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7. 서브 퀘스트 : 짧은 평온 (04)
카스톨트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은 아내의 이런 면에 반했었다는 걸.
그리고 어린 딸은 아내의 강직함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편을 보며, 이젤리아의 입꼬리가 흐무러졌다.
정말이지 늘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 떨어져 있던 남편과의 애정 행각은 잠시 미루기로 했다.
그보다 아이들 쪽이 시급했으니까.
이젤리아는 무언가 단단히 결의를 다지고 있는 듯한 아들에게 다가갔다.
어떤 결심을 하고 있을지 손에 잡힐 듯이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 역시 비슷한 생각 중이니, 당연할까.
“루퍼스.”
“네, 엄마.”
루퍼스리안은 이젤리아의 손에 제 뺨을 비볐다.
재회 후 일주일쯤 지나자 슬슬 자기는 어린애가 아니라고 어른스러운 척하려는 아이지만.
그래도 이럴 때만은 여섯 살 때 헤어지던 날의 모습과 꼭 같아서, 가슴이 아렸다.
“엄마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지? 넌 오빠니까 리샤를 지켜 줘야 한다던 말.”
“네! 리샤는 제가 꼭 지켜 줄…….”
이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단다.”
“……네?”
이건 조금 전 딸의 울음이 그녀에게 준 깨달음이었다.
“그때 엄마가 경솔했어. 그때 넌 겨우 여섯 살이었고, 지금도 열두 살일 뿐인데.”
“……엄마.”
“리샤의 말이 맞단다. 네가 지킬 필요는 없어. 리샤는 엄마와 아빠가 지킬 거고. 너도 엄마와 아빠가 지킬 거니까.”
“…….”
어떻게든 안 울려고 깜빡거리던 소년의 파란 눈에 눈물이 맺혔다.
“너와 리샤는 그냥 행복하기만 하면 된단다. 그거면 충분해. 엄마와 아빠가 둘 다 지켜 줄 테니까.”
“그래, 루퍼스. 엄마 말이, 네 동생 말이 맞다. 자꾸 리샤를 지켜 내려고만 하지 말려무나. 너도 아직 보호받아야 할 나이야.”
등 뒤에서 자신을 껴안는 아빠의 체온에, 루퍼스리안은 다시 아이처럼 울어 버렸다.
부모의 다정하고 따스한 손길과 포옹에 감싸여서.
그리고, 옆방에 누워 있지만, 늘 그를 지켜 주었던 어린 동생의 애정에 감싸여서.
하지만 소년의 여섯 살 시절 결심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무리 부모가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도.
‘리샤는 내가 지킬 거야. 꼭.’
오해와 응어리가 녹아내리고, 가족의 애정을 확인하게 되었기에 더욱, 소년의 결심은 단단해질 수밖에 없었다.
***
가르텐 공작저는 예고된 손님을 맞이했다.
“또 보는군, 가르텐 소공작.”
“저와 경은 그리 친근하게 부를 정도의 친교가 없지 않습니까. 그랑디오르 경.”
바로, 라이언 그랑디오르였다.
그가 평소 교류가 없었던 가르텐에 방문한 이유는 간단했다.
감시역이었다.
가르텐이 신변 보호 겸 감시 중인 ‘손님’에 대한.
그 아이에 대한 감시 겸 보호를 한 가문에만 맡기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며, 가르텐 공작이 직접 황제에게 주청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도 태양의 마력을 발현한 이상, 황위 계승권을 가졌음은 분명하기에.
가르텐과 황위 계승권자가 결탁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자신이 맡게 되었음에도, 맹약을 깰 위험성을 스스로 거론하는 것이 가르텐다웠다.
하여 가르텐에서 에릴을 맡되 그랑디오르에서 주기적으로 가르텐저에 방문해 상태를 확인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앞으로 자주 볼 테니 친해져 보자는 거지.”
라이언 그랑디오르는 씩 웃으며, 영지에 있는 막냇동생보다 어린 코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덕분에 완벽하게 세팅하고 있던 코넬의 검푸른 머리카락이 다 흐트러졌다.
하지만 표정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소년은 거의 제 덩치의 두 배에 가까운 라이언에게 차갑게 항의했을 뿐이다.
“무례하십니다, 그랑디오르 경.”
“아, 소공작님께 내가 너무 무례했나? 하지만 같은 세 공신 가문의 직계에, 나이는 내가 여섯 살이나 많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로 넘기는 겁니다.”
