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8. 메인 퀘스트 : 가짜의 가짜는 가짜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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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이 적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걸 넘어서, 그의 충성 맹세까지 받았다.
전생의 하무현을 떠올리면 충성 맹세니 뭐니 하는 건 좀 낯간지럽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이제 꽤 패가 모인 것 같네.’
에릴을 자극하는 것.
라이언을 손에 넣은 것.
둘 다 의도한 바였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목적.
그랑디오르에 숨어 있을 사교도의 본체를 끄집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결국 이 모든 건 지금까지 중 가장 규모가 큰 낚시질.
‘여기에 마지막 패만 갖춰지면 돼.’
오랜만에 혼자 보내는 개인적인 시간에 이 마지막 패를 완성할 예정이었다.
개인적인 시간이래 봤자 그냥 자는 시간일 뿐이지만.
‘하지만 요즘은 잘 때도 개인 시간 내기 진짜 힘들단 말이야.’
완전체가 된 이후, 우리 가족은 정말 한시도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 나 혼자서만 뒷공작을 벌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온갖 꼼수와 시간을 짜내어야 혼자 움직일 수 있었다.
“우리 숨바꼭질해요! 너무 좁으면 재미없으니까 범위는 황궁 전체로!”
“리샤는 졸려서…… 잠깐만 낮잠 자고 올게요.”
등등등.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이었다.
그나마 이젠 슬슬 가족들도 우리가 모일 수 있게 된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전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이 날 수 있었다.
그래 봤자 잘 때뿐이긴 하지만.
이게 어디인가!
엄마와 아빠는 황후궁으로 함께 가셨고.
오빠는 쫓아내 보았다.
“오빠 궁으로 좀 가서 자! 그러다가 궁인들이 주인 얼굴 까먹겠다!”
“히잉. 하지만 리샤. 오빠는 침대 아래에 괴물이 숨어 있을까 봐 무서운데…….”
호적 메이트의 당치 않은 애교는 나에게 당연히 극혐의 표정을 불러일으켰다.
내 표정을 보고 오빠는 빠르게 무리수를 포기하고 자기 궁으로 돌아갔다.
“내일 아침에 보자, 리샤! 내일 리샤 머리 묶는 건 내가 해 줄 거야!”
“알았어.”
“자, 잘 자 뽀뽀!”
“……에휴.”
“리샤 한숨 너무 귀여워어…….”
오빠놈의 뺨에 ‘잘 자 뽀뽀’를 해 주고.
내일 아침 내 머리 묶어 주는 걸로 타협을 해 보내고 나서야.
겨우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 힘들었다.’
오늘 밤.
사교도의 본체를 뿌리 뽑을 수 있는 제일 중요하고, 강력한 패를 손에 넣을 것이다.
시스템 창을 켰다.
[스킬 명 : <용언의 붉은 언약(S급)>]
[설명 : 용들은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걸고 절대 어길 수 없는 약속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마지막 후예인 나스카의 왕은 일생에 단 한 번 이 맹약이 가능합니다. 당신에게 목숨을 맡긴 언약입니다. 당신이 그에게 죽음을 명하면, 단번에 그의 목숨이 끊깁니다.]
[효과 : 스킬 적용 즉시 상대방의 죽음.]
[*사용 횟수 (0/1)]
스킬 설명창을 키자, 내 왼손 약지에 나에게만 보이는 붉은 색 리본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이름도 그렇고, 스킬 활성화하려고 하면 붉은 리본이 생기는 건지…….’
여러모로 찜찜하지만, 어쨌든 포기할 수는 없는 스킬이다.
다시 마왕 소환의 매개가 될 가능성이 있는 미하일의 목숨 줄을 내가 쥐고 있는 거니까.
물론, 지금 이 스킬을 활성화시켰다고 해서, 바로 쓰려는 건 아니다.
‘한 번밖에 못 쓴다는 제약도 있지만 그 이전에, 쓰면 무조건 죽으니까.’
이걸 쓰는 건, 미하일이 이번에도 나를 배신하고 마왕이 되는 것이 확실해진 뒤다.
그때에는 망설일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런데, 왜 이걸 지금 활성화시키고 있는가, 하면…….
일단, 나는 <사일런트 메시지>로 그를 불렀다.
-미하일.
그리고.
내 예상과 다르게 밤의 어둠 위로 비친 달빛 속에서 어둠이 피어올랐다.
“어?”
스아아.
낮은 바람 소리와 닮은 소음이 울리고, 어둠과 달빛이 뒤엉킨 혼란 속에서.
소년의 형체가 마침내 형태를 갖추었다.
전보다 더 하얘진 듯한 얼굴이 도드라진다.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 흔들렸다.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자, 기이한 금빛 눈동자가 밤의 공기 속에서 요요하게 빛났다.
소년은 해맑게 웃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황녀님.”
“……뭐야?”
