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8. 메인 퀘스트 : 가짜의 가짜는 가짜 (01)
티 파티에 참석한 이들은 하나같이 제 눈을 의심했다.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눈을 비벼 봐도 그 광경은 그대로였다.
다들 경악했으면서도, 쉽사리 입 밖으로 말을 내지 못했다.
너무나도 어이가 없고 무도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말로 소통하지 않더라도 모두의 머릿속에 동일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황녀님을 따라 한 거야?’
이건 억측이 아니었다.
분명히 에릴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검은 긴 머리였다. 그것도 곧게 뻗은 생머리로.
그런데 지금의 에릴은 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르고, 인두로 말아 곱슬곱슬하게 만든 채였다.
황녀나 황제의 붉은 빛이 도는 금색을 염색으로 흉내 내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비슷한 색으로 고른 모양이었다.
누가 봐도 황녀가 떠오르는 모양새였다.
거기에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누군가가 속삭인 말이, 경악 어린 침묵으로 인해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저 드레스도…… 분명히 한 달 전 탄일 연회 때 입고 나오신 드레스를 따라 한 거죠?”
생각지 못하게 가감 없이 울려 퍼지는 제 목소리에, 말한 사람이 더 놀라 멈칫할 정도였다.
거기에 대놓고 긍정의 대답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오늘 에릴이 입은 드레스는 알라나가 특별한 능력을 각성하며 황녀를 위해 처음 만들었다는 그 드레스를 닮았다.
원본의 오묘한 코랄빛과 귀여우면서도 우아한 선, 그리고 특징적인 프릴 장식을 다 따라오진 못했다.
하지만 그걸 본따 만든 물건임은 분명했다.
다들 아연해서 말을 잃고 있는 것을, 에릴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가슴을 곧게 펴고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가르텐 공작 부인이나 소공작보다도 앞장서서.
에릴은 마땅한 지위도 없는 데다 손님으로서 가르텐 공작저에 신세를 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손님이 주인보다 앞장서는 것은 루스템에선 국빈이라도 있을 수 없는 무례.
하지만 에릴은 그런 예의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
“…….”
가르텐 공작 부인이나 코넬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누가 보아도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의 걸음걸이는 점점 더 느려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에릴과 일행이 되고 싶지 않아, 저도 모르게 멀어지려는 마음이 밖으로 드러난 듯했다.
실제로도 코넬은 수치심으로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곧 황녀님이 오실 텐데!’
에릴의 추태를 어떻게든 말려 보려 마지막까지 노력한 것이 코넬이었다.
하지만 에릴은 막무가내였다. 도리어 한술 더 떠서 요구하기까지 했다.
“소공작에게 내 에스코트를 할 영광을 줄게요!”
“……싫습니다.”
“어째서요? 나는 황녀라고요!”
“…….”
이쯤되자 코넬마저 논리적인 설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이 애가 참석을 원하면 막지 말라는 황명이 오지 않았다면……, 절대 이 꼴로 들어오게 두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황실의, 정확히는 황녀의 명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코넬도 공작 부인도 전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그들의 우중충한 표정만으로도, 가르텐 가문이 어떤 봉변을 당하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덕분에, 가르텐 모자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동정심 어린 시선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에릴은 이런 분위기를 알아챌 눈치가 없었다.
아직 어린 탓도 있었고, 홀덴 영애가 오냐오냐만 하며 키운 탓도 컸다.
여러 반대와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도 아이의 작은 가슴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이렇게 하면……, 아바마마께서도 날 인정해 주실 거야! 내가 얼마나 아바마마를 닮았는지 보여 드리면……!’
아이는 자신이 황제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때문에 자신이 내쳐진 이유가, 황제를 닮지 않아서라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그깟 금발 때문이라면, 이젠 그 계집애보다 내가 더 아바마마를 닮았는걸! 이제 아바마마도 인정해 주셔야 해!’
이를 위해 가르텐저에서 에릴은 그야말로 난장을 부렸다.
제 손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잘라서 엉망을 만들고.
하녀들을 닦달하여 염색약을 가져오게 했다.
이를 말리려 들던 하녀들 몇이 큰 화상을 입고 치료를 받는 지경이 되자.
결국 가르텐 공작가도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귀부인들은 너무 놀라고 어이가 없어 어찌 말을 시작할지도 가늠하지 못했다.
상대가 너무 어린 아이이기도 했고.
워낙 상식 밖의 상황인 탓도 컸다.
어른들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아직 사교계식 화법이나 예의를 덜 배운 아이들 사이에서 전혀 걸러지지 않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더없이 솔직하고, 순진하게.
가장 먼저 갸웃거리며 말한 건, 파셀 백작가의 막내 파비엘이었다.
아이는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에릴을 가리키며 제 엄마에게 물었다.
