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7. 서브 퀘스트 : 짧은 평온 (02)
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공작 부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가르텐 공작은 치미는 분노를 최대한 억누르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당신은 황녀가 아닙니다. 에릴 양.”
“난 황녀예요! 황녀라구요!”
에릴의 벌건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가르텐 공작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니오.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에릴 양도 듣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못 알아들을 말은 아니었습니다. 에릴 양의 친부는 황제 폐하가 아니라, 죽은 벨론드 백작입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내 아버지가 그냥 백작일 리가 없다구!”
“그리고 현재 벨론드가의 가주는 세실리아 벨론드 영애이니, 영애의 허가가 있어야 에릴 양이 벨론드가의 성을 받고, 영애라 불릴 수 있습니다.”
가르텐 공작은 더없이 객관적으로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저 믿기 싫은 현실을 강요하는 것으로만 느껴졌다.
‘지금 넌 귀족 영애조차 되지 못하는 사생아일 뿐이다.’
-라고.
그리고 그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에릴 양이 태양의 마력을 각성한 황족임은 분명하니, 아마도 방계 황족으로 인정받을 수는 있을 겁니다.”
“방계 같은 게 아니라니까요! 난 황녀예요!”
가르텐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어린아이 앞에서 이렇게 넌더리를 표한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어쨌건 에릴 양이 여기 있는 동안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돌볼 터이니 안심하십시오.”
“……왜, 왜 내 말은 안 들어 주는 거예요? 왜, 왜, 왜!!!”
가르텐 공작은 거의 발광하는 아이의 앞에서 뒤돌아서며, 아들에게 당부했다.
“에릴 양을 준비해 둔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예, 아버님.”
가르텐 소공작, 코넬은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부친보다 더욱 포커페이스에 능했다.
그런 코넬조차, 행패에 가까운 억지를 부리는 에릴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표정이 일그러질 뻔했다.
“……따라오세요.”
가르텐 공작은 냉혹하게 떠났고, 아이 혼자 응접실에 남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에릴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결국 코넬의 뒤를 따라갔다.
“흑, 으흑. 아아앙!”
“…….”
코넬은 단 한마디도 위로를 건네거나 달래 주지 않았다.
에릴은 그 어떤 상황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릴은 방으로 향하는 내내 계속 코넬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에릴에게 모두 이렇게까지 가혹한 거예요?”
“왜 누구도 에릴을 위해 화내 주지 않고, 위로해 주지 않아요?”
“아바바마는 어째서 에릴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오라버니는?”
코넬은 귀를 닫고 발만을 움직일 뿐이었다.
에릴이 한마디를 더하기 전까진.
“그 애 때문인 거예요? 그 못된 계집애가 에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래! 그게 틀림없어요! 소공작! 내 말을 들어 보……!”
에릴이 코넬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려는 찰나.
코넬이 사납게 손을 잡아 뺐다. 덕분에 에릴은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어?”
“황녀님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에릴은 가르텐저에 들어와 처음으로 감정을 완전히 드러낸 사람을 보았다.
가르텐 소공작은 ‘누군가’를 위해서 진심으로 화내고 있었다.
‘그 애’ 때문에.
새삼스레 황궁의 화려한 연회장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름답고 강인한 황제와 황자는 오로지 그 애만을 보고 있었다.
에릴에게는 손길은커녕 눈빛조차 내주지 않았다.
귀엽고 예쁜 옷을 입고, 아빠와 오빠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웃던 아이.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그 애만 되고? 나도, 나도 황녀인데!’
적어도 그 옆에라도 자신의 자리가 주어져야 하지 않은가.
아니, 아니었다.
‘그 자리는 내 거여야 했는데!’
에릴은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하지만 누구도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답지 않게 분노한 코넬은 그대로 에릴을 복도에 두고 와 버렸다.
물론 길을 안내할 하녀를 보내는 건 잊지 않았지만.
도저히 더는 그런 험담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감히 누님의 방을 내놓으라 한 것도 기가 찬데, 황녀님에 대한 험담까지……!’
소년은 자신의 방으로 가서 분노를 삭이려 애썼다.
그리고 소년에게 황궁에서부터 비밀 편지가 도착한 것은, 사흘 뒤의 일이었다.
“이, 이건……?”
“황녀님께서 친히 보내신 서신입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보내신 적 없고, 제가 가문 간의 친교를 위해 방문한 것일 뿐입니다만.”
아멘다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는 보고 말았다.
하얗기만 하던 어린아이의 뺨에 선명한 홍조가 도는 것을.
***
그리고 코넬과 에릴이 아웅다웅하고 있던 그때.
황녀궁에서 노닥거리던 아나트리샤와 루퍼스리안은 점심쯤 느지막이 찾아온 부모를 맞이할 수 있었다.
루퍼스리안은 화색을 띠며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오세요!”
“……여독이 덜 풀려서 늦잠을 자 버렸구나. 많이 기다렸니, 루퍼스?”
“조금, 조금 기다렸어요! 그치만 엄마가 피곤하시면 더 많이 기다릴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루퍼스리안은 열두 살 아이답게 해맑았다.
