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6/218)

Level 18. 메인 퀘스트 : 가짜의 가짜는 가짜 (02)

아나트리샤는 생글생글 웃으며 에릴의 바로 앞을 지나갔다.

아이는 황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나트리샤는 에릴을 아예 없는 존재처럼 무시하고 지나갔다.

물결치는 듯한 연하늘빛 치맛자락이 에릴의 드레스 끝자락을 스쳐 지났고.

좋은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주변에서 어린 영애들의 선망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저 드레스도 알라나의 신작인 모양이에요! 마력이 물결치는 드레스라니 너무 멋져요!”

“지난번 황녀님 탄일 드레스보다 더 발전한 것 같죠?”

황녀의 일곱 살 생일 이후, 알라나가 아예 샵 문을 닫고 황녀궁에서 머물며 황녀만을 위해 드레스를 만들고 있다는 건 유명했다.

게다가 하나같이 비단이나 모슬린 같은 일반 천이 아니라, 순수한 마력으로 자아낸 천으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이건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알라나만이 할 수 있는 일.

그전에도 이미 알라나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녀의 드레스 가봉을 받는 건 모든 영애들의 꿈이었지만.

알라나가 각성하고 ‘마력 드레스’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어 내면서, 그녀의 이름값은 하늘을 뚫을 지경이 되었다.

오늘 아나트리샤가 처음 입고 나온 연하늘색 드레스는 한눈에도 알라나의 신작이 틀림없었다.

섬유 한 올 한 올에까지 마력이 흐르는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마력을 가진 이들은 더더욱 이 드레스의 귀함을 잘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에릴 역시.

“…….”

찌익.

부들부들 떨리는 작은 손 안에서 가르텐저의 하녀들을 닦달하여 만들게 한 드레스 자락이 찢겨 나갔다.

에릴 자신의 눈에도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아나트리샤의 모습에 비하면 지금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한 번 입은 옷을 얼기설기 따라 한 드레스는 원본에 비하면 한참 못 미쳤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나트리샤의 붉은빛이 감도는 금빛 고수머리가 마치 에릴을 비웃는 듯 살랑거렸다.

지금 황녀의 머리카락은 생일 파티 때와 다른 스타일이었는데.

평소처럼 몽실몽실한 단발로 둔 것이 아니라, 곱게 양쪽으로 땋아서 각각 동그랗게 틀어올려 귀여운 양의 뿔처럼 만들었다.

붉은 광택이 도는 금빛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루비와 진주를 엮어 땋아 놓아서, 햇빛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더없이 고귀해 보였다.

당연히 에릴이 염색하고 스타일을 따라 한 머리는 원본 앞에 빛이 바래 버렸다.

모든 것이 어설펐다.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에릴의 귀에 내리꽂혔다.

“꽤 용쓴 모양이지만 역시 황녀님의 저 오묘한 적금발과는 비교도 안 되네요. 황제 폐하를 꼭 닮은 머리 색과는 말이에요.”

“당연하죠. 애초에, 황제 폐하의 핏줄도 아니니.”

“차라리 자기 원래 머리 색을 유지하는 게 나을 뻔했어요. 적당히 귀염성 있는 아이였는데.”

“뭐, 어린아이들이 동경하는 분을 따라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죠.”

“하긴 우리 아이도 지난번 탄일 때 황녀님 옷과 머리를 보고 따라 하고 싶다고 얼마나 떼를 썼는지 몰라요.”

“하긴 지난번 황녀님이 입으셨던 코랄빛 드레스는 벌써 엄청나게 유행 중이죠.”

“지금 이 자리에 비슷한 색감과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은 아이들만 수십은 될 거예요.”

그들의 말 뒤에는 한마디가 생략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대놓고 똑같이 따라 한 옷을 입은 건 한 명뿐이지.’

사방에서 차가운 비웃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에릴은 저들이 자신을 비웃는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굴욕감에 온몸이 떨려 왔다. 하지만 아이는 이게 굴욕이라는 것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억울하고 또 억울할 뿐.

