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7. 서브 퀘스트 : 짧은 평온 (05)
“…….”
“…….”
“…….”
잠시 무서운 침묵이 흐르고.
내 손에 있던 편지가 와작와작 얼어 버리더니, 곧 흔적도 없이 불타 버렸다.
화르륵!
가족들의 분노가 그야말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가족들에게 물었다.
“……지금 내가 본 내용이 맞죠? 눈이 잘못된 거 아니죠? 분명히…….”
다시 확인하고 싶어도 원본이 재가 되어 휘날리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그런데 가족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보다.
“주제도 모르는 게 감히!”
“어디서 내 딸을……!”
“역시 아무리 우리 아가가 선처를 호소해도, 그냥 놔둬서는 안 되었어!”
차례대로 오빠, 엄마, 아빠가 하늘을 찌를 기세로 분노 중이었다.
“흐음.”
대체 얼마나 대단한 꼬라지일지 좀 궁금해질 정도였다.
겸사겸사, 나는 내 장기를 이번에도 쓰기로 했다.
‘이번에도 판을 키워야지!’
그래야 얻는 것도 커지는 법!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환하게 웃으며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엄마! 부탁이 있어요!”
***
라이언은 그랑디오르저로 돌아오자마자, 모친의 명으로 서재에 불려 갔다.
그곳은 소공작인 그의 모친이 집무실로 쓰는 공간이었다.
커다랗고 낡은 책장을 올려다보는 모친의 뒷모습을 보며, 라이언은 새삼스러운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히 내 어머니인데.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이질감이 드는 걸까.
분명히 과거에는 이렇게까지 거리감이 느껴지지는 않았었는데.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적으로 6년 정도 된 것 같았다.
분명히 라이언이 일고여덟 살 때까지는 평범하게 애정과 유대감을 가진 가족이었으니까.
라이언은 복잡한 기분을 숨긴 채, 모친의 명을 기다렸다.
소공작은 아들에게 덤덤하게 물었다.
“그 애는 어쩌고 있던?”
“어지간히 난장을 피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가르텐의 꼬맹이 눈 밑이 시커메졌던 걸요?”
그녀는 낮게 혀를 찼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르텐을 선택한 건지…….”
“한데 어머니. 그 애가 황도로 올라오고 입궁할 때, 우리가 도움을 준 걸 발설하지는 않을까요?”
“걱정할 것 없다.”
소공작은 잘라 말했다.
‘금제는 걸어 두었으니, 발설은 불가능해. 입 밖에 내려는 순간 뇌가 망가지도록 되어 있으니.’
그랑디오르가 홀덴 모녀를 황제 앞으로 데려가면서, 아무런 대비책이 없었을 리 없다.
그리고 당사자들도 이를 알고 있었다. 이미 경고를 해 두었으니까.
홀덴 영애가 처형당할 때까지 그랑디오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못한 게 바로 이 때문이었다.
고문을 못 견뎌 사흘 무렵에 그랑디오르 소공작의 이름을 입에 담으려 했으나, 그 순간 금제가 발동되었던 것이다.
홀덴 영애를 심문하는 이들은 고문의 부작용으로 정신을 놓았다고만 생각했지만.
그러니 에릴 역시 그랑디오르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아무리 철없는 일곱 살이라도 본능적으로 제 목숨은 귀할 터이니.
하지만 이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 라이언은 알지 못했다. 모친이 아들에게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작의 엄명 때문이었다.
“라이언에게는 깊이 말하지 말거라, 절대.”
소공작 로헨 그랑디오르는 부친의 명을 철저히 따랐다.
부친에 대한 애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주군에 대한 충실함에 가까웠다.
때문에 그녀는 아들에게 공작가의 이면에 대해서는 아직 무엇도 알려 주지 않았다.
본인이 적극적으로 묻거나 나서려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런 어머니의 속내를 다 짐작하지 못하는, 라이언은 복잡한 눈빛으로 모친의 등을 볼 뿐이었다.
그랑디오르 소공작은 여전히 뒤돌아선 채였다. 아들에게 표정을 완전히 보여 주고 있지 않았다.
‘역시 어머니는 내게는 다 말해 주시지 않는군.’
라이언은 쓴웃음을 누르고, 쾌활함을 가장하고 물었다.
“그런데 어머니, 제가 보기에 우리 그랑디오르의 목적은 황권을 손에 넣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맞습니까?”
“왜 그리 생각하니?”
“저에게 계속 황위 계승권을 가진 여자애들에게 접근하라 명하고 계시니까요. 처음에는 벨론드 영애. 그리고 지금은 가르텐저에 있는 그 에릴이라는 아이죠.”
속을 읽을 수 없는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소공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틀리지 않구나.”
“하면 저를 황후 자리에 올리시려는 겁니까?”
루스템 제국에서 황후는 성별을 불문하고 황제의 배우자에게 주어지는 호칭이었다.
그러니 여성 황제의 남편 역시 황후라 불렸다.
“…목표 중 하나이긴 하지.”
그 말에 라이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졌다.
세 공신 가문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황후를 낸 적 없었다. 그것이 불문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문율은 결국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다.
소년은 폭탄을 던지듯 물었다.
“그러면 제일 가능성이 높은 쪽에 거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뭐?”
“이미 에아루스가 그쪽에 붙기도 했고. 탄일 날 보시지 않았습니까. 태양석의 빛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말입니다.”
라이언은 활기차게 웃으며, 황궁에 있는 누군가가 들으면 사달이 날 소리를 했다.
“아나트리샤 황녀 쪽이 낫지 않나, 하는 거죠. 물론 황녀가 많이 어리니 10년은 앞선 이야기긴 합니다만.”
“…….”