“엄머니. 쩌 애는 왜 항녀님 따라한 거에요?”
올해 겨우 네 살짜리 아이인 파비엘에게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에릴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감히 뭐라는 거야? 누가 누구를 따라 해?!”
에릴은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린 파비엘을 노려보며 외쳤다.
분노 어린 태양의 마력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황녀야! 황녀라구! 황녀는 누구도 따라 할 필요 없어!”
에릴은 진심으로 그리 믿었다.
‘난 그냥 아바마마가 날 알아보시기 쉽게 꾸민 것뿐이야!’
에릴이 누굴 따라 했든 얼마나 무례하든, 그 태양의 마력은 진짜였다.
난데없이 마력의 위협 앞에 노출된 네 살배기 아이는 공포에 질렸다.
“으앙! 으아아앙!”
“피비!”
파셀 백작 피오나는 경악하여 막내아들을 안아 들고 보호했다.
그녀 역시 상당한 수준의 마력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예 마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에릴의 갑작스러운 마력 방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헉! 티 파티 자리에서 갑자기 이 무슨……!”
“누가 좀 말려 봐요!”
수치심으로 어떻게든 멀어지려 하던 코넬은 경악하여 마력을 일으켰다.
“그만하세요, 에릴 양! 황궁에서 마력을 쓰다니!”
코넬 역시 어린 나이에도 상당한 수준의 마력을 가졌던 것이다.
코넬이 뿜어낸 물 속성의 마력이 퍼져, 사방에 위협적으로 뻗어 나가는 에릴의 마력을 막았다.
아니, 막으려 했다.
“큭!”
하지만 불가능했다.
마력의 양 차이와는 상관없이, 태양의 마력은 대부분의 다른 마력을 압도하는 상성을 가졌으므로.
괜히 태양의 마력을 가진 황족이 숭배받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파셀 백작 피오나 역시 바람의 마력을 끌어올렸고.
사방에서 마력을 가진 이들이 힘을 모아 에릴을 진정시키려 애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 이런…!”
“빨리 막지 않으면……!”
이 자리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렇게까지 흉폭하게 휘두르는 마력에 노출되면, 아이들은 더욱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때였다.
후웅!
창문이나 문이 열려 있지도 않은데, 한 줄기 바람이 휘돌았다.
아니, 바람이 아니었다.
강력한 마력의 흐름이었다. 옅게 금색으로 빛나는 마력의 흐름이 홀 안을 한번 훑고 지나가자.
순식간에 사납게 날뛰던 에릴의 마력이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졌다.
“어?”
스스로 마력을 거두지 않았던 에릴은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녀의 마력을 무효화시킬 만한 이는 없었다.
바로 그 순간.
홀 밖에서 경쾌한 시종의 호명이 들려왔다.
“지상에 임하신 태양의 반려, 만월의 수호자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황자 전하, 황녀 전하 드십니다!”
문이 열리고, 홀에 들어서는 세 사람을 보고,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에릴이 마구잡이로 휘두른 마력을 누가 막은 것인지.
그것도 홀 안에 들어서기도 전에 말이다.
황후의 옆에 선 어린 황녀의 몸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 홀 안을 한 바퀴 돌면서 에릴의 마력을 무효화하고 안정시킨 그 마력의 색이었다.
‘황녀님!’
‘세상에 이번에도 황녀님께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 아이가 경기를 일으킬 뻔했는데.’
황후는 흰색의 기사단 제복을 입고, 은여우 모피 망토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제국에서 지낼 때처럼 드레스 차림은 아니었으나, 황후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모피를 걸치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이, 하스티아의 왕족다웠다.
황후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들어서자.
잠시 혼란에 빠져 있던 홀 안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모두가 정중히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지상에 임하신 태양의 반려께 만월의 풍요가 함께하시길.”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달빛을 직접 뵈오니 한량없는 영광이옵니다.”
그리고 그 뒤를, 황자 황녀가 따랐다.
모친을 닮은 은빛 머리카락을 빛내는 미소년인 황자는, 여동생을 에스코트하며 모친의 뒤를 따랐다.
즐거움으로 가득하던 소년의 표정은, 단 한 명의 앞에서는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바로, 에릴.
그 아이 앞을 지날 때였다.
에릴은 멍하니 아나트리샤를 바라보았다.
오빠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모든 귀족들에게 극진한 인사를 받으며 보란 듯 앞을 지나가는 자신과 같은 나이의 아이를.
코랄빛 옷자락을 말아 쥔 아이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째서? 어째서?!’
아이는 지금 자신을 사로잡은 감정이 뭔지 정확히 몰랐다.
그것은 박탈감과 질투심, 열패감이었다.
일곱 살 아이의 눈으로도, 아나트리샤와 자신의 격차가 너무나도 극명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