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6. 메인 퀘스트 : 최고의 생일 선물 (03)
사람을 속이는 건, 저쪽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 세실리아가 하는 말은 진짜 위증도 아니다.
‘진짜로 쟤는 벨론드 대공의 딸이니까.’
내가 확인한 홀덴 영애의 기억 속에서, 본인이 직접 그렇게 말했지 않나.
“그렇지만, 이대로는……, 이 아이를 황제 폐하의 아이로 둔갑시킬 수가…….”
에릴이 아빠의 자식이 아닌 걸 확인한 순간.
나는 대기 중이던 세실리아에게 <사일런트 메시지>로 관련된 내용을 전달했다.
물론 홀덴 영애의 기억을 확인하기 전부터 에릴의 출생에 대해서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고.
사전에 대략적으로 세실리아에게 말해 두긴 했었다.
‘벨론드 대공 부부가 홀덴 영애와 이상하리만큼 긴밀한 연관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직계 황족으로 들이밀려 하는 아이라면, 적어도 그 아이가 태양의 마력을 각성할 가능성이 있어야 했다.
그러니 에릴의 친부가 누구인지 예상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딱 맞았고.’
이를 예상했을 때, 증인으로 세실리아를 택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벨론드 대공의 사생아를 증명하는 증인으로, 벨론드 대공의 딸만큼 적격인 인물은 없으니까.
“쎄씨. 혹시 네 부친에게 너와 어머니가 다른 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아?”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밖에서 밤을 보내고 돌아오는 일이 잦았고, 어머니는 늘 아버지가 여러 애인을 곳곳에 두고 있다고 투덜대셨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세실리아의 표정은 혐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게 나와 세실리아의 차이였다.
‘나는 아빠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걸 절대 못 믿겠는데, 세실리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구나.’
죽을 뻔한 이후, 세실리아는 더더욱 적극적으로 나에게 협조하기 시작했다.
내 덕분에 두 번째로 목숨을 구하고 나자, 확실한 깨달음이 왔던 모양이다.
‘내 도움이 아니면 자기가 살아남기 힘들 거라는 걸, 이제 확실히 안 거지.’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 한 자들에게 보복하고 싶어서 벼르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누구라도 믿을 수밖에 없고, 극적인 증인을 손에 넣은 것이다.
세실리아의 입에서 나오는 상세한 증언이 사실은 조작된 것이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 안에 담고 있는 제일 중요한 정보가 100% 사실이니까.
“몇 년 전에 그 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시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사생아가 있고, 그 모친이 홀덴 백작 영애라는 사실도요. 워낙 충격적인 일이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말도, 말도 안 됩니다!”
저렇게 항변하면서도, 홀덴 영애 본인도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엘라이자 홀덴 : ‘젠장! 집 안에서 말을 함부로 흘려서 상황을 이렇게 만들다니! 죽어서도 도움 안 되는 인간! 돈 몇 푼 보내 주면서 그따위로 닦달하더니!’]
오, 돈도 보내 줬나 보네.
하긴. 자기 자식이고, 일부러 아빠 딸로 둔갑시키려 작정했으니, 나름대로 관리를 했겠지.
나는 이 사실을 <사일런트 메시지>로 고스란히 세실리아에게 전달했다.
그 결과 세실리아의 증언은 점점 정교하고 신빙성 있어졌다.
“제 말이 의심스럽다면 벨론드가의 6년 사이 재산 사용처를 조사해 보세요. 아마도 홀덴 영애에게 지원한 생활비에 대한 게 나올 겁니다! 어머니가 그에 대해서 화내면서 밤마다 우셨으니까요!”
세실리아는 죽은 부모를 신나게 팔아먹었다.
본인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유감밖에 없을 부모에 대한 의리가 중요할 리가.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조사해 보세요!”
[엘라이자 홀덴 : ‘어차피 자금 출처를 전부 세탁해서 보냈다고 했어. 들킬 리가 없어!’]
그리고 이 사실은 당연히, 나를 통해 세실리아에게도 전해졌다.
“아버지는 몇 단계로 돈의 출처를 바꾸어 보냈을 겁니다! 제 증언이 사실과 다르다면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
[엘라이자 홀덴 : ‘헉! 어떻게 저 사실까지 아는 거지?’]
그야 네가 (속으로) 말해 줬으니 알 수밖에.
나는 나 혼자만을 위한 증인에게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날렸다.
‘안녕, 안녕. 나만 들은 증언은 고마웠어. 이 XXX!’
물론 (속으로) 가운뎃손가락을 함께 더해서 말이다.
***
세실리아가 등장하면서 홀의 분위기는 일변했다.
7년 전의 스캔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았다.
태양의 마력을 지닌 에릴이 황녀로 인정받아야 하느냐.
