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8. 메인 퀘스트 : 가짜의 가짜는 가짜 (10)
나는 눈이 있는 자라면 다 볼 수 있도록 과시하듯 부정의 마력을 뿌렸다.
그리고 작은 주먹을 쥐고 그대로 앞으로 내질렀다.
검붉은 마력 덩어리가 라이언을 향해 날아갔다.
라이언의 옆을 스치고 간 마력의 충격파는 그대로 아름드리나무 하나를 박살 내 버렸다.
쾅!
마치, 지진 난 것처럼 거세게 땅이 울렸다.
***
이 난데없는 광경을 목격한 귀부인들 사이에서 놀라움과 의문이 번져 나갔다.
“황녀님께 태양의 마력 말고 다른 마력도 있었던가요?”
“가끔 그런 경우가 있긴 하니까요? 황자님께서도 얼음 속성의 마력을 하나 더 가지셨다고 들었어요.”
“얼마 전 탄일 때 재각성을 겪으셨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요.”
“그런데 저 마력은 대체 어떤 속성일까요? 한 번도 본 적 없는데요.”
호기심 어린 감탄과 찬양의 말들이 가볍게 오고 갔다.
그 사이에서 몇몇 비밀스러운 경악과 깨달음 또한 스쳐 지났으나, 눈치챈 이는 거의 없었다.
이미 계산하고 주변을 살피고 있던 한 명 외에는.
아나트리샤의 청보라색 눈동자가 인파 사이사이 섞여 있는 몇몇 이들을 정확하게 집어냈다.
‘저기 핑거 푸드 테이블 옆에 한 명, 벽에 붙어 있는 한 명, 마지막으로 분수 조각상을 보고 있던 한 명.’
얼굴을 기억해 뒀으니, 나중에 조용하게 피오나를 통해 신원을 확인하면 될 일이다.
물밑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걸 모르는 평범한 귀족들은, 그저 감탄하기에 바빴다.
“태양의 마력만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셨다고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시네.”
“역시 다음 황위는…….”
“황자님께서 동생을 끔찍이 여기시는 건 유명하니까요. 그리고 다른 경쟁자는…….”
‘수준이 한참 모자라다.’
-라는 말이 뒤에 생략되어 있었으나,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이들은 다 알아들었다.
흘금.
에릴을 쳐다보는 시선에는 노골적인 멸시와 경멸이 묻어났다.
누구도 에릴을 진지하게 황위 계승권자로 여기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이 말들을 전부 들은 건 아니었지만, 에릴도 자신을 향한 불온한 분위기는 민감하게 느꼈다.
아이들은 자신을 향한 애정이나 적의에는 예민하니까.
수치심과 불안감으로 에릴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괘, 괜찮아. 나한테는 라이언이 있어. 그랑디오르 공작가가 내 편이라구!’
그때였다.
아나트리샤가 뿜어내는 기이한 마력의 앞에서, 라이언이 기꺼이 무릎을 꿇은 것은.
“……제가 졌습니다.”
라이언은 그리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내뱉는 말과 달리 꽤 즐거운 듯한 태도였다.
에릴의 눈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라, 라이언?’
아나트리샤는 불퉁하게 외쳤다.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아니요. 시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 마력으로는 황녀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니까요.”
라이언은 고개를 들어 설득력 넘치는 눈빛과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주변에 들으라는 듯, 크게.
“황녀님이라면 방금 그 마력을 그대로 저에게 퍼부으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셨을 겁니다. 그랬다면, 저 정원수 대신 제가 저 꼴이 되었겠지요.”
웬만한 장정만큼 큰 덩치의 라이언이 두 팔을 뻗어야 나무둥치를 감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던 나무였다.
그것이 지금 박살 나서 흔적만이 남았을 뿐.
“황녀님께서 베풀어 주신 자비에 깊이 감읍하옵니다.”
라이언은 연극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과하게 아나트리샤를 상찬하며 자신을 낮추었다.
아나트리샤의 얼굴이 살짝 붉어질 정도로.
‘뭐야? 이건 사전에 얘기한 거랑 다른데? 왜 이렇게까지 오버해서 찬양하는 건데?’
아나트리샤는 민망해서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거든!”
“하지만 황녀님께서 단번에 제 허리를 저 나무처럼 꺾어 버릴 수 있는데, 기회를 주신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건…….”
실제로 일부러 빗맞힌 것은 맞았다. 그래서 대놓고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는데.
아나트리샤의 얼버무림은 곧 라이언의 말에 대한 긍정이 되고 말았다.
