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7. 서브 퀘스트 : 짧은 평온 (01)
***
지금까지 난 환생 이후 시스템의 기능이 전생과 달라졌다고만 생각했다.
레벨이 아예 언급이 안 되는 거라든가, 내 시스템 정보창을 볼 수 없는 것이라든가. 그 모든 것들이.
그런데, 아니었던 거다.
그동안은 시스템 기능이 제한되어 있었다가, 이번에 풀린 모양이다.
그 이유가 내가 일곱 살 생일을 맞이했기 때문인지.
혹은 중요한 퀘스트를 완료한 보상인 건지.
어쩌면, 엄마까지 가족을 완전히 되찾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인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니, 어쩌면 전부 다가 아닐까.
어쨌든 중요한 건, 하나였다.
‘내가 너무 강해졌다는 거지.’
그 덕분에.
파사삭!
내 손안에서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머리핀이 박살 났다.
나는 그냥 집어 들었을 뿐인데.
“으음, 힘을 너무 줬나…….”
지금은 적응 중이다.
순식간에 레벨이 엄청나게 오르면서, 늘어난 건 마력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힘, 민첩 등의 신체 능력도 엄청나게 강해졌다.
사실 넘쳐흐르는 마력을 제외하면, 신체 능력 자체는 일반적인 성인 남성의 3배 정도에 달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완전히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정도도 엄청나지 않냐고?
아마 평화로운 때라면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내 육체적인 나이가 현재 일곱 살인 걸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나는 전생에 마룡을 떨어뜨리고, 마왕의 목을 벤 헌터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귀염뽀짝 황녀님!”
그래, 귀염뽀짝 황녀님……이 아니라!
셀리나의 숨 쉬는 듯한 주접에 너무 적응해 버렸어!
아무튼, 이번 생에도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사교도 놈들이 내 적이다.
아무리 강해도 모자랐다.
‘아마 시스템이 이렇게까지 퍼 준 걸 보면, 적들 역시 더 강해질 거라는 경고일 수도 있어.’
내가 곰곰이 현 상황을 분석해 보는데, 옆에서 치장을 도와주던 오빠가 말을 걸었다.
“리샤. 그냥 내가 해 줄게. 오빠한테 맡겨!”
“……그럴까.”
하긴, 다 부숴 먹는 것보다는 잠깐 손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게 나은…… 건 아니지!
이것저것 만져 봐야 빨리 적응하지!
벌써 어제보다는 좀 적응을 한 편이었다.
막 레벨 시스템이 오픈된 어제는…… 벽을 세 개, 문을 네 개 날려 먹었으니까.
일단, 대답은 해 버렸으니 오빠가 삐지지 않게 머리는 맡겨 두었다.
그리고 엘제가 건네주는 밀크 티 잔을 아주 조심조심 받아 들었다.
심혈을 기울여 힘 조절을 한 끝에, 약하디약한 도자기 잔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어서, 음료수가 내 입으로 들어가는 동안에 밀크 티 수면에는 아주 작은 파문도 일지 않았다.
이 얼마나 완벽한 힘 조절이란 말인가.
이렇게나 빨리 적응해 버리다니.
역시, 대단해. 나!
나는 으쓱으쓱 스스로를 칭찬하며 아침 밀크 티를 홀짝거렸다.
그러자, 오늘은 아빠 대신 내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양옆에 동그랗게 말아 주고.
달랑달랑거리는 루비 장식을 달아 준 오빠가, 내 옆에 앉았다.
“그런데, 리샤. 엄마랑 아빠는 왜 안 오시는 걸까? 아빠는 늘 나보다 먼저 와 계셨는데 말이야.”
나는 밀크티를 반쯤 마신 다음에 무사히 테이블에 내려놓는 데에 성공한 다음.
피식, 웃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리샤, 뭔가 아는 웃음이야.”
그러자 유모와 시녀들의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궁예>를 안 켰는데도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 설마 우리 순진하고 착하고 귀염뽀짝한 아기같은 황녀님이?’
‘정말 뭔가를 아시는 것처럼?’
‘그럴, 그럴 리가!’
아멘다만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뿐.
훗. 아멘다도 순진하군.
“그야 6년 만에 재회하셨는걸. 모른 척하고 있자구.”
“……?”
“이럴 때 우리는 그냥 빠져 있으면 되는 거야.”
여전히 오빠는 이해 못 한 듯했다.
