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8. 메인 퀘스트 : 가짜의 가짜는 가짜 (09)
“뭐라고?”
오빠의 눈빛이 위험스레 빛났다. 살기가 피부를 찌릿찌릿하게 했다.
나는 경악했다.
아니, 적당히 해!
여기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 화상아!
내가 옆구리를 찌르자, 오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살기를 조금 거뒀다.
하지만 라이언에 대한 추궁은 그만두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방금 에릴 영애에게 하신 말씀 말입니다. 너무 무례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아무리 황자 전하라 하시더라도요. 그러니, 부디 사과해 주셨으면 합니다.”
라이언은 의연하게 고개를 숙여 청했다.
주변에 술렁거림이 번졌다.
“그랑디오르 경이 지금 에릴 양의 편을 든 건가요?”
“설마 저 아이가 방계로 인정받은 김에 그랑디오르가 황위 계승에 관여하려는 걸까요?”
“그건 관례를 어기는 일인데.”
“하지만 이미 세 공신 가문 중 한 곳의 후계자가 황족 중 한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잖아요. 사실상 이미 전례는 깨진 거라고 봐도 좋겠죠.”
평균 연령 자체가 어린 탓에 대다수 귀족가의 아이들은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참석한 부모들은 달랐던 것이다.
다들 라이언이 대놓고 에릴의 편을 들며 오빠와 대립하는 상황에 대해 분석하고 있었다.
정말로 라이언이 에릴의 손을 들기로 한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그랑디오르 전체의 뜻인가.
등등.
에릴은 숫제 별이 빛나는 듯한 눈으로 라이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라이언이 자신의 편을 들어 준 것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황자와 대립까지 하고 있었다.
에릴이 그토록 바라던, 자신만을 위해 주는, ‘자신의 편’이 바로 옆에 있었다.
에릴은 라이언에게 더욱 매달리며, 심술궂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에릴: ‘봐. 나도 있어! 내 편! 무조건적으로 나만을 위해 주고 나를 아껴 주는! 그것도 그랑디오르 공작가의 후계자가 말이야!]
에릴, 아니, 짝퉁이는 아주 뿌듯하고 행복해 보였다.
오빠는 당연히 분노했지만, 연이어 비웃음과 조롱을 먼저 내비쳤다.
그게 상대방에게 더 큰 모욕이 될 거라는 걸 잘 알기에 나온 반응이다.
음. 환생했어도 저 입으로 패는 실력은 녹슬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사과씩이나 하라는 거지? 아, ‘쟤는 우리 리샤보다 못생겼다’고 한 거 말인가?”
“……!”
에릴의 얼굴이 부끄러움과 분노로 붉어졌다.
당연했다.
면전에 대놓고 ‘너 못생긴 거 맞아.’와 같은 소리를 또 들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오빠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저 가짜가 감히 리샤를 따라 한 건 이미 소문이 다 나지 않았나? 어울리지도 않게 금발로 염색하지를 않나. 아주 가관이었지.”
“나, 난 그냥 아, 아니, 황제 폐하를 닮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 나도 황실의 핏줄이니까!”
지난번에 아빠에게 정면으로 ‘넌 황녀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듣고 난 후라 그런가.
이번엔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 ‘아바마마’니, ‘황녀’니 어쩌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끈질긴 미련 또한 놓지 않았다.
“폐, 폐하께선 내 숙부님이 되시니까! 그러니까 닮아도 이상하지 않잖아요!”
에릴의 어설픈 변명에 오빠는 노골적으로 코웃음 쳤다.
“그래. 황실의 핏줄이긴 하지. 태양의 마력도 가지지 못했던, 벨론드 백작의 사생아.”
에릴와 오빠의 언쟁에 라이언이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전하. 에릴 영애가 아무리 아직 어리지만, 숙녀에게 ‘못생겼다’고 면전에 대놓고 말하는 건 분명히 잘못입니다.”
라이언은 어린 사촌 동생을 타이르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라이언이 오빠가 한 모욕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에릴은 ‘못생겼다’ 소리를 세 번째로 들은 격이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에릴은 방금 라이언의 말이 한번 돌려서 자신을 모욕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짝퉁: ‘역시 내 편은 라이언뿐이야!’]
-이러는 걸 보면.
오빠는 한층 더 이죽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사실대로 말한 것뿐인데? 세상에 솔직하게 말한 것을 사과해야 하는 법도 있나?”
“하지만 황자 전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 해도, 직접 말씀하시는 건……!”
그리고 여기까지.
도돌이표를 그리는 오빠와 라이언의 언쟁과.
에릴의 착각 퍼레이드를 나는 길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지금 상황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라이언이 나와 적대하는 걸 보여 주는 것.’
그건 이미 끝났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로 가야지.
나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면서,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라이언에게 던졌다.
휭-, 톡!
분홍색 레이스에 빨간색 리본이 앙증맞게 달린 장갑이 라이언의 뺨으로 날아갔다.
리본에 달린 루비 장식이 딸랑거리며 라이언의 콧등을 톡 쳤다.
사방에서 경악 어린 시선이 나를 향해 꽂혔다.
“……?”
“……?!”
잠시 너무 놀라 굳었던 이들은 곧 바쁘게 말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본 게 맞나요? 분명히 황녀님께서……!”
“장갑을 던지셨어요!”
