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2/218)

Level 16. 메인 퀘스트 : 진실 (07)

“…….”

“…….”

홀 안이 차가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누가 얼음물을 가져다 사람들 머리 위로 쏟아부은 듯한 느낌.

이 싸늘한 공기를, 단 두 사람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행동했다.

바로 황제의 행차를 막아서며 충격적인 말을 한, 홀덴 백작 영애.

그리고 그 옆에 최대한 화려하게 꾸민, 예닐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

검은 머리칼을 가진 아이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듯한 태도였다.

화사하게 웃으며 황제의 앞으로 나서,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 올렸다.

“그동안 너무너무 뵙고 싶었어요, 아바마마!”

해맑게 웃는 얼굴로 아이는 황제의 품 안으로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얼음 조각처럼 굳은 얼굴의 황제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아이의 손길을 피했다.

그리고, 품 안의 어린 황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품 안의 아이만이 유일하게 믿고 기댈 지지대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

홀덴 영애의 딸은 당혹스러워하며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째서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두리번거리던 아이는 황제의 옆에 서 있던 루퍼스리안 황자를 알아보았다.

“아, 들었어요! 에릴의 오라버니이신 거죠? 저는 에릴이라고 불러 주세요. 물론, 아바마마께서 정식으로 이름을 주시면 바뀔지도 모르지만요.”

아이의 작은 손이 루퍼스리안의 손을 잡으려다가, 거칠게 내쳐졌다.

탁!

“어?”

아이의 주홍색 눈이 커다래졌다.

루퍼스리안은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나는 너 같은 동생은 둔 적 없어. 내 동생은 리샤 하나뿐이야.”

“아, 오라버니는 모르셨구나. 놀라서 그러시는 거 이해해요. 에릴의 존재 자체를 모르셨을 테니까.”

“아니, 알았어.”

에릴은 화색을 띠었다.

“아! 알고 계셨어요? 기뻐요! 에릴은 아주 오래전부터 아바마마와 오라버니를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어요.”

“알고 있었지만 절대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하필이면 리샤의 일곱 살 생일 날 보게 되다니……!”

차가운 분노가 소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일곱 살짜리 아이가 버티기에는 너무 강렬한 살기였다.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아이 역시 제 마력을 발현시켰다.

강렬한 붉은 빛이 아이의 몸 주변으로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 저건! 분명히 태양의 마력!”

“저 아이는 분명히 6년 전 그때 황녀님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태양의 마력을 가진 걸 보니 정말로 폐하의…….”

연이어, 수군거리는 사람들에게 쐐기를 박아 주듯 태양석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건 무엇보다 분명한 증거였다.

이 아이가 태양신의 축복을 받아, 태양의 마력을 타고난 루스템의 후손이라는.

아이의 어머니, 홀덴 영애는 다시 한 번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청했다.

“폐하! 이 아이는 보신 것처럼 폐하의 혈통을 물려받은 아이입니다. 마땅히 태양의 책에 이름을 올리고, 황녀로서 받아들여 주셔야 합니다. 부디, 이 아이에게 이름을 내려 주십시오.”

“…….”

***

파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라, 홀 안의 분위기는 아주 미묘했다.

당연했다.

오늘 갑자기 나타난 홀덴 영애와 그 딸은, 황녀의 생일에 최악의 방식으로 찬물을 끼얹었으니까.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정말로 그 아이가 황녀로 인정될까요?”

“태양의 마력이 없으면 몰라도, 아까 보셨잖아요. 이미 마력을 각성한 상태면 황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건 불가능해요.”

“전례가 그렇긴 하지.”

“선대에만 해도 황자 황녀 중 두 분이 선황후 폐하 소생이 아니었으니…….”

만일 정말로 저 아이가 황녀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황자 황녀 둘만 남은 황위 계승 구도에 변동이 생기게 된다.

이것 자체도 큰 문제였지만.

황녀에게 호감을 가진 이들이 떠올리는 걱정은 다른 문제였다.

그중엔 대표적으로 파셀 백작이 있었다.

“오늘은 아나트리샤 황녀 전하를 위한 날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상황을 망치다니. 작정한 것 같네요.”

피오나는 홀덴 영애와 그 딸에 대한 분노로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그 작고 여린 황녀님께서 얼마나 충격을 받으셨을까!’

세상 누구보다 축복 받아야 마땅한 날.

이복 자매의 존재를 알게 되다니.

그것도 같은 생일을 가진.

아까 홀덴 영애가 주장하던 말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뻔뻔했다.

“오늘은 제 딸의 생일이기도 해요. 마땅히 황녀로서, 이 아이도 축하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피오나의 분노는 황제에게도 향했다.

‘그때도 그렇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가장 상처받는 건 황녀님과 황자님이신데. 폐하가 너무 원망스럽군.’

안 그래도 피오나는 이젤리아가 황후 시절, 가장 친밀했던 친구 중 하나였다.

지방관으로서 일을 겸하고 있었기에 시녀로서 봉직하지는 못했지만, 자타공인 황후의 측근이었던 것이다.

황후가 이혼하고 자국으로 돌아간 이후.

황제에 대한 무언의 시위로 황궁 출입을 아예 끊었을 정도였다.

사랑하는 남편의 요청에도 피오나는 끄떡도 하지 않았었다.

그녀가 다시 황궁 출입을 시작한 건, 전적으로 황녀와 황자 때문이었다.