훗. 어린 녀석.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남은 밀크 티도 다 마셔 버렸다.
좋아. 아주 고소하고 달다!
이것이 바로 2회 차 개꿀 인생의 달콤함!
오빠는 끝까지 제대로 이해는 못 한 듯했지만, 내가 하는 말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러고는 내가 좋아하는 호두 스콘에 꾸덕한 클로티드 크림과 라즈베리 잼을 발라 주며 종알댔다.
“그나저나 ‘그것’을 살려서 보내다니, 우리 리샤는 너무 착하고 마음이 여려서 오빠는 늘 걱정이야.”
오빠가 누굴 말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어제 내 생일날 난입한 그, 에릴을 말하는 거다.
지금 에릴은 가르텐 공작저에 있었다.
일단 7년 전 사건의 죄인은 그 모친인 홀덴 영애였고.
그냥 태어난 게 다인 에릴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연좌제를 들먹이지 않은 건 아빠의 마지막 자비이기도 했다.
물론 아빠의 그런 결정에는 내 한마디가 큰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
“그래두 에릴은 아직 어린데…… 불쌍해요…….”
걘 할 일이 있거든요, 라는 말은 생략되었지만.
물론 그 꼬맹이는 마지막까지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나는 아바마마의 딸이에요! 황녀라구요!”
그렇게 주장하다가 결국 거의 질질 끌려갔었지.
‘광장에서도 얼마나 나를 뜨겁게 쳐다보던지, 누가 보면 사랑에 빠진 줄 알겠더만.’
에릴이 가르텐 공작저로 보내진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어려 보호자가 필요하지만, 모친은 반역죄로 처형당할 예정이고 외가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부친의 가문도…….
‘당근 꼬다리한테 이복동생이니 돌보라고 하는 것도 무리고.’
아무리 이 일 저 일 다 겪은 되바라진 영애라지만 당근 꼬다리 본인도 겨우 열네 살에, 아직 다친 심신의 회복도 한참 멀었으니까.
그래서 보호와 감시를 함께 맡아 줄 적당한 가문이 필요했고.
그랑디오르와 가르텐이라는 선택지가 주어졌다.
에아루스는 진작 거절했고.
‘나는 그랑디오르로 갈 거라고 예상하고, 그러길 바랐는데…….’
그래야 에릴이랑 그랑디오르를 엮어서 한 번에 보내 버릴 수 있을 테니.
그런데 에릴 본인이 가르텐을 골랐다.
“……그러면, 그러면 에릴은 가르텐 공작님 댁으로 가고 싶어요.”
어떤 심리인지 이해되었다.
에릴이 황녀인지 아닌지 두고 논의를 하는 자리에서, 맨 처음 황족으로 인정해야 한다 운을 뗀 게 가르텐 공작이었으니까.
공정의 가르텐답게, 공작은 태양의 마력 유무가 황족의 자격에 가장 중요하다는 걸 언급한 것뿐이지만.
에릴에겐 가르텐 공작이 자신의 편을 들어 준 걸로 인식된 모양이다.
‘뭐, 가르텐엔 겉바속촉 꼬맹이도 있으니까.’
그 꼬마는 그냥 불러서 앞에 앉아만 있게 해도 온갖 정보를 머릿속에 줄줄 떠올릴 것 같으니까. <궁예> 스킬로 에릴의 동향을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에릴 그 맹랑한 꼬맹이에 대해 떠올리자, 어제 그 애를 황궁에서 내보낼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애와 직접적인 접촉을 했었다.
“잘 가, 에릴! 만나서 반가웠어!”
그렇게 외치며 아무것도 모르는 일곱쨜답게,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주변에서는 내가 너무 순진하니, 자비롭니, 하고 걱정했지만.
진짜 그래서일 리 없었다.
[스킬 <너의 몸속이 보여(A급)>을 적용합니다.]
나는 스킬로 에릴의 몸 상태 전체를 스캔했다.
시스템 정보 중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반각성 부분은 굳이 더 파 보지 않아도 이해되었지만, 아직도 그 옆에 상태 이상 하나는 아예 깨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스킬로 에릴의 신체 내부 마력 흐름을 확인한 내 결론은 이랬다.
‘그 꼬맹이, 아무래도 타인의 마력 코어를 이식받은 모양인데.’
마력 회로와, 회로에 마력을 공급하는 코어가 분명 다른 사람의 것이다.
