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8. 메인 퀘스트 : 가짜의 가짜는 가짜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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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과 짝퉁이의 대화를 엿듣게 된 건, 반은 노린 거였고 반은 얻어걸린 거였다.
‘짝퉁이만 감시하고 있었는데 라이언까지 걸릴 줄이야.’
<인비저블 아이>는 황궁 안이라면 내가 원하는 어떤 곳이든 감시가 가능했다. 황궁이라면 내가 보지 못한 곳은 없으니.
물론 한 번에 한 곳만 볼 수 있고 재사용 대기 시간도 있으니, 모든 곳을 감시하진 못하지만.
짝퉁이가 정원으로 나가는 걸 보고, 근처 길목을 감시해서 어디로 가는지를 확인하는 건 쉬웠다.
그런데, <인비저블 아이>가 잡아낸 것이 짝퉁이의 움직임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라이언 그랑디오르!’
라이언이 짝퉁이가 간 방향으로 향하는 걸 보고, 나는 살짝 홀을 빠져나왔다.
대충 화장실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은신의 호흡>으로 기척과 모습을 숨긴 채 따라붙자, 짝퉁이와 라이언의 대화를 거의 다 들을 수 있었다.
‘내 편이니 황녀님이니 뭐니 아주 난리도 아니었지.’
아마 조금 전 대놓고 짝퉁이가 ‘황녀가 아니다’라고 선언한 아빠가 들었으면, 불벼락이 내렸으리라.
하지만 그걸 가지고 화낼 생각은 없었다.
‘너무 티가 날 정도로 애를 구슬리고 있는 게 보였는걸.’
결정적으로.
‘그리고, 자기 모친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지 짝퉁이를 통해서 알아내려는 것 같았고.’
역시, 라이언 그랑디오르, 전생의 하무현 본인은 사교도와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조금 올라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뻤다.
전생에 나나 우리 가족과 좋은 인연이었던 사람들과 적이 되는 건 내키지 않으니까.
‘물론 만일 이게 다 연막일 뿐, 적이 된 게 확실하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지만.’
어쨌건 어느 정도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라이언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우와. 어린애 잘 꼬드기네.”
“……!”
라이언의 초록색 눈동자가 홉뜨였다.
전생까지 합치면 꽤 오래 알아 왔지만, 그때도 저렇게 놀라는 건 거의 본 적 없었다.
신선해라.
“……황녀, 님?”
내가 기억하는 전생의 하무현보다 훨씬 어려서인가. 빈틈이 좀 더 많았다.
늘 유들유들하게 웃으면서 속내는 잘 안 드러내던 사람인데.
“우리 서나, 나는 오빠라고 안 불러 주는 거야? 내가 서운이보다 두 살이나 형인데.”
“어디서 오빠 소리를 들으려고 하고 있어! 서나 오빠는 나 하나거든?”
곤란한 질문을 할 때면 솜씨 좋게 말을 돌려 버리곤 했었지.
그러고 보면, 그때도…… 하무현은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는 일부러 피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지금 그랑디오르가 사교도와 연관 있는 것과 연결된 문제일 수도 있겠네.’
확실한 건 단 두 가지였다.
라이언은 요주의 인물이라는 것.
동시에, 사교도와 연관이 있을 확률은 낮아졌다는 것.
‘그렇다면, 확정을 짓고 싶어.’
겨우 열네 살짜리면서, 라이언은 빠르게 놀란 표정을 갈무리했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께서 이런 외진 곳까지 홀로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 파티의 주인은 엄마이신걸. 잠깐 산책 나오는 정도는 괜찮아!”
물론 오늘 티 파티가 내가 엄마를 졸라서 열린 건 맞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나저나, 왜 그랑디오르의 후계자가 파티장엔 오지도 않고 정원 구석에서 에릴이랑 노닥거리고 있었을까?”
“그랑디오르의 후계자는 제가 아니라 어머니시죠. 저는 그저 잘 모르는 어린애에 불과합니다.”
“그으래? 여기에는 라이언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꼬마가 있는데.”
나는 짐짓 ‘리샤는 일곱 살 뿌우’ 모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꼬마의 질문을, 왜 무시할까? 리샤는 상처받았어.”
‘흥핏칫’ 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자, 라이언은 웃음이 터지는 걸 참지 못했다.
“푸하핫!”
“왜 그렇게 웃어?”
뭐야?
이 표정 우리 가족한테는 직방이란 말이야!
“그야 깜짝 놀랄 만큼 사랑스러우시면서도……, 동시에 너무 안 어울리셔서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논지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능글능글하게 빠져나가려고 하고는 있는데, 전생에서 워낙 자주 겪어 봐서 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왜 이런 구석에서 짝, 아니, 에릴이랑 비밀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건데?”
너 아직 대답 안 했다.
게다가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나 엄마도 오늘 그랑디오르 가문이 입궁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구. 초대장까지 보냈는데도 거절해 놓고는.”
라이언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역시.”