“이크. 조심해야겠군.”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꼬맹이를 보며, 라이언은 과장되게 어깨를 움츠렸다.
코넬은 대놓고 미간을 찌푸린 채, 라이언을 안내했다.
“별관의 객실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의외로 순순히 별관으로 간 모양이군?”
코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날 나도 봤으니까. 우리 태양처럼 귀여우신 황녀님의 탄일 날 말이야. 참 대단한 성격이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하루라도 빨리 처우가 결정되어, 우리 저택에서 나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속마음을 절대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것이 가르텐가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금 코넬은 방금까지 거리를 두었던 라이언에게 거의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어지간했나 봐?”
“……가르텐 공녀의 침실을 내놓으라 아직도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까요.”
“저런……. 고생이겠군, 가르텐도.”
코넬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별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응접용 객실이 모인 별관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방을 차지하고 앉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만나기 위해 말이다.
별관의 하녀들은 피로한 기색으로 두 소년을 맞이했다.
에릴이 머물고 있는 방 앞까지 두 사람을 안내한 하녀 중 하나가 침실 안쪽을 향해 고했다.
“소공작님과 그랑디오르 경이 오셨습니다.”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라이언은 개의치 않고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경악하고 말았다.
“에릴, 양이 맞지?”
“…….”
방 안의 꼴과 에릴의 상태를 확인한 코넬의 눈 역시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의 패악을 차치하고서라도, 상상도 못 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
아멘다가 겉바속촉 꼬맹이로부터 받아 온 편지를 들고 왔을 때.
나는 가족들에게 철통같이 둘러싸여 있었다.
엄마는 아주 자연스럽게 아멘다가 내민 편지를 집어 드셨다.
“이건 무슨 편지일까? 벌써 우리 딸에게 연애편지를 보내는 간 큰 소년이 있는 걸까? 우리 딸은 겨우 일곱 살밖에 안 됐는데 말이야.”
그 말에 내 양옆에 앉아 있는 아빠와 오빠의 눈이 번뜩였다.
지난번 미하일 때보다 어째 더한 것 같다.
“연애편지라니! 어찌 감히 황녀에게 그런 무도한 짓을!”
“반역이에요! 반역으로 다스려야 해요!!!”
아냐. 그거 아니라고. 그만해.
졸지에 나한테 연애편지를 보냈다는 죄로 반역죄 취급을 받게 생긴 겉바속촉을 구해야 했다.
연애편지도 아니고. 반역도 아니니까.
‘그 전에 나는 일곱쨜, 걔는 여덟쨜이라구요!’
“그게 아니라 가르텐 소공작한테서 온 거예요. ‘그 애’ 소식을 간단하게 알려 달라고 내가 부탁했었거든요.”
이 말에 당장에라도 겉바속촉 꼬맹이를 겉도 속도 까맣게 태워 버릴 듯하던 가족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엄마가 건네주시는 편지를 받아 들 수 있었다.
엄마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물으셨다.
“똑똑한 우리 딸. 언제 가르텐의 꼬마를 구워삶았을까.”
구워삶기 전에 자기가 알아서 요리되어서 제 입으로 들어왔던데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냥 부탁했을 뿐이에요. 아무래도 걔가 신경 쓰여서…….”
“착하기도 해라, 아가. 그래도 사촌이라 걱정된 거구나? 세실리아도 황녀궁에서 보호하고 있다고 했고.”
“네! 그리고 아무래도 사교도랑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감시도 겸해서요!”
나는 ‘나 잘했죠?’ 하는 눈빛으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계속 환하게 웃으시던 엄마의 표정이 살짝 굳으셨다.
‘어?’
하지만 곧 엄마는 기대대로 내 보송보송한 곱슬머리를 쓸어내리며 칭찬해 주셨다.
“역시 대단해, 우리 딸.”
“히히.”
그런데 어째 내 뒤통수 뒤로 가족들 사이에 침묵의 시선이 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착각이겠지?
하지만 곧 그게 내 착각이 아니라는 건 이어진 부모님의 말로 증명이 되었다.
아빠가 내 앞에 앉아 가만히 속삭이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아가.”
“네, 아빠.”
아빠의 손 위에 올린 내 손은 비교가 되어서인지 한눈에 보기에도 너무나도 작았다. 아빠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매만지며 조곤조곤 말씀하셨다.
“그래. 내 눈에 우리 리샤는 아직 아기 같단다. 내가 부족했던 탓에 네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너무 무리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구나.”
“아빠…….”
그게 아니라 그냥 내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고.