내가 이 사실을 인식한 순간, 시스템이 저 새로운 상태 이상에 이름을 부여했다.
[상태 이상 : ▩▤▧※(A급)]
상태 이상 설명의 깨진 부분이 취소되더니, 새로운 용어로 바뀐다.
[상태 이상 : 마력 이식(A급)]
마력 이식이라. 그래, 적절한 표현이다.
왜 정보창에서 이름이 깨졌다가 이제야 이름이 붙었는지 알겠다.
‘마력 이식’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시스템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던 상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즉, 2회 차에 들어 사교도 놈들이 처음으로 만들어 낸 기술이라는 소리다.
인간에게는 마력을 생산하는 중요한 기관이 두 곳에 존재한다.
두뇌와, 심장.
이 양쪽에는 마력 생산을 담당하는 기관, 즉, 코어가 존재한다.
하지만 전생에는 이 기관을 타인에게 이식하는 게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 없다. 코어의 이식은 심장 이식 같은 수술과 동류가 아니었으니까.
‘대체 이번엔 얼마나 사람을 많이 죽여 가면서 난리를 친 거지?’
그들이 이 성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실험을 거쳤을지 뻔했다. 절로 혐오감이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인물도 있었다.
‘콩나물 대가리, 진짜 죽었네.’
콩나물 대가리가 황도에서 사라진 건 벌써 몇 년 전 일이다.
그 뒤로 놈의 소식은 아예 없었다.
그리고 워낙 사소해서 보고도 잊어버렸는데.
얼마 전 문득 확인했던 당근 꼬다리의 상태창에서 이런 문구를 본 적 있었고 말이다.
[협력자 : ……아키러스 벨론드(사망).]
그러고 보니 에릴의 마력 색과 콩나물 대가리의 마력 색이 일치했다.
오빠도 붉은색 계열이긴 하지만 훨씬 밝은데, 저 둘은 아주 흡사했다.
물론, 에릴이 콩나물 대가리보다 마력이 훨씬 강하긴 하지만.
그건 반각성 덕분일 거다.
그렇다면. 모든 정황이 한 가지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콩나물 대가리의 마력 코어를 에릴에게 이식한 거야. 그렇게 태양의 마력을 각성한 황족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거지.’
그걸 보면, 왜 당근 꼬다리가 마력을 다 잃고 살아남았을 때, 사교도가 난리 친 건지도 확실히 알겠다.
애초에 당근 꼬다리의 마력 코어도 시체에서 추출해서 써먹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음. 당근 꼬다리. 은혜 더 갚아라.’
좀 더 데굴데굴데굴 굴려 줘도 되겠다.
오빠는 여전히 에릴과 홀덴 영애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떻게 감히 리샤의 일곱 살 생일을 망치려고 들 수가 있지. 절대 용서 못 해. 역시 벌을 너무 적게 받았다구.”
아마 오빠가 그들에게 더 화를 내는 건, 그동안 아빠에 대해 오해한 것이 자꾸 미안해져서일 거다.
나는 해죽 웃었다.
“어빠. 귀여어.”
스콘이 입 안 가득해서, 발음이 다 뭉개졌다. 하지만 오빠는 엄청나게 좋아했다.
“우리 리샤에 비하면 ‘귀엽다’의 ‘귀’ 자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리샤가 칭찬해 준 건 아주 기쁘지만!”
“…….”
“기왕이면 멋있고 대단하다고 해 줘도 기쁠 거 같아! 물론 귀엽다는 말이 싫은 건 절대 아냐!”
입이 아주 귀에 걸려 있었다.
“그래.”
나는 오빠에게 해맑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 애는 어차피 또 볼 애도 아니니까.”
아니다. 아마도 또 만나게 될 거다. 그것도 근 시일 내에.
***
에릴은 당당하게 가르텐 공작 앞에서 말했다.
“저에게 공녀의 방을 주세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가르텐 공작의 자식은 현재 후계자인 코넬 가르텐 하나였다.
하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코넬에게는 두 살 위인 누나가 있었고,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던 그녀는 결국 작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공작 부부는 딸이 쓰던 모든 것을 원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영지의 성은 물론이고, 공녀가 몇 번 발걸음 하지 못했던 수도 저택의 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로 공작 부부의 슬픔은 아직 컸다.
그런데, 지금 에릴은 그 딸의 방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저는 황녀니까요! 당연히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
가르텐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