“뭐가 역시인데. 그리고 왜 자꾸 말 돌려!”
라이언은 고개를 쑥 숙였다. 덕분에 코앞까지 얼굴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 정도 움직임도 못 읽을 정도로 약하진 않으니까.
오히려 라이언이 딱 여기까지만 접근할 거라는 걸 알고 가만히 있어 준 거였다.
“…….”
여전히 속을 알기 어려운 표정으로 나를 뜯어보던 라이언은,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님. 아까 에릴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보통 일곱 살들은 이런 상황에서 상대가 말을 돌리고 있다는 걸 잘 알아채지 못한답니다.”
“나는 보통 일곱 살이 아닌걸. 루스템의 혈통이라 이거야.”
라이언은 피식 웃으면서 적당히 대꾸했다.
“에릴이 너무 마음이 상한 것 같아서요. 조금 달래 주려고 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편을 들어 준 것뿐이죠. 절대 황녀님이나 황실에 반할 생각은 없었답니다.”
형식적인 변명이지만, 누구라도 그럴 법하다고 생각할 이야기기도 했다.
“그 애랑은 어떻게 친해진 거야? 지금 에릴은 가르텐저에 머물고 있는데.”
“…그랑디오르는 그 아이에 대한 감시역도 맡고 있으니까요. 어머니께서 그나마 나이가 비슷한 저를 편하게 여길 것 같다며 보내신 덕에, 제법 친해졌지요.”
유들유들, 능글능글.
진짜 중요한 말은 한마디도 내놓지 않고 빠져나가려는 것이 꼭, 미꾸라지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미끌미끌한 놈에게 작살을 던지기로 했다.
“그래? 그런데 왜 에릴한테 네 어머니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를 물어보는 거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겉바속촉만 포커페이스인줄 알았는데, 얘도 만만찮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포커페이스 따위 다 뚫어 버리는 스킬이 있었으니.
몇 번의 실패 행진 끝에 조금 전에 막 성공한 <궁예> 스킬 부가 효과가 미꾸라지의 단단하고 매끌매끌한 방어막을 콱 뚫어 버렸다.
[라이언: ‘……그것까지 눈치챌 줄은 몰랐는데. 정말 일곱 살이 맞는 건가?’]
나를 잠시 미심쩍은 눈으로 보던 라이언이 솔직하게 물었다.
“……외람되지만 진짜 일곱 살 맞으십니까?”
이번만은 속과 겉이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높이를 맞춰 숙이라는 뜻이다.
물론 마력으로 날아오르는 건 숨 쉬듯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보단 저쪽이 맞춰야지.
눈치 빠른 라이언은 다시 고개를 숙여 나에게 귀를 가져다 댔다.
나는 소곤소곤 속삭였다.
“어떻게 알았어? 나 사실, 속은 서른 살 넘었거든.”
“…….”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라이언은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며 웃었다.
“농담에도 소질이 있으시군요.”
“글쎄.”
당연히 안 믿을 거라고 생각하고 한 말이었다.
[라이언: ‘어린애랑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오히려 의심이 가셨다. 너무 터무니없다 보니 꼬맹이가 하는 헛소리로 치부해 버린 모양이다.
나는 헤죽헤죽 웃으면서, 결정타를 날렸다.
끝까지 중요한 대답은 하나도 안 해 준 능구렁이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질문을.
“네 집안의 진짜 정체, 알고 싶지 않아?”
“……!”
[라이언: ‘……뭐라고?’]
***
라이언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 전이었다.
아이는 헤죽 웃더니, 빙글 돌았다. 그리고 마력을 펼쳐서는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뒤늦게 손을 뻗어 봤지만 머리카락 한 올도 잡지 못했다.
“황녀 전하!”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마치, 단 한 번도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은 것에 대한 벌이라도 되는 것처럼.
라이언은 경악과 당혹감 속에서 한참 동안 정원에 혼자 서 있었다.
***
‘헹! 어디 한번 애타서 속 썩어 보라구!’
이제 내가 다시 연락을 하거나 말을 걸었을 때.
라이언은 또 미끌미끌 빠져나가지 못할 거다.
그랬다간, 이번처럼 자신이 원하는 정보 또한 듣지 못할 테니까.
말하자면, 나는 버릇을 고쳐 준 셈이다.
거기까진 다 좋았는데, 다른 문제가 조금 있었다.
‘늦었다! 엄마랑 오빠가 기다릴 텐데!’
라이언이 이리저리 피해대기만 하는 통에 생각보다 늦어졌다.
‘엄마랑 오빠가 내가 변비인 줄 오해하면 어떡해!’
유모랑 시녀들은 한참 대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일 것이다.
“리샤 부끄러우니까 소리 다 막아 놓을 거야!”
-라고, 늘 혼자 있거나 은밀한(?) 시간에는 결계를 치고 있으니 당연히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내가 안에 있을 줄 알고, 그냥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재빠르게 돌아가려는 차였다.
막 <은신의 호흡> 스킬을 쓰기 직전,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황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