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7/218)

Level 18. 메인 퀘스트 : 가짜의 가짜는 가짜 (03)

하지만 내 걱정이 기우였음은 곧 분명해졌다.

아빠와 오빠의 연달은 공격에 상처받은 아이의 분노가, 난데없이 나한테 튀었던 거다.

짝퉁이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부터 켜져 있던 <궁예> 스킬의 부가 효과가 짝퉁이의 생각을 손금처럼 훤히 알려 준다.

[짝퉁: ‘저것 때문이야! 저게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렇게 된 거야! 아바마마도, 오라버니도……!’]

[짝퉁: ‘저것만 없어지면 내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거야!’]

‘……근데, 얘 속으로 말할 때는 자기를 에릴이라고 안 부르네.’

그냥 평범하게 ‘나’라고 한다.

지금까지 말하는 걸 보면, 주로 자기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만 스스로 ‘에릴’이라고 칭하는 것 같았다.

‘귀여운 척 컨셉이었던 건가…….’

나중에 크고 나면 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흑역사가 될 텐데.

내가 이런 걸 한가하게 걱정해 주고 있을 때가 아니긴 했다.

어쨌든 나한테 불똥이 튀는 건 오히려 좋았다.

저 애의 모든 분노와 공격을 나에게 집중시키는 게 목표니까.

아이의 주홍색 눈동자가 증오와 질투심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조금 안도하는 한편으로 씁쓸해졌다.

저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기분이 거슬리고, 또 불안해졌다.

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이 닮아서, 계속 소피아를 떠오르게 만드니까.

전생에 내가 믿었고, 그래서 모든 걸 잃게 만든 원흉인 성녀 소피아.

그러나 내 불안함과 달리 저 아이의 모든 행동이 본인이 소피아가 아니라고 알리고 있었다.

‘소피아라면 절대 이렇게 간단하게 넘어오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 불안감의 원인은 분명했다.

이번 세계에도 어딘가에 소피아는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을 거란 확신 때문이다.

하지만 전생과 다른 게 하나 있었다.

‘이번엔 절대 날 배신하지 못 할 거야. 소피아.’

믿지 않는데 배신당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우리 가족을 해치지도 못할 거고.’

***

“흑, 흐윽. 으허어엉!”

황후궁 정원의 구석에서 에릴은 홀로 서럽게 울었다.

끝끝내 누구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호의를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 티 파티의 주인공은 이번에도 황녀였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못되고 밉살스러운 애였다.

‘내 생일 때도 모든 관심을 다 빼앗아 갔으면서!’

지금도 아나트리샤는 홀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들의 모든 관심과 호의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황제가 워낙 차갑게 대했기에 황족들의 자리 가까이 갈 엄두는 전혀 내지 못했고.

자신을 보호해 줘야 할 가르텐 공작 부인과 소공작은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 외에는 모두 대놓고 적대적이거나 비웃는 말들뿐.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저렇게 철이 없어서야…….

“동갑인 황녀님은 저렇게 의젓하신데.”

“태양의 마력도 가지지 못했던 벨론드 백작의 사생아잖아요. 어쩔 수 없는 거죠.”

“주제도 모르고 스스로 황녀라고 주장하다니, 얼마나 거슬렸는지.”

“아까 마력을 휘두르는 거 보셨어요? 우리 애가 얼마나 놀랐는지 경기를 할 뻔했다니까요.”

“그나저나 역시 황자님이나 황녀님 근처에 가기는 어렵네요. 꼭 우리 딸을 황녀님 배동으로 들이고 싶었는데.”

결국 에릴은 쫓겨나듯 정원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울며불며 제가 입은 옷자락을 쥐어뜯었다.

마력으로 강화된 손가락 힘에 얇은 비단과 레이스가 엉망으로 찢겼다.

북, 찌익!

신경질적인 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이깟 드레스! 이런 것 따위! 누가 널 따라 했다는 거야!”

억울했다.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하고…….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러웠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이의 뇌리에 조금 전 아나트리샤 황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제의 품 안에 보란 듯 안겨 뽐내면서 하던 말이.

“아. 맞다. 에릴. 선물로 저번에 내가 입은 그 드레스를 보내 줄게. 지금 네가 입은 거랑 아주 비슷한 그거 말이야.”

“……뭐?”

“입어 보고 싶었으면 말하지 그랬어. 얼마든지 선물로 줬을 텐데!”

그 한마디에 에릴은 그저 황녀의 옷을 입어 보고 싶어서 따라 한 하찮은 애가 되고 말았다.

너무 억울했지만 그 자리에서는 항변하지 못했다.

황제와 황자의 차가운 외면과 목소리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에릴은 뒤늦게 아무도 없는 정원 구석에 분노를 토해 냈다.

“하나도 안 부러워! 하나도 안 부럽다고! 나도, 내가 황녀인데…… 왜!!”

감정이 격해지자, 다시금 아이의 마력이 제어를 벗어나 날뛰려 했다.

바닥의 잔디와 정원수 위로 불꽃이 튀었다.

그대로 놔두면 황후궁 정원에서 화재가 벌어지려는 찰나였다.

후웅.

바람이 불었다.

에릴이 일으킨 불꽃 주변을 바람의 결계가 감쌌다. 덕분에 화재는 옆으로 번지지 않았다.

쾌활한 소년의 목소리가 에릴의 뒤통수를 잡아챘다.

“진정해. 황궁 방화범이 될 셈이야? 아무리 황족이라도 용서받기 힘들걸.”

황급하게 고개를 돌린 에릴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붉은 머리의 키 큰 소년이 아이를 보며 웃고 있었다.

“라이언!”

에릴은 우는 얼굴로 웃으면서 달려가서, 소년의 무르팍에 매달렸다.