그랑디오르 소공작의 미간에 미미하게 주름이 졌다.
***
그 시각, 황궁.
오빠와 함께 수업을 듣고 있던 아나트리샤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응? 왜 그래, 오빠?”
“…….”
방금 루퍼스리안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쥐고 있던 깃펜을 부러뜨렸던 것이다.
잉크가 줄줄 새서 종이는 물론 손과 옷깃까지 더럽혀졌다.
루퍼스리안은 손에 묻은 잉크를 불꽃으로 태워 없애 버리면서 중얼거렸다.
“아니, 그게……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이상한 느낌?”
“…격렬한 분노?”
‘누군가’를 깃펜처럼 뚝 분질러 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 치솟았던 것이다.
가공할 만한 성능의 오빠 레이더였다.
하지만 루퍼스리안은 아직 그 이유에 대해서까진 알지 못했다.
***
황도 르펜시아의 사교계가 시끌시끌했다.
어린 황녀의 일곱 살 생일 이후, 모두가 기다리던 화제가 드디어 물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사교 모임에서마다 다들 이 이야기를 떠들기 바빴다.
“황후궁이 열렸다면서요!”
“드디어 황후 폐하께서 티 파티를 여시겠다고, 초대장을 보내기 시작하셨다고 해요!”
“황녀님 탄일에 두 분이 재결합하시고, 한 달째니. 슬슬 사교계 활동을 시작하실 때가 되었죠.”
“세상에! 초대장을 받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텐데!”
그동안 황도 르펜시아의 사교계는 잠시 무주공산이었다.
황후 자리가 6년간 비어 있었고.
그 빈자리를 잠시 세실리아가 메웠었지만, 아주 짧은 군림이었다.
게다가 세실리아마저 몰락한 뒤에는, 사교계를 이끌 마땅한 황족 여성이 없었던 것이다.
황녀가 가장 적절한 위치였지만, 나이가 아직 너무 어렸기에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런데 황후가 돌아왔다. 오래 비어 있던 황도 사교계의 주인 자리가 채워졌으니.
모두의 기대가 한껏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언제쯤 황후궁에서 알현이나 사교 모임이 열릴지, 다들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던 차에 소식이 돈 것이다.
목마른 이들에게 단비가 내린 격이었다.
“그리고 들으셨어요? 이번에 티 파티는 자녀들도 동반 가능하다는 걸요?”
“혹시 사교계 데뷔 전인 아이들도 말인가요?”
“그렇다네요.”
“……그러면 설마, 황자님 황녀님도 함께 참여하시는 걸까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듣기로, 파셀 백작과 친한 부인이 그렇게 말했으니 분명해요!”
파셀 백작 피오나는 황후와 가장 가까운 이들 중 하나다.
그쪽에서 나온 말이라면 틀림없는 정보일 터.
수도 사교계 내에 황자, 황녀와 비슷한 나이 대 아이들을 가진 귀부인들은 눈에 불을 켰다.
‘이번 기회에 우리 아이를 황자님이나 황녀님께 보이고 눈도장을 찍는 거야!’
황녀나 황자 둘 중 한 명이 차기 황위 계승자가 되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에릴의 존재가 있기야 했지만, 아무도 그 아이가 황자 황녀를 제칠 거라 생각지 않았다.
태양석을 빛나게 한 정도도 그렇지만.
모친은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거처조차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다.
방계 황족이라면 뒷배가 탄탄해야 하는데, 에릴에겐 전무하다시피했던 것이다.
반면 황녀와 황자는 이미 마력을 입증한 데다, 황제가 건재했다.
거기에 황후까지 돌아왔고, 황실 일가의 애정은 누가 보아도 돈독했다.
그야말로 탄탄함 그 자체.
때문에 황자나 황녀 또래의 아이를 둔 이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티 파티에 참여하려 했다.
황녀나 황자와 성별이 같으면 친구로, 다르면…… 더더욱 장밋빛 미래를 꿈꾸기 좋았다.
어느 쪽이든 일찌감치 눈에 띄어 두어서 나쁠 게 없었다.
때문에 르펜시아 내의 각종 드레스 샵과 의상점, 액세서리 전문점 등등은 모두 난데없는 호황을 맞이했다.
얼마 전 황녀의 탄일 파티 때에도 엄청나게 돈이 돌았는데.
이번에 또 귀족들이 황후의 티 파티 참석을 위해 돈을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황도의 상인들은 황녀와 황후를 찬양하며 장사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티 파티 당일.
오랜만에 열린 황후궁에 몰려든 이들은, 황족들이 입장하기 전, 경악스러운 모습을 먼저 목도하게 되었다.
“가르텐 공작 부인과 소공작, 그리고…… 손님이십니다.”
가르텐 공작 가문 역시 당연히 초대장을 받고 참석했다.
공작 부인은 황후 또래였고 소공작은 황녀의 또래였으니까.
그러니 공작 부인이나 소공작의 등장은 그리 큰 화제가 될 수 없었다. 가르텐의 명망과는 별개로,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그런데, 뒤에 붙은 애매한 호칭이 이상했다.
“방금 손님, 이라고 했죠?”
“설마…….”
“정말로 왔을까요? 말도 안 돼요.”
술렁거림 속에서, 유달리 기운이 없어 보이는 가르텐 공작 부인과 소공작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에…….
“자, 잠깐……, 지금 내가 본 게 맞나요?”
“분명히, 저 아이는 원래 검은 머리 아니었나요?”
“그랬었어요!”
그런데, 지금 당당하게 소공작의 뒤를 따라 들어서는 소녀, 에릴의 머리 색은 달랐다.
“지금은 금발이잖아요! 게다가, 머리카락을 단발로 잘랐어요!”
모두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황녀는 금빛 단발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