“어머, 정말 귀여운 장갑이네요! …아, 이게 아니라!”
“지금 황녀님께서 분명히 결투 신청을 하신 거죠?!”
나는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검지를 쏙 내밀어 라이언을 가리켰다.
오빠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앞으로 늠름하게 나서서 말이다.
그리고 외쳤다.
“오빠의 명예를 위해 라이언 그랑디오르,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
파셀 백작 피오나는 더없이 난감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황자와 황녀가 그녀의 파티에 참석한 것은 더없는 영광이었고 기쁨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난데없이 황자와 라이언이 언쟁을 벌인 것도 큰 문제인데.
그 결론이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빠져 버렸던 것이다!
‘겨, 결투? 우리 귀염뽀짝 황녀님이?!’
피오나의 눈앞에서는 그야말로 기기묘묘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라이언은 열네 살치고 키가 많이 큰 편이라, 거의 성인에 준했다.
그 앞에 놓으니 아나트리샤는 그야말로 늑대 앞을 막아선 아기 토끼였다.
‘특히 귀여운 점이!’
그런데 이 말랑보들 귀염뽀짝 아기 토끼 황녀님이 앙증맞은 빨강 리본 장갑을 던지며, 결투를 신청한 것이다.
거의 어른이나 다름없는, 자기 나이 두 배의 소년에게!
“화, 황녀님!”
물론 아나트리샤는 라이언과 같은 나이에 태양의 마력까지 갖춘 세실리아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이긴 적이 있지만.
그럼에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격한 체격과 나이 차이는 걱정부터 불러일으켰다.
적어도 세실리아는 라이언에 비하면 훨씬 작았기 때문이다.
라이언은 ‘풉!’하고 웃으며 자신의 뺨에 붙은 귀여운 장갑을 집어 들었다.
마디진 커다란 손에 들린 작은 장갑은 더없이 깜찍해서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 상황 자체처럼.
“결투라니요? 저에게 말입니까?”
“응!”
위풍당당하게 나선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여동생에게, 루퍼스리안은 감동으로 촉촉하게 젖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리샤! 나를 위해서 이렇게 나서다니!’
하지만 감격과 현실은 별개.
재빨리 정신 차린 루퍼스리안은 동생을 말리려 했다.
“리샤. 오빠가 너무너무 좋고, 오빠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럴 필요 없어. 결투는 하더라도 오빠가 해야지.”
그러자, 아나트리샤는 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곱슬거리는 금발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 못 견디게 귀여웠다.
“아니. 오빠는 내가 지켜. 오빠의 명예도, 리샤가 지킬 거야!”
작은 주먹을 앙증맞게 쥐고, 하늘을 향해 치켜올리는 것을 보며, 루퍼스리안은 동생의 귀여움에 몸서리쳤다.
‘내 동생이 너무 귀여워엇! 게다가 나를 너무 좋아해!’
-라고 방방곡곡에 외치고 다니고 싶은 것이 소년의 심정이었다.
그사이, 라이언은 상냥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하지만 황녀 전하. 결투는 굳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태양의 마력을 가지신 황족께 어찌 감히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라이언 역시 마력을 다룰 수 있었으나.
태양의 마력은 모든 종류의 마력에 우위를 가졌다.
그러니 사실상, 이 결투 신청은 의미가 없다.
라이언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에릴은 라이언과 아나트리샤를 불안한 눈으로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나트리샤가 제 오빠를 위해 나선 것처럼, 라이언을 위해 나서지는 않았다.
그때, 아나트리샤가 당당하게 말했다.
“승부는 공정해야지. 나는 태양의 마력은 안 쓸 거야! 하지만 너는 마력 써도 돼!”
“…예?”
“리샤!!!”
사방에 경악이 퍼져나갔다.
“…….”
“…….”
잠시 무거운 침묵이 정원을 내리눌렀다.
태양의 마력을 빼놓고 보면, 아나트리샤와 라이언의 결투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했다.
일곱 살 소녀와 거의 성인에 가까운 덩치를 가진 열네 살 소년.
통념상 육체적인 힘만으로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황녀는 한술 더 떠서 라이언에게는 마력을 써도 좋다고 해 버린 것이다.
그때, 황녀의 작은 몸 주변으로 강력한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에릴은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이 외쳤다.
“태양의 마력은 쓰지 않겠다면서!”
아나트리샤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그 말대로야. 이건 태양의 마력이 아니니까.”
아이의 작은 몸 주변으로 마력이 구체화되며, 빛이, 아니, 그림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히 태양의 마력일 수 없었다. 태양의 마력은 공통적인 특징을 가졌으니까.
빛 혹은 열.
지금 아나트리샤가 뿜어내는 마력은 그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밤, 혹은 어둠에 가깝다.
“저, 저건!”
아나트리샤는 이것을 주변에 과시하듯 보여 주었다.
분명 이 자리에 라이언과 함께 왔을 사교도 무리의 끄나풀들에게.
‘자, 어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만하지?’
사교도라면 알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 아나트리샤가 내뿜은 건 분명히, 부정의 마력이었으니까.
이것이 바로, 미하일을 통해 아나트리샤가 얻은 마지막 패였다.
‘사교도 놈들을 모조리 덫으로 끌어낼!’
라이언과의 분쟁은 이를 보여 주기 위한 핑계였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