이제야 제 편을 만난 것처럼.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아까 걔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내가 자기를 따라 했대!”

“……그래?”

“내 편을 들어 줬어야지! 내가 걔를 따라 한 게 아니라, 걔가 날 따라 한 거라구! 라이언이 옆에서 말해 줬어야지!”

아이는 마구 억지를 부렸다.

라이언은 빙긋 웃으며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에릴은 살짝 웃다가, 다시 입가를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르텐저에서는 왜 나한테 그렇게 뭐라고 했었던 거야? 라이언이랑 소공작님은 내 편이잖아. 내 말을 들어 줘야지!”

“어쩔 수 없었어. 가르텐의 꼬맹이가 계속 감시하고 있었는걸.”

라이언은 어린아이를 꾀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라이언은 코넬과 함께 에릴의 침실에 들어갔다가, 기함할 광경을 보았다.

에릴이 아나트리샤를 따라 머리를 염색하고 단발로 자른 걸 처음 본 게 그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염색된 머리 색이 마음에 안 든다며 패악을 부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이런 게 아니라 좀 더 붉은색이 도는 금발이라구! 황제 폐하랑 똑같은! 더 예쁜 색이어야 한단 말이야! 너! 지금 일부러 내 말 안 듣는 거지?!”

“악! 아, 아가씨! 놔주세요!”

“아가씨라니? 닥쳐! 난 황녀야! 황녀란 말이야!”

코넬과 라이언은 에릴을 말리고, 머리가 다 쥐어뜯기는 하녀를 구해 주었던 것이다.

그때 한 소리를 들은 것이 지금까지도 억울했던 모양이다.

‘정말이지 어이없는 꼬마야.’

그는 속내를 숨긴 채,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미안해, 에릴. 많이 속상했나 보네.”

라이언의 입에서 나온 사과에 에릴은 헤죽 웃었다.

힘없는 하녀 외에 에릴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고, 잘못을 사과해 주는 건 라이언뿐이었다.

‘나한테도 내 편이 있어! 오빠같은 라이언이 있다구! 그랑디오르 공작가의 후계자가!’

“사과했으니까, 용서해 줄게.”

“감사합니다, 황녀님.”

라이언이 장단을 맞춰 주자, 에릴의 기분이 단번에 풀렸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아이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황녀에 대한 분노.

자신에게 험담을 한 귀족들에 대한 불만.

왜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황제와 황자에 대한 원망.

라이언은 끝없이 이어지는 하소연을 한 귀로 흘리면서, 은근히 물었다.

“그나저나 에릴. 우리 어머니에게서 편지가 왔다거나 따로 전해 주신 말은 없으셨어?”

“소공작님에게서?”

에릴은 곰곰이 생각해 보고 고개를 저었다.

“……없었어. 엄, 아니, 홀덴 영애와 황궁으로 갈 때, 절대 그랑디오르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 외에는.”

“……그래?”

라이언이 그랑디오르 소공작에 대해 언급하자, 에릴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왜 소공작님은 내 편을 안 들어 주시는 거야? 소공작님이 아바마마께 나를 황녀로 인정해 달라고 해 주셔야지!”

“…….”

“그래야 내가 황녀님이 될 수 있을 텐데!”

“……내가 다시 어머니께 말씀드려 볼게.”

“진짜? 꼭 말씀드리는 거다?”

라이언은 에릴과 손가락을 걸고 약속까지 해야 했다.

“다시 홀로 돌아갈래?”

“……아니. 거기엔 다 나쁜 사람들밖에 없어. 아. 아바마마랑 오라버니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러면 가르텐저로 돌아갈래?”

“……응.”

그 외에 지금 에릴은 갈 곳이 없었으니까.

라이언은 잔뜩 흐트러진 에릴의 단발머리를 대충 정리해 주고 당부했다.

“그리고 잘 알지, 에릴? 우리 가족은 네 편이야.”

“으응. 알아.”

라이언의 낮은 목소리가 은밀하게 울렸다.

“…에릴. 혹시 어머니가 너에게 뭔가를 시키거나 부탁하시면, 꼭 나에게 말해 줘야 해?”

“……왜? 그리고, 라이언은 에릴이 말해 주기 전에 아는 거 아니었어? 소공작님이 먼저 알려 주실 것 같은데.”

“그건 내가 에릴 편이라서 그래. 어머니보다 더.”

“에릴의… 편이라서?”

“응. 나는 소중한 동생 같은 에릴이 위험해질까 봐 걱정되거든. 혹시라도 어머니가 그런 부탁을 하실까 봐 그러는 거야.”

“……그러면, 라이언한테만 살짝 말해 줄게. 어떻게 알려 주면 돼?”

“그냥 내가 또 방문할 때 알려 주면 돼. 만약 급한 소식이면 별관의 하녀들 중 로나라고 있지? 그 애에게만 살짝 말해 줘도 되고.”

“응. 알았어.”

“꼭 말해 줘. 내가 도와 줄 수 있을지 모르니까.”

라이언의 신신당부에, 에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아마도 자신이 타고 온 가르텐저의 마차로 가서 당장 돌아가자고 난리를 피워, 사용인들을 곤란하게 할 것이다.

라이언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배웅하면서도, 자신의 마차를 대신 내주겠다거나 바래다주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이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고 나자.

소년의 한숨이 밤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하아.”

그때였다. 쥐 죽은 듯 고요하던 정원 구석에서 난데없이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우와. 어린애 잘 꼬드기네.”

“……!”

경악하여 뒤돌아본 라이언의 앞에는, 아무도 없던 자리에 갑자기 나타난 소녀가 서 있었다.

아나트리샤는 태양처럼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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