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6. 메인 퀘스트 : 진실 (05)
아빠와 다브네스 후작 부인의 기억 양쪽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이건 내가 ‘진실의 거울’을 통해 본 아빠의 과거와, 이후 아빠가 직접 말해 준 기억의 차이에서 알 수 있었다.
“그날 왜 황후궁으로 오셨는지 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그래. 그날의 기억 중 제대로 남은 것이 거의 없구나. 부끄러운 일이지.”
하지만 나는 이미 보았다.
‘그때 아빠는 임신 중인 엄마의 몸 상태에 이상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었어.’
걱정과 불안으로 범벅이 된 채로 달려가던 아빠의 표정이 생생했다.
이렇게 인상적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일반적인 일일까?
절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무언가 비정상적인 것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다브네스 후작 부인의 기억 속에서 본 바 있었다.
그녀가 아빠에게 정체불명의 약을 쓰는 광경을.
‘그게 기억에까지 혼선을 준 건가?’
루스템 황족들의 특이한 체질을 생각하면, 이는 대단히 큰 문제였다.
‘우리한테는 어지간한 독이나 약은 안 통하니까.’
괜히 루스템의 황족들이 태양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로 떠받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역사책이나 사극 드라마에서 수도 없이 등장하는 독살 시도 등은, 루스템 제국에서는 불가능했다.
태양의 마력을 각성한 황족에겐 어지간한 독이나 약이 잘 통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태양의 마력을 각성하지 못한 황족은 해당되지 않지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타인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먹인 약은 잘 통하지 않았다.
본인이 알고 먹는 약과 술 등은 효과가 있지만.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타인이 섭취하도록 한 것에는 태양의 마력이 가진 방어력과 정화력이 반사적으로 발동하는 것이다.
7년 전의 아빠는 당연히 태양의 마력을 넘치도록 가지고 계셨고.
다브네스 후작 부인이 사용한 그 약 역시 통하지 않아야 정상이다.
아빠는 공기 중에 퍼진 약의 존재도, 후작 부인의 음모도 몰랐으니까.
알았다면 당연히 마력도, 아빠의 의지로도 방어를 했을 테니 통하지 않았을 테고.
‘아빠나 엄마 모두 아빠가 약에 당했을 거라고 생각 못 하신 데에는 그 이유도 있었겠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아예 가능성에서 치워 둔 것이다.
그래서 아빠의 배신 혹은 실수로 마무리 짓듯 정리되고 만 셈이다. 의혹을 가질 법한 실마리는 지워진 채.
‘다브네스 후작 부인의 기억을 보면, 벨론드 대공 쪽에서 그때 써먹은 수족들은 곧바로 죽여서 입을 막은 것 같고.’
가장 중요한 아빠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니, 그대로 묻혀 버린 모양이다.
떠오르는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사교도 놈들의 짓이 분명해.’
그들의 수법과 부정한 검은 마력의 위력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아빠의 태양의 마력을 뚫고 효과를 발휘하고, 기억에까지 손상을 주는 방법 같은 건 존재할 수 없었다.
절로 살기가 치솟았다.
놈들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두 번째 세계에서 잘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
엄마와 재회한 다음 날, 아침.
미리 내 명령에 따라 셀리나가 주변에 사람을 다 물려 놓아서, 우리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나와 오빠는 황궁 정원 안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에서 엄마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눈이 조금 시큰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울지 않을 수 있었다.
‘어제 워낙 충격적인 사건을 많이 보고 겪어서 그런가.’
그리고.
“훌쩍. 크흥!”
오빠 놈은 또 울고 말았다.
엄마의 품에 폭 안겨서, 이틀 연속으로 엄마의 옷을 망쳐 놓는 꼴이 한심…, 은 아니고, 조금 안타까웠다.
‘쯧.’
속으로 혀를 찼지만, 소리 내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엄청나게 놀려 줬을 거다. 그 정도가 아니라, 평생 써먹을 놀림거리였다.