‘왜, 왜 이러는 거야? 왜 아무도 나에게 친절하지 않아? 내가 이렇게 노력했는데, 나를 칭찬해 주지 않는 거야? 왜?’

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그때였다. 그제야 에릴을 발견한 듯, 아나트리샤의 청보라색 눈동자가 천천히 이쪽을 향했다.

***

내가 지난번에 에릴을 두고 웃기는 짬뽕이라고 했었나.

정정하겠다.

저 애의 별명은 정해졌다.

‘따라쟁이? 아니, 짝퉁, 짝퉁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려나.’

겉바속촉 꼬맹이에게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경악했다.

그야 당연했다.

-에릴 양이 황녀님의 귀엽고 사랑스럽고 태양의 조각처럼 찬연히 빛나는 머리카락을 따라 하려는 것 같습니다. 금발로 염색하고 단발로 잘랐으며……, 알라나의 드레스와 비슷한 드레스를 만들도록 하녀들을 닦달하고 있습니다…….

전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내가 황당해 있는 사이, 가족들이 먼저 분기탱천해서 편지를 얼리고 태우고 재까지 날려 버렸다.

오빠는 당장에라도 물고를 내야 한다며 길길이 날뛰었는데.

“리샤가 자비롭게 대해 줬더니,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생각은 달랐다.

소식을 들었을 때, 좀 어이가 없긴 했지만, 진지하게 화가 나진 않았다.

‘그야 쟨 진짜 일곱쨜이잖아.’

열네 살인 세실리아에게도 진지하게 화내자니 좀 민망했는데.

일곱 살 꼬맹이를 상대로 진지하게 화내고 상대할 리 있겠나.

하지만 그건 짝퉁이를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것과는 별개 문제였다.

처음부터 내가 짝퉁이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아빠에게 청한 이유가 그거였으니까.

‘짝퉁이는 미끼야.’

짝퉁이는 사교도가 공들여 만들어 낸 인공적인 각성 황족이다.

아마도 처음 목적은 저 애를 이용해 우리 가족을 흔드는 것이었을 텐데.

그 시도가 무산되었다고 해서, 음모를 얌전히 접을 리가 없었다.

‘놈들은 세상을 멸망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을 테니까.’

다음 음모는 당연히 저 애를 통해 시작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짝퉁을 옆에 두고 자극하는 게 나아.’

이성을 잃고 분노할수록, 돌발행동을 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저 애가 큰 사고를 칠수록 그 뒤에 있을 사교도를 끌어낼 수 있다.

짝퉁을 자극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자기가 황녀라고 굳게 믿고 있는 상태니,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알아서 폭발해 줄 거다.

‘그럼 저 애의 분노와 공격이 나에게만 집중되겠지. 그 뒤를 따라올 사교도 놈들의 공격도.’

그래야 최대한 빨리, 효율적으로, 무엇보다 가족들의 안전을 지키면서 일을 해결할 수 있다.

가족들이 내 진짜 의도를 안다면, 화를 낼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아빠도, 엄마도, 오빠도.

나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으니까.

‘하지만…, 난 가족들을 지키고 싶은걸. 게다가, 난 짱 세다구!’

시스템 정보창에 레벨 99가 번쩍거리며 빛나고 있지 않나.

나는 자신이 있었다.

‘쟤가 뭔 짓을 해도 끄떡없으니까 괜찮아!’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졸라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핑계는 다른 걸 댔지만 말이다.

“엄마! 리샤 기분 나빠요! 쟤가 진짜 리샤 따라 했는지 보고, 진짜면 혼내 주고 싶어요!”

그리고 짝퉁이 낚시는 정말로 쉬웠다.

조금 건드리니까 파르륵 타오른다.

내가 해맑게 웃으며 다가가 짝퉁에게 말을 건네자, 곧바로 예상한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안녕, 에릴! 잘 지냈어? 다시 보니까 반가워.”

“……아니, 난 잘 못 지냈어.”

옆에서 겉바속촉 꼬마가 끼어들었다.

“에릴 양. 예의를 갖춰야 합니다. 황녀 전하께는 말을 높이셔야 합니다.”