또 6년 전의 태양석을 빛나게 한 것이 누구인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에릴이 황제의 사생아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황제가 홀덴 모녀에게 대놓고 냉혹한 말을 한 것은, 사람들의 눈이 많은 곳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홀덴 모녀에게 향하는 여론은 동정이나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대부분 경멸과 멸시 등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여기에 마지막 쐐기를 박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들의 주장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증인이 나타나, 엄청나게 신빙성 있는 증언을 했다.
당연히 의견이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벨론드 영애의 말이 아주 신빙성 있게 들리는데? 나만 그런가?”
“아뇨. 저도 그렇게 들려요.”
“게다가 자금 출처는 아무리 세탁했더라도 제대로 조사하면 어느 정도 증거를 찾아낼 수 있지 않나요?”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철없는 에릴조차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아니에요! 에릴은 아바마마의 자식이 맞아요! 이 힘을 보시라구요!”
에릴이 태양의 마력을 다시 발현시켰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공의 자식이라면 당연한 일이니.
분위기에 힘입어, 세실리아는 황녀가 시킨 증언에 자신이 당한 일까지 살짝 끼워 넣어서 고발을 마쳤다.
“제가 이 비밀을 아는 걸 알고, 저들이 선수를 쳐서 제 입을 막으려 한 겁니다!”
세실리아는 치마를 걷어 제 다리를 드러내 보였다.
일부러 붕대를 풀고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게 한 다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 때문에 저는 죽을 뻔했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정말로 죽었을 거예요!”
아나트리샤는 조금 감탄했다.
은근슬쩍 자신에 대한 아첨을 덧붙이는 솜씨가 꽤 훌륭하다, 라는 게 평가였다.
‘생존 욕구는 대단하네. 당근 꼬다리가 이렇게까지 달라지다니.’
유해 당근도 쓰기 나름이라 이건가.
아나트리샤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릴 겸,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그럼 에릴은 리샤 언니 아닌 거예요? 에릴 엄마가 쎄씨까지 죽이려고 한 거예요?”
현재 상황에 큰 충격을 받은 일곱쨜다운 반응. 당연히 철저하게 계산된 말과 행동이었다.
울먹거리는 어린애의 목소리가, 아주 낭랑하게 홀 안에 울려 퍼졌다.
당연히 어린애의 목청이 이렇게 클 리 없다.
아나트리샤가 은근슬쩍 마력으로 목소리를 확성한 것이다.
어린 황녀는 아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후에엥―.”
당연히 연회장 곳곳에서 황녀에 대한 동정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세상에, 저 어린 분이 얼마나 충격적이실까.”
“천진한 마음으로 그래도 언니라고 받아들이려 하셨다니, 어쩜 마음이 비단보다 고우신지.”
“그러면 그때 홀덴 영애가 폐하와 일이 있었다고 우기고 다닌 건 새빨간 거짓말인 거네요?”
“그렇겠지. 하긴, 좀 이상하긴 했어. 황제께서 전 황후 폐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데.”
“사실이더라도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다고 처음부터 생각했어요.”
“뻔뻔하기도 해라.”
온 사방에서 비난과 경멸의 시선, 목소리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이미 결론이 난 것과 다름없는 상황.
하지만 아나트리샤는 시체에 확인 사살 하는 걸 잊지 않는 철저한 전직 S급 헌터였다.
‘그때 아빠가 음모에 빠졌다는 걸 구체적으로 밝혀 줘야 해. 그래야…… 엄마의 오랜 오해와 상처가 확실히 풀어지지.’
아나트리샤는 <사일런트 메시지>로 세실리아에게 추가 명령을 내렸다.
-두 번째 증인 들여와.
세실리아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소리 높여, ‘제가 들었시유.’를 시전했다.
“게다가 홀덴 영애에 대한 제 고발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엿들은 바에 따르면, 홀덴 영애는 그때 황제 폐하께 사악한 약을 썼다고 합니다!”
“뭐라고?!”
“감히 황제 폐하께 사특한 약을 쓴 것은, 당연히 반역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홀덴 영애는 새파랗게 질려서 항변했다.
“아닙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벨론드 영애는 저에게 원한을 가지고 모함하는 것뿐입니다! 게다가 신성한 황족께 독이 통하지 않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 않습니까!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증거나 증인이 있으면 말해 봐요!”
그러자 세실리아는 씨익 웃더니.
바닥에 이마를 대고서 간청했다.
“폐하, 다른 증인을 부를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십시오. 지금 지하 감옥에서 죗값을 치르고 있는 전 다브네스 후작 부인을 소환하여 증언하게 해 주십시오.”
아나트리샤 역시 제 아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서 사악하게 웃었다.
그녀는 이미 확실하게 말을 맞춰 두었던 것이다.
“사실 살고 싶지? 아니면 편하게 죽고 싶어?”
지하 감옥에서 아나트리샤가 그렇게 물었을 때, 죄인 폴카의 진심을 이미 보았다.
[폴카 : ‘살려 줘!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아나트리샤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불려 올 죄인이 어떤 증언을 할지 말이다.
‘물론 말로는 증언을 못 하겠지만.’
상관없을 것이다.
말은 못 해도, 손은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