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30/218)

Level 18. 메인 퀘스트 : 가짜의 가짜는 가짜 (06)

라이언의 말대로 그들이 황녀의 탄일 연회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곳은 가르텐저였다.

라이언은 이미 몇 번 와 봤다는 이유로 가르텐 소공작의 안내를 거절하고서.

혼자 별관의 에릴에게 향하던 중이었다.

바로 그 때였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갑자기 황녀가 나타난 것은.

무슨 수를 써서 여기 나타난 거냐는 라이언의 질문에, 아나트리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대답 바라고 한 질문이야?”

진짜 대답을 바라고 하는 질문이면, 너무 양심이 없는 거라고.

아나트리샤는 대놓고 비난 중이었다.

그러자 라이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씁쓸한 미소.

“……정말 혹독하시네요. 단 한 마디도 편하게 대답을 내주시는 법이 없으시니.”

“지금 자기소개 하는 거야?”

아나트리샤는 생각했다.

솔직히 그건 라이언이 더 심하지 않나?

대놓고 질문해도 기름칠한 것처럼 요리조리 다 빠져나갔으면서.

물론, 지금은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본인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문제의 대답을, 내가 알려 주겠다고 한 거니까.’

게다가 운만 떼 놓고 도망쳐 버려서는, 약을 올려 놓기까지 하지 않았나.

아나트리샤는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은 다문 채.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황녀의 예상대로 라이언이었다.

“지난번에 저희 가문의 정체를 알고 싶지 않냐고 하셨던 건 무슨 의미이십니까?”

“말 그대로야. ‘방패의 그랑디오르’가 가면을 벗기면 어떤 모습을 숨기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냐는 거지.”

“……저는 그랑디오르의 직계입니다.”

“그래. 하지만 에릴 같은 아이를 통해 네 모친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아내려고 할 정도로, 네 부모와 가문에 대해 모르고 있기도 하지.”

“…….”

한 방 먹은 듯, 라이언은 침묵했다.

조금이지만 통쾌했다.

아나트리샤는 검지를 들어 올려서 휘휘 흔들면서 말했다.

“대출혈 서비스로, 무릎 한 번만 꿇으면 특별히 얘기해 줄 수도 있……어?”

털썩.

아나트리샤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라이언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무릎을 꿇었다.

“엥?”

“꿇으면 말씀해 주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엔 아나트리샤가 놀랄 차례였다.

“날 어떻게 믿고 그렇게 척척 무릎 꿇는 거야? 내가 진짜 알 거라고 생각해?”

“제가 황녀님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라이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황녀님이 절대 평범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요.”

“글쎄. 루스템의 혈통이 다 그런 건 유명하지 않나.”

“그중에서도 황녀님이 특별하신 건 누가 봐도 분명합니다. 저 벨론드 영애나, 에릴조차도 루스템의 혈통인 건 사실이니까요. 두 사람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황자님조차 황녀님 정도는 아니셨습니다.”

아나트리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특별하고 뛰어나니까 내 말도 전부 진짜일 거라고 믿는 거야? 너무 섣부르지 않아?”

“그럴 리가요.”

라이언은 환하게 웃었다.

“그보다는…… 제 무릎 정도면 아주 싼 대가니까요.”

“그랑디오르 직계의 무릎인데?”

“…그 그랑디오르의 명예가 과연 제 무릎이나 목숨을 걸고라도 지킬 만큼 가치가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은 거니까요.”

“흐음…….”

“무엇보다, 가문의 일원인 저조차 몇 년이나 걸려서 가지게 된 의구심입니다. 그걸 확신하고 계신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라이언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황녀님은 모르실 겁니다. 제가 태어난 세상과 혼자 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아군인 셈이니까요.”

“내가 아군이라고 그렇게 쉽게 믿어도 돼?”

“그럼 대충 비슷하다고만 해 두죠.”

그러니까 진짜로 믿지는 않는다는 거다.

아나트리샤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너 진짜 열네 살 맞아?”

“……황녀님이야말로 하실 말씀이 아닌 듯합니다만.”

“…….”

아나트리샤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 맞다. 지금 내 나이는 일곱 살…….’

라이언이랑 서로 꼬리를 잡으려고 말싸움을 하다 보면.

자꾸 까먹게 되어서 큰일이다.

‘전생에 무현이랑 말싸움하거나, 같이 오빠 놀리던 때가 생각나 버려서.’

오빠인 안서운보다 무현이 연상인데도, 서나가 그를 이름으로 불렀던 이유는 간단했다.

‘오빠’의 ‘오’자만 나와도 안서운이 길길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아나트리샤는 추억에서 빠르게 빠져나왔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지만.

100% 신뢰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 마지노선은 등 뒤에 놔둔 채로, 라이언을 탐색하는 중이었다.

