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7/218)

Level 16. 메인 퀘스트 : 최고의 생일 선물 (04)

***

한때 다브네스 후작 부인이라 불렸던 죄인의 존재는 아예 잊혀 있었다.

이번 일로 인해 불려 나오면서, 그녀는 3년 만에 처음으로 지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귀족들과 황족이 있는 연회장에 나서기엔 지나치게 더럽고 냄새나는 꼴이었기에.

허겁지겁 씻고 깨끗한 하녀복을 입을 수 있었다.

3년 만에 처음 보는 햇빛이었고, 처음으로 냄새나는 몸을 씻을 수 있었다. 꼭 꿈같았다.

황후궁 부시녀장으로서 일하던 그녀를 기억하는 이들은, 겨우 3년 사이에 30년은 나이를 먹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경악했지만.

단 한 순간뿐이었다.

그녀의 행색에 큰 관심을 가진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그녀가 하게 될 증언에만 관심이 있었다.

“죄인을 데려왔습니다.”

“으. 우우…….”

폴카는 두려움과 희망 가득한 눈으로 황제의 품에 안긴 어린 소녀를 보았다.

저 아이가 다녀간 지 겨우 며칠 후.

3년간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가 지금 주어진 것이다.

다시 머릿속으로 똑같은 말이 울렸다.

며칠 전, 지하 감옥으로 찾아왔던 황녀가 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말.

-살고 싶어?

-아니면 편하게 죽게 해 줄까?

폴카는 이것이 황녀가 내민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았다.

자신에게 더는 기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사실대로 말하면 돼. 있었던 일 그대로. 그러면 내가 기회를 줄게.

어린 소녀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달콤한 유혹을 건네고 있었다.

그녀가 이를 거부하는 걸 불가능했다.

궁지에 몰리고도 홀덴 영애는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벨론드 영애의 말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입니다. 저와 딸아이를 질투해서 음해하려는 겁니다! 대체 저 더러운 죄인이 저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

홀덴 영애의 얼굴을 본 폴카의 눈이 번뜩였다.

지난 3년 사이 자신은 노인처럼 늙어 버렸는데, 홀덴 영애는 아주 상태가 좋아 보였다. 

여전히 그 나이 대다운 팽팽한 피부를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다.

폴카는 홀덴 영애가 자신의 기회를 빼앗아 갔다고 여기고 있었기에, 더더욱 깊은 원한과 악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무슨 증언이 가능하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말은 못 해도 글로 쓰는 건 가능하지요!”

세실리아가 이렇게 대꾸하자, 시종장이 직접 폴카에게 다가와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7년 전 ‘그때’ 황제 폐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바를 소상히 적으시오.”

“저런 더러운 죄인의 말 따위를 어떻게 믿……!”

“닥쳐라.”

홀덴 영애의 발악은 황제의 분노 어린 말 한마디에 저지되었다.

자신을 향하는 살기에 모골이 송연해진 홀덴 영애는 입을 다문 채 얼음처럼 굳었다.

그사이 폴카는 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강하게 힘을 주어 한 자 한 자 적어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시종장이 그걸 대신 읽었다.

“그때 저는 벨론드 대공비의 꼬임에 넘어가, 황후 폐하의 용태를 빌미로 황제 폐하께서 황후궁에 걸음 하시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저 홀덴 영애가 폐하께서 들어가신 그 방에…… 사특한 미향을 피워 두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벨론드 대공비에게 당해 의식을 잃은 터라, 이후에 있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당시에는 대공비의 협박 때문에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폴카는 자신이 피웠던 향을 홀덴 영애가 한 것으로 바꿔서 말했다.

충격과 혼란이 홀 안으로 퍼져나갔다.

“세상에! 그러면 벨론드 영애의 말이 맞는 건가?”

“감히 황제 폐하께 저런 짓을 하다니! 이건 반역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경악한 가르텐 공작은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고,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양의 마력을 가진 황족께는 비밀리에 사용된 독이나 약은 거의 통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폐하께는…….”

“그러고 보니 맞는 말씀이에요.”

“태양의 마력이 아주 약한 황족이라면 그런 경우가 있다고 들었지만, 황제 폐하이신걸요.”

이 의문에 기대어 홀덴 영애는 자신을 비호하려 애썼다. 

