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8. 메인 퀘스트 : 가짜의 가짜는 가짜 (05)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더니,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가르텐 소공작?”
“……여기, 계셨군요. 황녀님.”
자기가 나에게 말을 걸어 놓고, 스스로 놀란 것처럼.
소년은 멍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목이 아래쪽부터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곧 새빨갛게 되어 버린다.
얼굴은 놀랄 만큼 멀쩡한데, 목만 빨갛다.
그리고 속마음도 아주 빨갛게 시끄러웠다.
[코넬: ‘홀에 안 보이셔서 혹시나 하고 나와 본 건데 정말로 만날 줄은…….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옷매무새를 챙기는 건데.’]
[코넬: ‘내가 지금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코넬: ‘언제 뵈어도 늘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사랑스러우셔. 태양처럼 반짝반짝……. 단둘이서 뵙게 되다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늘 그렇듯 속과 겉이 일관되게 다른 꼬맹이다.
언제 봐도 신기해라.
우물쭈물하면서도 꼬맹이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명백하게 나에게 용무가 있는 것 같아서 물어봤다.
“혹시 나 찾아다닌 거야?”
“……네. 사죄를 드리고 싶어서요.”
감정을 표정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겉바속촉이, 드물게 우울한 티를 냈다.
“무슨 사죄?”
“에릴 양이 조금 전 황녀님께 저지른 무례에 대해서 말입니다.”
“응? 그치만 그걸 왜 소공작이 사과해? 소공작은 그 애랑 아무 상관이 없잖아.”
“……손님의 실수는 곧 주인의 실수니까요.”
코넬은 내 앞에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아니야. 오히려 내가 미안한걸.”
“예?”
코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여덟 살 꼬맹이답게 꽤나 귀염성이 있었다.
“그 애는 내 사촌이기도 한걸. 가르텐 가문에 맡겨서, 괜히 소공작이랑 공작 부인이 고생 중인 것 같아서.”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겉바속촉은 꽤 기뻐 보였다.
이번만은 표정과 속마음이 비슷했다.
[코넬: ‘아아. 황녀님이 나를 걱정해 주시다니. 이대로 죽어도 좋아…….’]
아니, 조금… 다른가?
아주 살짝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정도의 표현과 달리, 속마음은 기쁨의 탭댄스를 혼자 추고 있었으니까.
‘능구렁이 백 마리 잡아먹은 놈이랑 얘기하다가 얘를 보니까…… 좀 귀엽네.’
능구렁이나 짝퉁이를 보다가 이 애를 보니 마음이 아주 편했다.
그래서, 겉바속촉이 불쑥 한 요청을 나는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저어, 황녀님. 홀까지 제가 에스코트해드리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음, 그래!”
겉바속촉이 내민 손은 긴장 어린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나는 홀로 돌아가기 전에, 대기실로 가서 유모와 시녀들을 안심시키고.
다시 코넬의 손을 잡고 홀로 향했다.
유모와 시녀들은 눈에 불을 켜고 겉바속촉을 소리 없이 감평했다.
아직 <궁예>가 켜져 있어서, 그녀들의 속마음이 시끄럽게 메시지로 떠올랐다.
[엘제: ‘우리 황녀님이 벌써 황자님 말고 다른 소년의 에스코트를 받다니? 어, 언제 이렇게 크신 거지? 감동… 이긴 한데, 조금 쓸쓸해. 황녀님은 평생 내 눈에 아기님인데!’]
[모냐: ‘아닛! 가르텐 소공작이? 감히 우리 황녀님의 에스코트를 하는 영광을 누리다니! 아, 그런데 소공작의 예복과 황녀님의 드레스가 색이 안 맞아!’]
[셀리나: ‘나도! 나도 황녀님 에스코트으-!!!’]
[아멘다: ‘혹시 가르텐도 맹약을 깨고 황녀님의 편을 들기로 한 건가? 하지만 가르텐 공작도 소공작도 그럴 성격으론 안 보였는데…….’]
정상적인 반응은 유모 빼고는 아멘다뿐이다.
아멘다를 보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멘다는 이번 생에는 아직 대장장이 일이나 연금술사 일 하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단순히 전생에 나와 만났을 때보다 어려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번에는 최대한 빨리 언니가 아스트라를 개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해.’
사교도놈들의 위협이 예상보다 코앞에 다가와 있으니까.
아스트라의 필요성은 더 커져 있었다.
하루빨리 손에 넣어야 한다.
이제 저주에서 벗어나 몸을 회복하고, 황녀궁 생활에 적응하는 건 끝났을 테니.
슬슬 아멘다의 대장장이+연금술사 각성 이벤트를 벌여 봐야겠다.
요즘 알라나는 엄청난 기세로 마력 드레스를 비롯한 각종 방어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전생과 비교해도 엄청난 속도.
‘거기에 아스트라까지 갖춰지면, 사교도 놈들을 쳐부수는 것도 문제없을 거야!’
