미 살해된 뒤.
당연히 벨론드 대공 부부는 다브네스 후작 부인을 만나 주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항의를 하거나, 황제나 황후에게 알릴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꼴이 되므로.
하지만 그녀의 기회를 가로채 간 홀덴 백작 영애는 끝내 황제의 여인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녀가 낳은 딸 역시.
그럼에도 황제와 황후는 이혼했고.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자신에게 기회가 있으리라 여겼다.
착각이었지만.
그 뒤로 그녀는 벨론드 대공 부부에게 이를 갈며 지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면서도, 내궁을 장악할 때는 도움을 받기도 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
“끄, 어억. 흐억……!”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주름진 목을 부여잡고 비명을 흘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기를 흘려 버린 모양이다.
살기를 거두자, 후작 부인은 겨우 다시 숨을 토해 냈다.
“헉! 허억!”
그녀는 바닥을 긁으며 침을 줄줄 흘렸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의 기억은 전부 확인했다.
예상한 대로였다.
‘그때’의 일은 아빠의 의지가 아니었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과 벨론드 대공가가 개입된, 음모였지.
나는 놀랄 정도로 침착한 상태로 후작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녀의 꼴은 끔찍했다. 그녀가 벌을 받은 지 겨우 3년여.
하지만 지금 다브네스 후작 부인을 보면, 몇십 년은 시간이 흐른 듯 보였다.
겨우 몇 년 사이 하얗게 새어 버린 머리카락은 산발이었고, 얼굴과 온몸이 노인처럼 주름졌다.
게다가 이제는 말도 못 하게 된 모양.
넝마주이가 다 된 꼴로,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바닥을 벌벌 기어와 철장을 부여잡고서 비명을 내뱉었다.
“으어여! 으아으!!!”
사람의 말이 되지 못한 비명.
하지만 나는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폴카 : ‘죽여 줘! 차라리 죽여!’]
나는 차갑게 물었다.
“죽고 싶어?”
후작 부인의 눈에 불이 튀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제발 죽여 달라고. 너무 고통스럽다고. 이제 그만 끝내 달라고.
나는 환하게 웃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착해 보일 미소를.
그리고 대꾸했다.
“싫어.”
“으아아아!!!”
지독한 절망 어린 비명이 지하 감옥을 울렸다.
원래 원수의 절망보다 달콤한 음악은 없는 법이다.
나는 잠시 그 소리를 감상하며 고민에 빠졌다.
이제 남은 거울의 사용 횟수는 한 번.
그리고 그 마지막 한 번으로 그때 있었던 일을 완벽하게 짜 맞춰야 했다.
그게 퀘스트 내용이기도 하고.
또 내가 바라는 일이기도 하니까.
원래대로라면 남은 한 번은 벨론드 대공이나 대공비에게 쓰면 됐을 거다.
그랬으면 사건의 전모를 전부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대공 부부는 둘 다 죽었지.’
정확히 말하자면 대공비는 죽었을 것이라고 예상될 뿐, 아직 확실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교도 놈들이 대공비의 모습을 가장하면서, 살려 뒀을 리는 없다.
99.99% 죽었을 거다.
죽은 자들에게서 기억을 뽑아 낼 수는 없었다.
아직 전체의 그림을 완성할 마지막 한 조각이 모자랐다.
하지만.
‘놈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지.’
이건 확신이다.
간 크게도 이런 일을 벌인 놈들이 갑자기 갱생해서 조용히 살 리 없었다.
틀림없이 움직일 거다.
그것도, 곧.
‘머지않아서 말이야. 곧 내 일곱 살 생일이니까.’
루스템 황족에게 일곱 살 생일은 중요한 행사다.
놈들은 당연히 그때 즈음 나서려 할 거다.
‘나랑 같은 날 태어났다고 했으니까. 그 애.’
아빠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그 여자애 말이다.
내 일곱 살 생일날은, 그 애에게도 일곱 살 생일이다.
예리한 감각이 주는 확신이었다.
‘그때 반드시 놈들이 움직일 거야.’
절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건 즐거움이나 기쁨에서 나오는 미소는 아니었다.
눈앞으로 달려올 적을 기다리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적의 목을 날려 버릴 기대에서 나오는 호전적인 미소다.
다시 피어오르는 살기를 느꼈는지,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신음을 흘리며 구석으로 기어 들어갔다.
나는 웃으며 후작 부인에게 다가갔다.
“사실 살고 싶지? 아니면 편하게 죽고 싶어?”
“……으어?”
그 눈에 떠오른 희망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
주변의 시선이 없는 늦은 새벽 시간.
조용히 한 대의 짐마차가 그랑디오르 공작저로 들어갔다.
작은 곁문으로 공작저에 들어서는 이들은 두 명.
한 명은 젊은 여인, 다른 한 명은 어린 소녀였다. 대략 예닐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그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놀랍게도 현재 공작저의 실질적인 주인인 그랑디오르 소공작 로헨이었다.
그녀의 앞에, 깊게 후드를 눌러쓴 젊은 여인이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저희를 거두어 주시니 감읍하옵니다, 소공작님.”
그리고 옆의 딸을 채근했다.
“어서 인사를 올리거라. 우리의 은인이 아니시니.”
그러자 어린 소녀는 발칵 화를 냈다.
“왜요? 나는 싫어요!”
“에릴!”
“날 그렇게 평범하고 짧은 이름으로 부르지 마!”
에릴이라 불린 소녀는 발작하듯 외쳤다.
워낙 거세게 반항을 하는 통에 깊게 눌러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졌다.
긴 까만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주홍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소녀는 제 어미와 그랑디오르 소공작을 노려보며 외쳤다.
“소공작이든 누구든, 내가 무릎 꿇을 수는 없어!”
“……어째서지?”
소공작은 차가운 미소를 띤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나는 황족이니까! 황제 폐하의 딸이니까! 이 세상에 나를 무릎 꿇게 할 수 있는 건, 단 한 분뿐이에요! 내 아버지, 카스톨트 황제 폐하뿐!”
소공작은 여전히 묘한 미소를 띤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걸 어찌 증명받을까? 네가 태어났을 때도 황제 폐하께 인정받지 못했는데.”
“지금은 달라! 당신도 그걸 아니까 우리를 데려온 거잖아!”
그렇게 외치는 아이의 몸은 밝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분명한 루스템 제국 황족의 특징.
태양의 마력이었다.
소공작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자신감이 넘치니 좋구나. 하지만 마력은 이만 거두렴. 태양석이 반응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니. 때가 되기 전까지는 조용히 지내려무나.”
소공작의 이어진 말에 에릴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작은 황녀님.”
아이는 턱을 치켜들고 소공작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의 어머니, 홀덴 백작 영애는 불안감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겨우 뒤를 따랐다.
사람 그림자가 모두 사라지고 난 이후.
키 큰 정원수의 무성한 이파리 사이에서 한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이 공저의 작은 주인, 로헨 소공작의 장남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은 미간을 찡그린 채 속으로 되뇌었다.
‘황녀라고? 아까 저 꼬마가?’
소년은 이미 황녀를 본 바 있었다.
맹랑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더없이 당당하던 소녀.
그 황녀와 아까의 버릇없는 꼬마는 누가 보아도 같은 핏줄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아이가 보인 건 분명히 태양의 마력.
‘어머니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소년은 깊이 고민했다. 하지만 직접 어머니를 찾아가 이 일에 대해 묻지는 못했다.
그리고, 아나트리샤 황녀의 일곱 살 생일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