“마, 맞습니다! 폐하께 통하는 독이 있을 리 없습니다. 거짓말입니다! 말도 안 돼요! 무, 물론 저는 당연히 폐하께 약을 쓴 적이 없지만요!”

그러자 폴카가 다시 펜이 부러져라 마구 글씨를 갈겨댔다.

“그 약은 독은 아닙니다. 단, 태양의 마력을 가진 황족에게도 통하는 사악한 힘을 가진 강력한 수면제나 마취제에 가깝습니다.”

“……설마 그래서, 그때……?”

황제의 입에서 침음성이 터졌다.

폴카의 증언 내용에 심증이 가는 부분이 있다는 소리였다. 홀덴 영애와 폴카의 다툼에서, 폴카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연이어 폴카의 증언을 읽던 시종장은 놀라 잠시 숨을 집어삼켰다.

“……제가 쓰던 방의 비밀 공간에 같은 약이 있습니다. 아직 남아 있을 테니, 그것을 확인하시면 제 증언이 옳다는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경악과 분노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

놀랍게도 죄인의 증언이 정확하다는 사실은 바로 증명되었다.

아빠의 명을 받은 시종장이 부하들과 증인인 귀족들을 우르르 끌고 가서, 폴카가 쓰던 방에서 그 약을 찾아낸 것이다.

“폐하. 죄인 폴카의 증언대로, 이 약이 발견되었습니다.”

시종장은 증거물로서 보라색 유리병을 아빠에게 바쳤다.

본 적 있는 물건과 닮았다.

분명히 폴카의 기억 속에서 본 것과 같은 약이었다. 내용물이 가득 차 있고, 병의 디자인이 조금 다른 것만 빼면.

‘그런데, 저걸 아직 숨기고 있었다고? 언제 또 써먹으려고 한 거 아냐?’

절로 이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는 이미 한번 저지른 적 있으니까.

그때, 발동 중인 <궁예> 스킬의 부가 효과가 연달아 삐롱삐롱 떠올랐다.

[폴카 : ‘저 약이 왜 아직도 있냐고 하면 뭐라고 둘러대지? 내가 저 약을 한 번 더 쓰려 했었고, 실패해서 약을 추가로 구했다는 건 황녀가 알면 안 돼. 그랬다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어쩌지, 이미 들켰는데?

내가 지하 감옥에서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굴었는데, 홀랑 잊어버린 건지.

혹은, 내가 바라는 증언을 하고 아예 방심해 버린 건지.

아니면, 정말로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게 가능할 리 없다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혹은 전부 다일지도.

내가 잠시 노려보자, 폴카는 머리를 조아리고, 어깨를 움츠렸다. 비굴한 미소가 입가에 떠오른다.

어떻게든 나에게 잘 보여 조금이라도 자신의 상황이 나아지길 바라는 것이 티가 났다.

그러든 말든.

‘저 여자에게 줄 대가는 이미 정해 뒀으니까.’

나는 차갑게 비웃으며 폴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이것으로, 이미 결론은 난 셈이었다.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반역죄지.’

황제에게 허락받지 않은 약물을 쓰려 한 것도.

황제의 친자가 아닌 아이를 친자라고 우긴 것도.

그때 아빠는 나를 꼭 끌어안은 채, 귀에 속삭여 주었다.

“……너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감사할 뿐이란다. 아가.”

“…….”

놀랍게도, 직접 움직인 건 세실리아였는데, 아빠는 그 뒤에 내가 있다는 걸 눈치채신 모양이다.

내가 놀란 눈을 크게 떠서 올려다보자, 아빠는 조금 슬프고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보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있다가 우리만 있을 때 하자꾸나.”

“……네.”

아빠는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홀덴 백작 영애 엘라이자는 감히 황실의 적통을 어지럽히려 하고, 황제를 중독시키려 한 죄를 용서할 수 없다. 이에 처형을 명한다. 일주일 뒤 교수형에 처할 것이다.”

“폐하!!! 아닙니다! 안 됩니다!!”

홀덴 영애는 발악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빠는 교수형을 얘기했지만 실제로는 죽음이 다가 아닐 것이다.

사형수, 그것도 반역죄인은 처형일까지 지속적으로 고문이 가해지도록 되어 있었다.