하지만 오빠의 마음을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걸로 놀리는 건……, 너무 그렇잖아.
절대 어제 나도 만만찮게 울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일곱 살이 되었어도 아직 “쯧!”을 제대로 소리 내어 발음하기 힘들어서가 절대로 아니다!
나중에 오빠 놈이 나이도 잊고 또 울면, 그때 놀려 줄 거다!
오빠가 겨우 봐줄 만한 꼴이 되고 나서, 우리는 함께 피크닉을 할 수 있었다.
셋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함께 정원에 둘러앉아, 엄마가 가져온 바구니를 열어 보았다.
“자, 이건 엄마가 사절단을 따라온 요리사에게 명해서 만들게 한 하스티아의 명물 요리들이란다.”
“우와!”
“맛있겠다!”
나와 오빠는 열두 살, 일곱 살 어린아이답게 굴었다.
엄마 앞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력으로 온도를 유지해서 가져온 따끈따끈한 스튜와, 신기한 맛의 빵.
뿌리채소로 만든 새콤한 샐러드. 이름 모를 새 고기로 만든 꼬치구이.
엄마가 직접 먹여 주시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꿀맛이었다.
아마, 돌덩이 같은 빵에 멀건 죽이었어도 우리는 맛있게 먹었을 거다.
“에헤, 마이쪄!”
“나두! 나두요!”
엄마는 번갈아 가며 우리의 입에 가져온 음식들을 넣어 주시기 바빴다.
그러자, 우리는 번갈아 가며 엄마의 입에도 음식을 날랐다.
“엄마두 드세여!”
“아, 하세요!”
엄마는 행복한 미소와 함께, 우리가 먹여 주는 음식을 전부 받아드셨다.
그리고 뿌듯한 표정으로 자랑하는 걸 잊지 않으셨다.
“여기 쓴 고기들은 엄마가 직접 하스티아에서 사냥해 온 거란다.”
“우와! 엄마 멋져요!”
“나도 사냥 가르쳐 주세요!”
“그래, 우리 아가들.”
음식을 직접 만든 게 아니라는 게 엄마다웠다.
그도 그럴 게, 내가 기억하는 전생의 엄마는 우리 가족 내에서 부엌 출입 금지였기 때문이다.
‘라면 끓이시다가 못 쓰게 된 냄비가 몇 개였더라.’
절로 아련해지는 기억이다.
사실 아빠도 오빠도 집안일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었다.
오빠가 끓여 주는 라면 정도가 그나마 우리 집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음식 중 먹을 만한 유일한 거였다.
아니, 맛있었다고 해 두겠다.
화력이 짱짱해서, 면이 아주 꼬들꼬들했으니까.
가사에 젬병인 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우리 집에는 늘 가사 도우미가 있었다.
돈이야 전원 S급 헌터라 남아돌았으니까.
그리고 엄마는 온 가족 중에서 가사에 제일 서투르셨다.
전생의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유달리 그리워지는 게 하나 있었다.
‘오빠가 끓여 준 라면……, 먹고 싶다.’
츄릅.
나는 침이 흐르려는 걸 닦고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런 쓸데없는 추억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지.
지금 엄마랑 있다구!
무려, 엄마! 우리 엄마랑!
한순간, 한순간이 소중한데! 정신 차려야지!
고개를 들자,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가 있었다.
내가 ‘에헤.’ 하고 웃으며 매달리자, 마주 안아 주는 엄마가 있다.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보듬어 주는.
엄마의 체온. 냄새. 모든 것이 꿈같았다.
‘행복해.’
겨우 전부 되찾았다.
전생에 잃은 가족을, 모두.
하지만 동시에 서늘한 현실 인식도 함께 들었다.
나는 아직 가족을 완전히 되찾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빠와 엄마는 여전히 이혼한 상태였고.