덕분에 이젤리아의 뒤에 선 카스톨트 황제가 조금 민망한 듯한 표정을 하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당연히, 겉은 일곱쨜 알맹이는 서른 넘은 아나트리샤는 대충 다 눈치를 챘다.
‘하지만 모른 척해 주는 것이 딸의 본분!’
아나트리샤는 헤죽헤죽 웃으며 자연스럽게 루퍼스리안의 반대편에서 엄마에게 매달렸다.
하스티아 제일의 기사이기도 한 이젤리아는 거뜬하게 양팔에 아들딸을 안아 올렸다.
“어이쿠, 둘 다 꽤 무거워졌네. 많이 컸구나.”
“에헤헤. 네네!”
“더 클 거예요! 빨리 커서 엄마보다 커질 거예요!”
아기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두 아이는 더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이젤리아는 아들과 딸의 뺨에 뽀뽀를 해 주었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 행복한 가족의 풍경이었다.
***
그야말로 꿈 같았다.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을 정도야.’
사실 나는 전생에 가족들을 모두 잃은 뒤, 몇 번 백일몽을 꾼 적 있었다.
아직 가족 중 누구도 죽지 않은 때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꿈을.
전장에서 어쩔 수 없이 선잠에 들었다가, 그런 꿈을 꾸면…….
정말로 깨고 싶지 않았었다.
꿈을 꾸면서도, 그게 현실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에 더 그랬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면,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이 다시 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꿈이 아니다. 몇 번 뺨을 꼬집어 봐도 아팠고, 며칠이 지나도 꿈에서 깨지 않았다.
‘너무 좋아!’
그때 옆에서 아빠가 물으셨다.
“아가. 요즘 왜 이렇게 뺨을 자꾸 꼬집는 거지? 여기 예쁜 뺨이 빨개졌구나.”
“그렇네. 우리 딸의 푸딩처럼 말랑보들매끈한 뺨이……!”
“리샤 볼 절대 지켜! 궁의 불러와! 어서!”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너무 기뻐서 꿈이 아닌가 싶어서요.”
물론, 전생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만약 모두 털어놓는다면 이해할 수 없더라도 가족들은 내 말을 믿어 줄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이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보호하려다 위험한 곳에 뛰어들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하고.
내 말에 아빠와 엄마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미안하다, 아가. 엄마가 좀 더 일찍 다 때려 부수고 달려왔어야 했는데.”
“아니야, 이즈. 전부 내가 부족해서 우리 가족 모두가 상처를 받아 버렸어.”
“리샤! 오빠한테 기대! 오빠 품은 언제든 열려 있어!”
달려드는 오빠를 한 손으로 밀쳐 내면서, 나는 환하게 웃었다.
가족들이 슬픈 건 절대 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엄마랑 아빠가 나를 꼭 안고 뽀뽀해 주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자 엄마, 아빠는 다정하게 웃으며 나를 꼭 끌어안아 주셨다.
마지막에는 오빠가 끼어들어 나를 꼭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가만히 있어 주었다.
부드러운 감촉. 따스한 체온.
가족 모두가 모인 평온한 오후.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어쩌면, 이 평온함이 그다지 길지 못할 거라는 걸 이미 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
내 일곱 살 생일 파티로부터 일주일 후 아침.
온 가족이 모인 만찬 자리에서, 아빠는 가볍게 언급하셨다.
“죄인들의 처형이 새벽에 집행되었다는군.”
“그래.”
엄마는 수프에 후추를 치며 담담하게 대답했고.
오빠는 웃으며 은제 포크로 접시를 살짝 두드렸다가 엄마에게 혼났다.
“예의를 지켜야지, 루퍼스.”
“…네, 엄마. 죄송해요.”
나는 어쨌냐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양고기 스테이크 맛있어!’
민트 젤리를 듬뿍 바른 양고기구이를 깨끗하게 먹어 치우고.
달콤한 사과 파이에 아이스크림을 얹은 디저트를 받았을 때.
아빠가 드디어 물어보셨다.
“그러고 보니, 아가. 아빠가 물어보는 걸 잠시 잊었구나.”
“네?”
아빠가 말씀하시기 전까지, 나도 까먹고 있었다.
“오늘 처형된 죄인들의 일 말이다. 세실리아가 혼자 한 일은 아닌 거겠지?”
“……아.”
그러고 보니까 내 생일날 난리가 나는 와중에.
아빠는 이번 일의 뒤에 내가 있는 걸 대략적으로 눈치채신 모양이었다.
세실리아가 내 도움을 받았다고 이미 밝히기도 했고, 다브네스 후작 부인을 몇 년 전 살려 달라고 한 것도 나였으니까.
이미 눈치채고 물으시는데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네, 맞아요.”
아빠는 더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으셨다.
그저, 내가 먼저 말문을 열기를 침착하게 기다리실 뿐.
엄마 역시 다정한 눈빛으로 날 보고 계셨다.
아마 단둘이 계실 때, 서로 이야기를 나누신 모양이다.
엄마는 내 <사일런트 메시지>를 받기도 했었고.
두 눈에 물음표만 잔뜩 띄우고 있는 건, 바보 오빠뿐이었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