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에 젖어, 겉바속촉의 에스코트를 받아 홀로 돌아왔다.
“오. 황녀님께서 돌아오셨어요.”
“어? 가르텐 소공작이 황녀님의 에스코트를 하고 있네요?”
“하긴, 황녀님의 에스코트는 황자님이 아니면 두 공작가의 공자들은 되어야 격이 맞겠죠.”
“혹시 에아루스에 이어 가르텐까지 황녀님을 택하는 걸까요? 불문율을 또 깨면서?”
“그럼 설마 역사상 처음으로 즉위 전부터 세 공신 가문 중 두 가문의 충성을 받은 황제가 나올지도…….”
“이렇게 되면 그랑디오르만 남게 되겠네요.”
웅성거림이 번져갔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리샤!”
기린이 될 지경으로 목을 빼고 나를 기다리던 오빠가 도끼눈을 하고 달려왔던 것이다.
***
루퍼스리안은 모친의 옆자리에서 목이 빠져라 동생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돌아온 동생의 옆에는 짜증 나는 혹이 붙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짜증 나는데 귀부인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세상에. 정말이지 귀여운 한 쌍이네요.”
“맞아요. 나이도 딱 맞고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물론 공신 가문 직계라는 건 좀 그렇지만요. 전례가 없지 않나요?”
누군가가 듣고 눈에 불을 켤 말이었지만.
객관적으로 사실이긴 했다.
올해 여덟 살 소년과 일곱 살 소녀.
그야말로 소꿉놀이처럼 귀여운 한 쌍이 아닌가.
어른들처럼 의젓하게 굴려는 게 티 나서 더 앙증맞은.
다들 엄마 미소 아빠 미소를 떠올리는 사이에서, 한 명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적개심과 경계심으로.
‘분명히 저놈, 가르텐 소공작이라고 했었지!’
황자의 명석한 머리는 딱 한 번 보았던 소년에 대한 걸 전부 기억했다.
그랑디오르 공작의 손자와 함께, 아나트리샤의 티타임에 초대받았던 아이.
‘게다가…… 저 녀석 저번에 주제도 모르고 리샤에게 얼굴을 붉혔어!’
루퍼스리안의 예민한 오빠 레이더는, 소년의 포커페이스를 뚫을 정도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건 지금도 유효했다.
매의 눈으로 살피자, 동생의 손을 잡은 소년의 손이 긴장으로 달달 떨리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잡아챘다.
‘어딜 감히!’
루퍼스리안은 황족의 마력과 뛰어난 신체 능력을 십분 활용했다.
단번에 동생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번 라이언과 코넬에게 했던 것처럼, 대놓고 시비를 걸거나 손을 빼앗아가지는 않았다.
동생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이다.
‘우리 리샤 앞에서는 든든하고 멋지고 착한 오빠가 되어야 한다구!’
그저 코넬을 없는 존재처럼 무시했을 뿐이다.
코넬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는데도.
“가르텐의 코넬이 황자 전하를 뵙습…….”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아나트리샤에게만 시선을 고정하며 말을 걸었다.
“리샤! 오빠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목이 길어질 지경이었다구.”
그러면서 손을 내미는 행동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동안 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모님의 품에 안겨 있을 때가 아니면, 아나트리샤의 에스코트는 늘 루퍼스리안의 몫이었으니 당연했다.
“아, 오빠! 기다리게 해서 미안. 엄마는 어디 계셔?”
“저기 파셀 백작이랑 이야기 중이셔.”
덕분에 아나트리샤는 자연스럽게 코넬의 손을 놓고, 루퍼스리안의 손을 잡았다.
루퍼스리안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황자에게 무시당하고 황녀의 손도 빼앗긴 코넬은, 순식간에 버려진 강아지처럼 축 처졌다.
루퍼스리안은 아주 자연스럽게 동생과 코넬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에스코트를 맡은 사람이 바뀌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두 소년만은 그 의도가 뭔지 명백히 알 수 있었다.
“…….”
잔뜩 풀이 죽은 여덟 살짜리 소년과, 그 아이를 견제하는 열두 살짜리 황자.
물론 신분도 나이도 마력도 상대가 안 되지만, 오빠의 경계심은 진심 100%였다.
그때였다.
코넬이 쓸쓸하게 물러나려던 찰나.
아나트리샤가 오빠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에스코트 고마웠어!”
“……영광이었습니다, 황녀 전하.”
이번만은 코넬은 표정을 다 감추지 못했다.
소년은 홀린 듯 한참 동안 황녀가 사라진 자리에 못 박혀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
티 파티가 끝난 이틀 뒤.
라이언 그랑디오르는 전혀 예상 못 한 장소에서, 예상 못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황녀… 전하?”
“안녕.”
사실 마지막 대화를 생각하면 작은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되는 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다.
하지만 이 장소는 정말로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르텐저에는 대체 왜 또 어떻게 오신 겁니까?”
아나트리샤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