[라이언 : ‘정말로 황녀가 내 의문을 해소해 줄 수 있을까? 만일 정말 그게 가능하다면…….’]

적어도 지금 라이언의 말과 태도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운을 뗐다.

“혹시 자살희망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이언은 진심으로 당혹스러워 했다.

스킬이 보여 주는 그의 속마음도 똑같다.

하긴, 의아할 만하긴 했다. ‘자살희망’이라는 단어부터가 일반인들로서는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사고방식이니까.

아나트리샤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어차피 멸망해야 할 세상이니 곱게 죽는 게 신과 인류를 위하는 길이라는 인간들. 그렇다고 해서 자기들만 손잡고 죽겠다면야 조금 나은데, 다른 엄한 사람들까지 싹 함께 데려가려는 인간들은?”

“…….”

라이언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겨우 황녀에게 되물을 수 있었다.

“설마…… 그게. 저희 집안의 숨겨진 정체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나트리샤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라이언을 관찰하고만 있을 뿐.

***

시스템 메시지가 우르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라이언 : ‘그랑디오르에 대해 말해 주겠다더니, 저게 무슨 말이지? 인류를 멸망으로 몰고 가려는 미친놈들이, 내 가족이라고?’]

[라이언: ‘설마 지금 황녀는 어머님과 아버님, 조부님까지 전부 그 미치광이 집단의 일원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

[라이언 : ‘그럴, 그럴 리가…… 아니, 아니…….’]

그의 동요는 드물게도 겉과 속으로 동일하게 드러났다.

속내를 감출 여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자기 가족이 다 같이 죽자고 외치는 미친 사교도 집단이라는 데, 당황하지 않으면 그게 인간이겠는가.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라이언은 비상한 머리로 이 뭉뚱그린 설명을 온전히 이해했고.

[라이언; ‘나는 우리 가족이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나? 확언할 수 있나?’]

라이언은 충격의 와중에도 객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았다.

[라이언: ‘……아니었으면 좋겠군. 제발.’]

이 경우, ‘그랬으면 좋겠다,’는 곧 ‘아니다’와 동의어였다.

그랑디오르 가문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당연히 라이언이 나보다 훨씬 잘 알 것이다.

그런 그가,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간 나름대로 쌓인 의심의 단초들이 꽤 있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라이언: ‘……절대 찬성하거나 따를 수 없는 미친 생각이야.’]

[라이언: ‘그래서였나. 어머니도 조부님도 나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계속 받았던 건.’]

[라이언; ‘6년 전쯤부터 나와 가족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틈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게…….’]

라이언의 표정은 더없이 복잡했다.

당연했다.

지금의 그는 겨우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자신의 가족들이 그렇게 미친 작자들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그동안 홀로 쌓아 둔 의심도 만만치 않게 깊었다는 것 또한 느껴졌다.

나는 살짝 등을 밀어주기로 했다.

내가 기억하는, 전생의 ‘하무현’을 위해.

“어떻게 생각해? 너도 저 ‘이상’에 동의해?”

라이언의 표정이 혐오감으로 일그러졌다.

“이상이요? 그런 걸, 어떻게 이상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제야 겨우 확신할 수 있었다.

라이언 그랑디오르는, 그의 현재 가족이 어떠하든.

내가 기억하는 하무현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경악과, 고통, 슬픔 등이 소년의 표정과 마음속을 빠르게 흩뜨려 놓고 사라졌다.

그리고 놀랄 정도로 빠르게 라이언은 평정을 되찾았다.

“……그런 건 미친 자들의 광기에 불과합니다. 그게 누구든, 절대로 현실로 만들려 노력하게 놔둬서는 안 되는 것이죠.”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 정리하듯, 스스로 의견을 명확하게 세우고 있었다.

곧, 라이언은 선명한 초록색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황녀님께서는 왜 이걸 저에게 알려주신 겁니까?”

“왜일 거 같아?”

나는 팔짱을 끼며 도리어 물었다. 

그는 자신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황녀님께서는, 그들을 막으시려는 겁니까?”

나는 환하게 웃었다.

“응! 그딴 미친놈들한테는 매가 약이라구!”

라이언은 쓰게 웃었다.

그 미친놈들이 본인의 가족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한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식으로.

“저, 라이언 그랑디오르가 황녀님께 맹세합니다. 그들이 정말로 그러한 추악한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면…….”

이것은 라이언의 마지막 희망일 것이다.

혹시라도 아니라면, 아니길 바라는 마지막 마음.

“……그리고, 황녀님께서 그들을 막으려 하시는 한, 저는 황녀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나는 손을 내밀었고.

라이언은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랑디오르의 직계가 내 손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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