연이어 다른 죄인에 대한 처벌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 일에 가담한 전 황후궁 부시녀장이자 전 다브네스 후작 부인 폴카에게도 처형을 명한다. 단, 직접 죄를 증언한 공을 생각하여 추가적인 고문은 면제하고. 독배를 내릴 것이다.”

“으우?! 아아아!!!”

죄인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와 애걸하려 애썼다.

[폴카 : ‘살려, 살려 준다고 했잖아! 다 증언했잖아! 어째서……!’]

나는 차갑게 비웃었다.

-아니. 나는 살려 주겠다 말한 적 없어. 잘 생각해 보라구.

그저 물어봤을 뿐이다.

살고 싶은지. 고통 없이 죽고 싶은지.

대답을 들은 적도, 어떤 것을 약속한 적도 없다.

그리고 설사 약속했다 하더라도 지킬 생각은 없었다.

나는 절대 성인이 아니니까. 우리 가족을 깨뜨리려 한 적에게 베풀 자비는 없었다.

죄인들이 끌려 나가며 내는 절망 어린 신음이 짐승처럼 울렸다.

“으아아악!!!”

그러나 누구도 죄인들에게 조금의 동정심도 가지지 않았다. 침을 뱉을 뿐.

죄인들이 모두 끌려 나간 뒤.

오도카니 남겨진 것은, 공포로 파리하게 질린 어린아이 하나였다.

“어? 어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왜 어머니가……?”

하지만 누구도 에릴에게 동정심을 보이거나,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제 에릴이 황녀가 아니라 벨론드 대공이 남긴 사생아라는 것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에릴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빠에게 매달리려 들었다.

“아바마마!”

하지만 아빠의 반응은 당연히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아까 에릴에게 보인 아빠의 반응이 많이 참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살기에 아이는 숨도 못 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가 아빠의 뺨을 톡톡 두드리자, 겨우, 아빠는 에릴에게서 살기를 거두셨다.

‘지금 죽어 버리면 안 되지. 쟤는 미끼가 되어 줘야 하는데.’

나는 자신과는 연관 없는 일인 듯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랑디오르 소공작을 잠시 노려보았다.

아빠의 살기에서 풀려난 에릴은 겨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엎어졌다.

“헉! 허억!”

눈물 콧물을 다 쏟는 에릴에게, 아빠의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

“저것을 내 딸의 눈앞에서 치워라.”

에릴은 더는 헛소리를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끌려 나갔고.

그러고 나서야, 겨우 연회 자리가 본래의 역할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홀가분하고 기뻐 보이는 아빠와 오빠.

그리고 나도 당연히 기뻤다.

아빠는 소리 높여 선언하셨다.

“다시 연회를 시작하도록 하지. 우리 딸의 일곱 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분위기였던 파티장이 비로소 공기가 녹아내리고, 흥이 솟아올랐다. 흐뭇했다.

‘아마, 홀덴 영애 모녀의 건을 잠시 미뤄 두고 생일 파티를 강행했어도, 분위기는 다 망가진 상태였을 거야. 지금처럼 깔끔하진 못했겠지.’

나는 아빠의 품 안에서 더없이 밝게 외쳤다. 홀 가장 구석에 있는 이도 들을 수 있도록.

아까 떼를 쓸 때 했던 말을 거의 비슷하게. 그러나 완전히 다른 의미로.

“아빠, 저 갖고 싶은 생일 선물이 있어요!”

“무엇이든 말하렴. 아빠가 전부 들어주마!”

“맞아, 리샤! 태양도, 달도, 별도 따 줄게!”

역시 아빠와 오빠의 웃는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기분.

하지만 조금 모자랐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33.33% 정도?

나는 아빠의 품에서 포롱 날아올랐다.

그리고 처음부터 홀 가장 구석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내가 일으킨 바람이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겨 냈다.

오빠가 닮은 은빛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내가 꼭 닮은 청보랏빛 눈동자가 커다래진다. 

고운 눈매에 약간의 이슬이 맺힌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작은 손으로 그 눈물을 닦아 주며 외쳤다.

“엄마!”

등 뒤에서 아빠와 오빠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즈! 당신!”

“엄마아!!!”

내 눈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소리 높여 외쳤다.

“내 최고의 생일 선물은 엄마예요! 엄마와 함께 하는 생일이, 내가 가장 바라던 선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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