오래 아팠던 황녀가 정신을 차린 뒤 제 오빠와 아빠를 화해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였다.

특히, 자신이 신경 쓰지 못한 동안 황자궁의 상황을 남편에게 듣고, 경악했었다. 그 어린 황자가 겪었을 일을 생각하니 마음도 아프고 미안했던 것이다.

황제에 대한 원망과 별개로 황자와 황녀에게 관심을 기울여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였다.

감히 황후 대신이 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라도 조금 신경을 썼다면, 아이들이 겪었을 외로움이나 고생이 덜했을 것이라고 후회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피오나는 황자와 황녀가 잘 지내는지를 지켜보고, 자신의 자식들을 친구 삼아 붙여 주려 소개하는 등 노력해 왔다.

때문에 그녀는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린 황녀가 자신을 이모라고 불러 줬을 때, 너무나도 기뻤다.

“피오나 이모!”

“세상에, 황녀님!”

저 애정과 신뢰에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지금 이 순간, 다른 어떤 이유는 다 제쳐 놓더라도, 아이들이 상처받을 것이 너무나도 걱정되었다.

그때였다.

걱정과 분노로 어두워진 그녀의 눈에 ‘누군가’의 모습이 비쳤다.

다른 이들 중 눈치챈 이는 없었다. 그녀 외에 그 정도로 친밀했던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오나는 어지러운 인파 속 구석에 선 한 사람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황후 폐하?”

이젤리아 황후를 닮은 그 사람은, 곧 사람들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잘못 본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피오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하면 더더욱.

‘설마, 황후께서도 저 꼴을 보신 건가?’

사실이라면,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

“그래서 에릴은 말이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드디어 아바마마와 오라버니를 만나게 되니까 꿈만 같아요.”

흐음.

“이것 보세요! 에릴이 지금까지 아바마마와 오라버니를 상상하면서 그린 그림이에요!”

흐으음.

아이가 내민 꾸깃꾸깃한 그림엔 괴발개발로 그린 어른 남자와 열 살 내외의 남자애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리본을 잔뜩 단, 본인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있었다.

아이는 활짝 웃으며, 그림을 아빠에게 내밀었다.

“에릴이 아바마마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

“아바마마……?”

하지만 아빠는 굳은 표정으로 아이의 재잘거림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빠는 한술 더 떠서 나를 꼭 끌어안고 아빠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다.

덕분에 아빠를 홀덴 영애와 저 애가 포위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아빠 구해 줘야 하는데.’

그런데 아빠를 신경 쓰기엔 오빠의 상태가 좀 심상치 않았다.

안 그래도 엄마의 등장으로 상기한 그때 기억 때문에 충격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오빠가 그렇게 기대한 내 생일날 저 애가 나타난 것이다.

오빠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면서.

오빠는 음식 속에서 튀어나온 BQ벌레 조각을 보는 듯이, 저 모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가 하면…….

‘웃기는 짬뽕이네.’

특히 저기서 한창 재잘거리는 중인 꼬맹이가 말이다.

<궁예> 스킬을 쓰기도 전.

아까 그레이트 홀에서 저 얼굴을 처음 마주쳤을 때, 나는 드물게 진심으로 경악하고 말았던 것이다.

‘소피아?’

아는 얼굴과 꽤 닮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였으니 당연했다.

특히나, 전생에 저 얼굴과 닮은 사람은…… 내 철천지원수 중의 원수였으니까.

‘성녀 소피아 머레이.’

그녀는 전생에 나를 제외하면 TOP 3에 꾸준히 꼽히는 강력한 S급 헌터였다.

게다가 S급 사이에서도 드문 치유, 정화 등의 능력에 특화된 귀한 인재였다.

그녀의 헌신 덕분에 목숨을 구한 이들은 무수히 많았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떠받들며 이렇게 불렀다.

‘성녀님.’

나도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고,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믿은 동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소피아를 믿은 것은, 내 최악의 실수 중 하나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대로 성녀였다.

하지만 ‘어느 쪽’의 성녀인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리석었지.

자비로운 성녀님이, 사실은 멸망의 사도, 즉, 사교도의 숨겨진 우두머리라는 게 드러났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어 있었다.

그녀가 본색을 드러냈을 때, 인류는 남은 숫자의 절반을 잃었다.

헌터 협회 회장까지 그 여자에게 이미 넘어가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열음 언니를 비롯한 수많은 동료들이 죽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최악의 적이 숨어들어 와 있었으니까.

“저는 당신을 꽤 좋아한답니다, 안서나 씨. 그래서, 꼭 당신이 절망하는 얼굴을 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녀가 장악한 옛 헌터 협회, 우리의 본거지에서 마왕 소환이 시작되었다.

나와 오빠, 미하일이 포함된 마지막 원정대가 소환진을 공격했고.

우리가 소환진을 파괴하는 데에 성공하자, 그녀는 제 목숨과 육체를 바쳐 소환을 시도했다.

바로, 미하일의 육체를 매개체 삼아.

그리고 그때, 오빠가 나를 지키려다 죽었다.

“…….”

새삼 끔찍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이들이 지금 내 곁에 있으니까. 이번만은 이들을 지켜야 하니까.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저 애는 소피아가 아냐.’

외모는 닮았지만, 표정이나 말투, 행동에서 사람의 특징은 그대로 드러나는 법.

내가 기억하는 성녀 소피아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특히, 아이를 둘러싼 아우라가 아예 다른 사람의 것이다.

나는 <궁예> 스킬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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