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2/218)

Level 18. 메인 퀘스트 : 가짜의 가짜는 가짜 (08)

 한참의 망설임 끝에 미하일이 내놓은 대답은 내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절로 눈가가 치켜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실재하는 물건도 아니면서, 붉은색의 리본이 내 움직임을 따라 한들거렸다.

“말 안 하면 여기서 그냥 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

“당신 뜻대로 하시면 그만이지요. 당신께서 구해 주신 목숨이시니.”

이 자식이!

어디서 배짱을 부려!

“내가 못 할 거 같아?”

“그럴 리가요. 아직도 당신께 맞은 양 뺨이 아프답니다.”

미하일은 그렇게 말하며 꽃처럼 웃었다.

당연히 <궁예> 스킬은 미하일에게는 통하지 않고.

나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왼손 손가락에 매달린 붉은 리본을 매만지며 물었다.

“아니. 너는 대답을 해야 해.”

“죄송하지만, 대답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금지되어 있습니다.”

금지같은 소리 하네. 핑계가 뻔했다.

놈은 고장 난 시스템 같은 말만 반복했다.

“내가 너를 한 번 구해 준 대가로 세 번의 소원을 약속한 것도, 넓게 보면, 그 용언의 맹약 영향하에 있어.”

“……궤변이라는 건 아시죠?”

아니! 모르는데!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애초에 그럴 거면 어떤 명령이든 따르겠다는 소리를 하지 말든가!”

놀랍게도, 서약의 주체인 미하일의 저항보다 내 우기기가 더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두 번 목숨을 구해 준 대가 중 한 번을 소원으로 대체한다.’

-라는 조건에 아까, 미하일이 동의한 것이 중요한 근거가 되어 주는지.

내 왼손 약지에 걸린 붉은 리본이 지직거리며 흔들렸다.

동시에 그와 나 사이에 붉은색의 스파크가 오갔다.

용언의 제약이 미하일에게 작용하는 모양이다.

내 말을 거부할 수 없도록.

나는 한 발 나서며 강하게 명령했다.

“말해!”

“…….”

안 그래도 창백하던 미하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얼마 전까지 관 속에 시체처럼 누워 있던 애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하지만.

내가 이런 걸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결국 미하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뗐다.

그리고.

“▩$#▤䷙※∞∴ʭʦʤЖ㏙.”

“……?”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마치, 에러로 전부 깨져 내용을 알아볼 수 없는 시스템 정보 창처럼.

이 자식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 건가?

“너……!”

하지만 내가 미하일에게 뭐라고 하기 전.

“컥!”

미하일은 피를 토하며 허리를 구부렸다.

붉은 피가 꽃잎처럼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꽤 익숙한 광경이었다.

‘또?’

***

다행히 미하일은 지난번처럼 기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불치병 걸린 여주인공처럼 가련하고 처연하게 피를 토한 뒤.

나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피부와 대조적으로 입가에 흐른 핏자국이 유달리 가슴을 찔렀다.

“…….”

내가 억지 부려서 애가 고생 중인 것 같은데…….

좀 양심이 찔리…….

‘아니! 난 양심 같은 거 없다고! 그런 거 찾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쿨럭! 쿨럭!”

미하일은 피를 토하면서도 몇 마디 말을 더 내뱉었으나.

“%^*@&;%, 쿨럭!”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소용이 없었다.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나한테 말하는 게 금지되어 있다는 거지? 네 의사와 상관없이.”

끄덕끄덕.

미하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가 한계인 모양이다.

‘대충 시스템이 나한테 사교도 관련 정보 주려고 할 때 에러 나는 경우가 잦은 거랑 비슷한 건가.’

어쨌든 이것 자체로도 어느 정도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하나. 미하일에게 완전하진 않아도 전생의 기억이 일부 있기는 하다.’

이건 지난번 미하일과 처음 재회했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던 부분이다.

대놓고 티를 냈으니, 모를 수가 있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 건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둘, 그리고 적어도 지금은 미하일은 나에게 적대할 의사가 없다.’

자기 목숨줄을 나에게 맡긴 걸 보면 확실했다.

이름 한 번 불렀다고 이렇게 튀어온 걸 봐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언가의 제약에 걸려 있다. 행동에도, 나에게 할 수 있는 말에도.’

그건 즉, 미하일이 나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나 방해에도 제한이 걸려 있다는 소리였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을 보니, 나는 조금 미안해져서, 손수건을 그에게 내밀었다.

“자, 닦아.”