그 이유는 사교도 놈들이 뒤에서 조종한 음모 때문이니까.
나는 가족을 완전히 되찾을 것이다. 반드시.
그리고.
‘절대 곱게 죽게 안 놔둘 거야. 이 음모를 꾸민 놈들…….’
차가운 분노가 내 작은 가슴속에서 불타고 있었다.
***
이젤리아와 루퍼스리안은 아나트리샤가 갑자기 정원 구석으로 데려가자, 이기지 못하고 따라갔다.
“이리요! 이리로!”
“어딜 가는 거니, 아가?”
“갑자기 왜 그래, 리샤?”
아나트리샤가 두 사람을 데려간 곳은, 정원 구석에 클로버가 만발한 곳이었다.
초록색 클로버 잎으로 만든 융단이 깔린 듯한 장소.
클로버가 생생하게 피어 있을 때는 지났지만, 주변의 기온을 조금 서늘하게 유지했기에 이곳의 클로버들은 초여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흰색과 연분홍의 클로버 꽃들이 초록색 융단 위에 곳곳이 피어 있었다는 소리다.
그걸 보고 루퍼스리안은 울컥한 표정을 했다.
“……!”
엄마는 알지 못했지만, 클로버에는 그들 가족의 추억이 있었으니까.
지금 소년의 가슴에 매달린 피불라 결정 안에 고이 보관된 클로버 두 줄기가 그 증거였다.
그리고 루퍼스리안은 알고 있었다.
‘여기는 나와 아빠가 같이 상의해서 만들자고 한 곳인데.’
그리고 아나트리샤는 황궁에서 이곳을 가장 좋아했다.
그레이트 홀을 뒤집어엎는 것에는 잔소리를 했고, 황궁 입구 광장의 분수를 보고는 기겁했던 아나트리샤다.
하지만 아이는 이 클로버 정원을 보고는 태양보다 환하게 웃었다.
그 어떤 보물도, 희귀한 식물도, 화려한 장식도 없었지만.
가족의 소중한 추억이 있었으니까.
“기다리세요, 엄마! 오빠도 가만히 있어!”
그렇게 외친 아나트리샤는 클로버 밭으로 뛰어들어 자그마한 손으로 꼬물꼬물 뭔가를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답게 짧은 팔다리가 이리저리 끙차끙차 바지런히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호박바지 궁둥이가 꿍싯꿍싯거렸다.
이젤리아와 루퍼스리안은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틀어막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오래 떨어져 있었지만 많이 닮은 모자는, 이심전심을 경험하고 있었다.
‘내 새끼 최고!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내 동생 너무 귀여워엇! 정원수 뽑아! 황궁 뿌셔!’
한참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한 아이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제 엄마와 오빠에게 달려왔다.
머리카락과 옷 곳곳에 풀 쪼가리와 흙이 묻어 있었다.
아이의 두 손에는 얼기설기 만들어진 클로버 꽃 화관과 팔찌가 들려 있었다.
“이건 엄마 거!”
“그리고 이건 오빠 거야!”
아나트리샤는 엄마의 머리 위에 클로버 화관을 씌워 주었다.
그리고 오빠의 손목에는 클로버 꽃팔찌를 채워 주었다.
“헤헤헤.”
아이는 환하게 웃으면서, 속으로 자신에게 다짐했다.
‘꼭 우리 가족을 완전한 모습으로 되찾을 거야. 이건 나와, 우리 가족에게 하는 약속이야.’
***
나는 한참 동안 엄마, 오빠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엄마의 머리에 클로버 화관을 씌워드리고.
엄마의 무릎 위를 당당하게 차지하고서.
그때, 엄마의 가슴팍에 매달린 펜던트가 눈에 띄었다.
이렇게 물은 건 충동적이었다.
“엄마, 이거 열어 봐도 돼요?”
“……그래.”
엄마는 조금 민망해하시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펜던트의 소켓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내가 예상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함께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