그 때문에 더 많은 걸 신경 쓰고 꾸미고 있는 거라곤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 최우선 목적이 가족을 지키는 건 맞으니까.’
엄마는 아빠의 말을 이어 속삭이셨다.
“엄마와 아빠는, 우리 아가가 좀 더 우리를 믿고 의지해 줬으면 한단다. 무거운 걸 네 작은 어깨로 전부 짊어지려고만 하지 말고.”
“…….”
“이제 엄마 아빠가 늘 우리 아가 옆에 있으니까. 응?”
“나도! 나도 있어요!”
옆에서 오빠가 바보처럼 끼어들었다.
“그래. 우리 루퍼스도 있지. 우리 사랑스러운 아가들.”
부모님이 뭘 걱정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지는 나도 잘 알았다.
겨우 일곱 살짜리 딸.
특히 엄마 입장에선 태어난 후로 떨어져 직접 돌보지 못했던 아이가 지나치게 어른스럽게 구는 건 안쓰러울 거다.
나에 대한 걱정과 애정을 아는데,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을리 없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 아빠.”
“그러면 우리 딸에게 무슨 편지가 왔나 한번 같이 볼까?”
엄마는 나를 끌어안아 등 뒤를 지키셨다.
내가 편지를 열면 자연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는 각도였다.
양옆에는 아빠와 오빠가 여전히 눈을 번쩍번쩍.
‘원래는 혼자 있을 때 보려고 한 건데…….’
어째 프라이버시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엄마까지 되찾아 완전체가 된 우리 가족이다.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건 당연했다.
사실 나는 어젯밤에도 엄마 아빠 사이에서 오빠랑 같이 잠들었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엄마와 함께 목욕을 했다.
내 시녀들은 그러려니 하며 오히려 부러워했지만, 황후궁에서 온 시녀들은 황공해했다.
지고한 황후와 황녀가 아무런 시중 없이 씻게 놔두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 방기처럼 느껴진 모양이다.
하지만 엄마의 굳은 의지와 신난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일반적인 황가의 예법이 아님은 알고 있었지만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가 머리를 감겨 주시는 손길을 느끼는 건, 정말로 감격스러웠으니까.
그리고 다 같이 모여 아침 식사를 하고. 아빠와 오빠가 나한테 뭘 먹여 줄지 서로 아웅다웅하다가, 엄마에게 진압당했다.
엄마가 달콤한 푸딩을 내 입에 넣어 주시는 티타임이 바로 지금.
정말로, 꿈처럼 행복했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방글방글 떠오를 만큼.
“리샤 웃으니까 너무 귀여워! 더더더 웃어 줘!”
“그래. 우리 아가는 늘 웃어야 해. 물론 행복해서 우는 건 괜찮지만.”
이 분위기에서 갑자기 편지를 들고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 보겠다고 우겨 봤자…… 통할 리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온 가족이 다 보는 앞에서 겉바속촉이 보낸 편지를 열었다.
어차피 어지간한 건 다 말하기도 했고 단순한 보고서에 가까울 거라, 가족들이 봐도 괜찮을 테니까.
그리고 편지의 첫머리에는…….
-존귀하시고, 아름다우시고, 또 사랑스러우신 아나트리샤 황녀 전하의 영광된 이름을 감히 부르옵니다. 부족한 글자를 몇 자 적어…….
“……?”
뭐지? 이 밑도 끝도 없는 찬양은?
나는 잠시 가족들의 눈치를 봤다.
조금 전에 감히 연애편지를 보낸 거냐며 겉바속촉을 잡아다 매달 기세였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놀랍게도 나 외에 아무도 저 말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아니, 오히려.
“확실히 가르텐답게 예의는 있군.”
“당연한 사실을 나열한 것뿐이니까, 별문제 없네요.”
“맞아. 평범한 인사로군.”
……그러니까 저 얼굴이 뜨끈해질 정도로 과한 미사여구와 칭찬들이.
그냥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 팔불출 가족이었던 거다.
그런데 편지를 읽어 내리는 와중에, 의미심장한 사실 몇 가지가 적혀 있었다.
“라이언 그랑디오르가 방문했고…….”
아빠는 고개를 주억거리셨다.
“아, 가르텐의 요청으로 그랑디오르에서도 주기적으로 감시역을 보내기로 했었지.”
나는 아직 그랑디오르가 사교도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다.
‘역시 바로 접근하는군.’
그리고 이어진 편지에는, 나마저도 잠시 아연해지게 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