“나도 황녀니까 그럴 필요 없다구!”

짝퉁은 발칵 화를 냈다.

이건 좀 짜증이 났다.

아무리 일곱 살짜리 어린애라지만, 자신을 계속 황녀라고 주장하는 건, 아빠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이니까.

‘우리 아빠는 불륜 안 했단 말이야! 여전히 엄마밖에 모르는 아빠라구!’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황녀가 아니야. 계승권이 있는 황족이 맞기는 하지만.”

“아냐! 아냐! 아니라구!”

그때였다.

에릴의 말을 부정할 가장 큰 자격이 있는 사람의 말이 들려온 것은.

“넌 황녀가 아니다. 아무리 어린애라 하나, 황녀를 사칭하는 것은 반역죄로 다스려도 모자란 중죄지.”

아빠가 성큼성큼 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아바마…….”

아빠가 대놓고 말했는데도, 에릴은 유일하게 남은 동아줄을 보는 것처럼 아빠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아바마마’라 부르며 매달리려다가…….

아빠의 살기 어린 시선에 다시 굳어 버렸으나.

그야말로 불굴의 의지로 떨리는 입을 애써 움직였다.

자랑하듯 한 자리에서 빙글 돌며, 제 모습을 아빠에게 보인다.

“아, 그, 아! 에, 에릴을 봐 주세요! 이제 저 아바마마와 닮지 않았나요?”

이제야 알겠다.

쟤가 굳이 나를 따라 한 이유를. 자신이 아빠와 닮지 않아서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린애다운 착각이라 할 만은 했지만.

쟤가 하는 짓은 우리 가족이 용납할 수 있는 선을 계속 넘고 있었다.

아빠는 경멸 어린 눈으로 어색하게 나를 따라 하려다 실패한 짝퉁이의 모습을 위아래로 바라보다가.

더 참지 못하고 선을 명확하게 그으셨다.

“아니. 너는 나와 닮을 일이 없다. 내 자식이 아니니. 차라리 네 아비 벨론드 백작의 무덤에 가서 닮지 않았느냐며 묻도록 해라.”

“……!”

“어린아이라 하여 봐주는 것도 한도가 있다. 또 감히 황녀를 사칭하거나 짐을 아바마마라 부른다면, 죄를 물을 것이다.”

짝퉁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 아빠의 명령을 정면에서 거부할 용기까진 없었던 모양이다.

에릴에게서 고개를 휙 돌린 아빠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서 나를 안아 들고, 엄마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엄마의 뺨에 키스하며, 오빠의 머리를 쓰다듬는 멀티 플레이를 보여 주셨다.

“한창 정무 중이어야 하는 거 아냐?”

“오늘 분은 마무리해 두고 왔어. 당신이 귀환하고 여는 첫 사교 행사인데, 나도 참여해야지.”

아빠는 더없이 다정하게 우리 가족을 보듬으셨다.

떨어진 곳에서, 짝퉁이는 우리 가족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에 젖어 있던 아이의 눈은 곧, 박탈감과 증오심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짝퉁이를 좀 더 자극하려는 찰나였다.

오빠가 옆에서 심술궂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빠. 저 애에게 명확하게 황족의 신분을 안 내리셔서 자꾸 주제를 모르고 나대는 것 같아요. 아니면 자기 신분을 헷갈릴 정도로 멍청하든가. 확실하게 해 주시는 게 낫지 않아요?”

“……그렇구나.”

아빠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선언하셨다.

“죽은 벨론드 백작의 사생아가 태양의 마력을 각성했으니, 전례에 따라 벨론드의 성을 내리고 황위 계승권을 인정한다. 에릴 벨론드에게 황족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며, 성인이 되면 외가인 홀덴 백작위를 잇게 하겠다.”

이건 무엇보다 명확하고 공개적인 선언이었다.

황족임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해 주겠지만.

‘너는 황녀가 아니다.’라는.

아이는 망연한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어? 이러면 짝퉁이의 원한이 나에게만 집중되지 않게 되는 거 아냐? 그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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