“감사합니다.”

미하일은 손수건을 두 손으로 받아 들더니 그대로 곱게 내려놓고는 자기 옷으로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닦으려고 했다.

“하, 하지 마!”

“아, 이걸 닦으라는 말씀이 아니셨나요?”

아니, 그렇게까지 냉혈한으로 보여?

방금 피 토한 열몇 살짜리한테 바닥 핏자국까지 지우라고 할까?

그리고, 아무리 전생을 조금 기억한다지만 얜 왕자씩이 되어 놓고는 왜 그렇게 비굴한 거야?

‘아니, 내가 구박한 것도 아닌데, 왜 혼자 구박을 당하려고 해?’

어쨌든 잠시 해프닝이 있은 후.

나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현재의 미하일은 적이 아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나를 도울 의사가 있다.’

이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물론 이 사실이 나중의 일까지 확정지어 주는 건 아니다.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까.’

의심과 경계를 거둘 생각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원하는 건, 미하일만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머지않아 미하일에게서 이번 ‘낚시’에 가장 중요한 도움을 전부 얻어 낼 수 있었다.

‘좋아. 준비는 다 끝났네.’

그리고.

“그럼 이만 물러가지요. 필요하시면 또 불러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며 밤의 어둠과 달빛 속으로 녹아드는 미하일의 뒷모습에서.

나는 그의 왼손 약지에 매달린 분홍색 리본을 보고 말았다.

‘저건!’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저건 분명 내가 미하일에게 시원하게 두 방을 날리고.

그를 살려서 돌려보낸 그때, 매고 있었던 리본이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하지만 그 리본에 대해 내가 묻기 전, 미하일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나는 잠시 흔적조차 남지 않은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

미하일과의 비밀스러운 만남이 있은 지 약 2주 뒤.

나는 오빠와 함께 피오나 이모의 저택에 방문했다.

지난번에 황후궁에서 엄마가 귀부인과 아이들을 초대해 티 파티를 연 이후.

황도의 귀부인들 사이에 아이들을 대동한 파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교계에 나가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미리 인맥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긴 귀족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엄마 아빠에게 졸라서, 오빠와 함께 파셀 백작저에서 열리는 가든파티에 깜짝 방문했다.

당연히 피오나 이모는 반색하며 달려와 우리를 맞이했다.

“세상에. 이리 직접 왕림해 주시니 더없이 영광입니다. 황자 전하. 황녀 전하.”

“안녕하세요. 항녀님. 항자님.”

피오나 이모 옆에서 꼬까옷을 차려입은 피비가 씩씩하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 피오나 이모. 안녕, 피비.”

나는 이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피비의 통통한 볼을 콕콕 찔러 보며 즐거워했다.

예상치 못한 초유의 사태에 아이들을 데리고 참석한 귀부인들이 열광했다.

“세상에, 파셀가의 파티에 황자님 황녀님이 직접 오시다니!”

“황궁 파티 때는 초대 받지 못해서 뵙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길 줄이야!”

“지금 황녀님이 입으신 드레스, 알라나의 신작 맞죠? 어쩜. 모든 드레스가 알라나의 신작이라니……,”

“파셀 백작이 황후궁의 새 시녀장으로 유력하다던 소문이 헛것은 아닌가 보네요. 과연…….”

우리의 깜짝 방문을 놓고 사방에서 의미를 해석하고, 정치적인 구도를 계산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지금 손님 중에 분명히…….”

약간의 걱정이나 우려 섞인 말들이 오고 갔고.

일부는 가십에 대한 흥미로 눈을 빛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파셀 저택의 정원 구석에서 웃긴 조합과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라이언과, 그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는 짝퉁이를.

오빠와 함께 있던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 에릴. 오늘은 원래 머리 색으로 돌아왔네?”

“……!”

그냥 인사를 해 준 것뿐인데, 짝퉁이의 얼굴은 굴욕감으로 일그러졌다.

옆에서 오빠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쟤는 금발이든 까만 머리든, 우리 리샤보다 못생겼어.”

“……!”

오빠가 대놓고 짝퉁이를 무안 주자, 짝퉁이는 상처받은 티를 냈다.

“어,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말한 건 오빤데, 나를 노려보는 걸 보면 얘도 참 일관적이었다.

나와 라이언의 시선이 비밀리에 마주쳤다.

라이언은 한번 살짝 웃더니, 짝퉁이 앞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막아섰다.

그리고 오빠에게 정식으로 항의했다.

“황자 전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사과해 주십시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