“당신이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맞긴 했다.
<사일런트 메시지>로 그의 이름을 한 번 불렀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나타나다니?
“아니, 이름만 불렀거든? 오라고 하기 전이었거든?”
“……그럼 다시 갈까요?”
이렇게 되묻는 미하일은 조금 풀이 죽어 보였다.
귀나 꼬리가 있다면 축 처졌을 거다. 정말 안 어울리지만.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리고 오라고 하기 전이었다는 말씀은, 결국 저를 이곳으로 부르실 생각이셨던 것 아닙니까?”
맞는 말이긴 했다.
나는 <사일런트 메시지>로 미하일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하지만, ‘오라’고 하기도 전에, 이름만 불렀다고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곧장 튀어올 줄은…… 몰랐지.
내 표정에서 그 황당함을 읽은 것인지, 미하일은 푸스스 웃었다.
“이제야 겨우 당신께서 불러 주셨으니까요.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 않아 달려왔답니다.”
“원래 나스카인들은 이렇게 갑자기 그림자에서 슥 하고 나타나는 게 특기야, 설마?”
“그럴 리가요. 밤과 달빛을 이용해서만 가능하고, 제한도 여러 가지로 많습니다. 일족 중에서도 저만 사용 가능한 능력이죠.”
“나스카의 성은? 설마 그것도 끌고 온 건…….”
또 그랬다간 아빠랑 오빠가 난리를 칠 텐데.
혹시나 하고 창밖을 보았지만 그 거대한 성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성까지 한 번에 이 정도 거리를 움직이는 건, 지금 제겐 무리니까요.”
미하일은 여전히 웃으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면 이제 인사를 마저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
나는 조금 미묘한 기분이 되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미하일은 내 손등에 두 번 키스를 했다.
촉, 촉.
어쩐지 기시감이 들어 떠올려 보니 코넬과 라이언이 입맞추던 게 떠올랐다.
위치도 같은 것 같기도……. 에이, 손등 인사가 다 거기서 거기겠지, 뭐.
그보다, 내 손에 닿은 미하일의 피부가 많이 차가웠다.
그러고 보면, 얼굴도 유달리 창백해 보이고 살도 좀 내린 것 같았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니, 아니다.
지금 내가 한가하게 이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나는 슥 손을 잡아 뺐다.
그러자 미하일은 내 왼손을 보며 물었다.
“저를 부르신 건, 제 목숨을 지금 거두시기 위해서인가요?”
내 왼손 약지의 붉은 리본이 그에게도 보이는 모양이다.
하긴, 이 리본은 <용언> 스킬의 증표.
그리고 저 스킬은, 그가 나에게 준 것이다.
원래 그의 것이니 보이는 게 당연하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그냥…….”
“그냥?”
미하일이 고개를 까딱하는 움직임이 애교 부리는 것처럼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일부러 더 소리를 낮추어 위협적으로 대꾸했다.
“……그냥 협박용으로 활성화해 둔 거야.”
말 안 들으면 네 목숨이 간당간당하다고 말이지.
미하일은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그냥 명만 하시면 충분한 것을.”
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따위로 말하니까 더 믿기 힘들어. 대체 누가 상대방이 시키는 걸 아무런 조건 없이 들어주겠어.”
“…….”
“뭔가 꿍꿍이가 있지 않는 한.”
미하일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시다면 황녀님이 마음 편하게 명하실 수 있게 해 드리죠. 황녀님께서 제 목숨을 두 번 구해 주셨고, 제가 이미 목숨을 한번 드렸으니……. 그 계산에 따라 한 번은 어떤 명을 하셔도 전부 따르겠다고 말씀드리면, 좀 믿으실 수 있을까요?”
나는 팔짱을 꼈다.
“부족해!”
“……네?”
“목숨 한 번 구해 준 보답이 소원 한 번 들어주기라니, 너무 쩨쩨해!”
“그럼…… 두 번?”
“두 번은 너무 정 없어!”
“……세 번으로 하죠.”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해야지!
“하면 어떤 것을 명령하실 것인지 궁금하군요.”
소년의 나이에 맞지 않는 미소를 보며, 나는 헤죽 웃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할 겸 물었다.
“너 어디까지 기억해?”
“…….”
내내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던 미하일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
“…….”
미하일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좀 확인을 해야겠어.’
앞으로 내가 할 일에 미하일의 도움은 필수지만, 이건 그를 믿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라이언 때처럼, 미하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예상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내 예상이 어디까지 맞는 건지 확인은 하고 넘어가야 했다.
미하일의 목숨이라는 마지막 안전선은 내 손안에 있지만.
여전히, 시스템은 나에게 재촉하고 있었으니까.
[완료해야 할 퀘스트가 있습니다.]
[당신의 맹세를 지키세요.]
그를 죽이라고.
침묵이 더 길어지려던 찰나.
마침내 미하일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