루퍼스리안이 뒤에서 동생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부루퉁하게 말했던 것이다.
“내 동생은 너무너무 오빠를 사랑하고, 마음도 약해서 정말 큰일이야.”
황자의 푸른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나였으면 바로 그랑디오르의 목을 노렸을 테니까.”
아나트리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진심이다!’
루퍼스리안은 활짝 웃었다.
“역시 리샤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내가 그랑디오르를 죽여 버릴까 봐 일부러 나선 거지? 살려 주려고.”
아닌데.
사실 둘이 짠 건데.
-라는 아나트리샤의 대답은 당연히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라이언은 벙찐 아나트리샤를 두고 방금까지도 티격태격했던 루퍼스리안과 죽이 척척 맞기 시작했다.
“황자 전하의 지적이 정확하십니다. 황녀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저를 구해 주려 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적어도 그걸 알 정도의 머리는 되는 모양이군.”
“황녀님의 강대하면서도 자비로운 마력과, 황자님의 날카로운 지적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진작 알지 못한 것은 분명히 죄지만, 늦게라도 깨달았다니 다행이야, 그랑디오르가 후계자를 잃지 않아도 될 테니.”
흉흉한 대화를 화기애애하게 나누고 있는 두 소년은, 배경에 꽃잎이 흩날리는 착각이 들 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녀 전하.”
라이언은 여전히 아나트리샤에게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내밀었다.
이건 레이디에게 예의를 표하고 싶다는 기사의 강력한 의사 표현이다.
아나트리샤는 약간의 불길함을 느꼈다.
‘얘 진짜 왜 이래? 이것도, 미리 합의한 내용이랑 다른데?’
루퍼스리안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황녀님께서는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크나큰 은혜에는 마땅히 보답을 올려야겠지요.”
“손 놓고 당장 여기서 꺼지는 게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야.”
루퍼스리안의 뾰족한 대답을, 라이언은 핫핫 웃으며 무시했다.
“부디 이 한 몸을 바쳐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뭐라고?”
아나트리샤는 멍해졌다.
‘이건 또 뭔 멍멍이 소리야?’
***
짤그랑!
미하일이 떨어뜨린 유리잔이 사정없이 박살 났다.
나스카의 장로 로겐이 주인을 걱정했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어요.”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미하일의 표정은 로겐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불쾌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로겐의 어린 주인은 좀처럼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피어오르는 소년의 분노가 주변에 있는 일족 모두를 자극할 정도로 강렬했다.
이러한 느낌을, 로겐은 지금까지 딱 한 번 더 느껴 보았었다.
‘지난번, 분명히 제국의 황녀 앞에서…….’
혹시 이번에도 황녀와 관련된 일인 것일까.
하지만 로겐의 의문은 대답을 얻지 못했다.
미하일이 일시적으로 드러난 감정을 다시 안으로 갈무리해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년이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감히…….”
***
가르텐 소공작 코넬은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이번 가든 파티에 참여했다.
딱히 사교 활동을 즐기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가르텐 가문은 굳이 타 가문과의 친교를 긴밀하게 유지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코넬이 파셀가의 가든 파티에 참여한 이유는 간단했다.
‘에릴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그렇다. 소년은 감시하기 위해 왔던 것이다.
망신을 몇 번이나 당한 뒤, 에릴은 황녀를 따라 하는 건 빠르게 그만둔 듯했다.
그건 다행이었지만, 갑자기 그랑디오르 경과 친해지더니 함께 파셀가의 파티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에릴이 저택 외부의 공식적인 자리에 참여할 때마다 매번 곤란한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그걸 전부 목격한 코넬로서는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건 현재 에릴은 가르텐저의 공식적인 손님이었고.
‘무엇보다…… 또 황녀님께 폐가 될 짓을 저지를 수도 있어.’
정작 황녀님은 코넬을 통해 에릴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상냥하시건만.
에릴은 그런 황녀님의 배려는 전혀 모른 채 제멋대로만 굴고 있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파셀 백작가의 파티에 참여했는데. 예상치도 못하게 황녀와 마주치는 행운을 잡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게 대체 갑자기 무슨 난리인 건지…….’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이 상황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라이언 그랑디오르가 황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정식으로 요청한 것이다.
“그랑디오르의 직계로서가 아니라, 그저 기사 라이언으로서 황녀님께 봉사하여, 이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시겠습니까?”
코넬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랑디오르 경. 보통 기사 서임은 열다섯은 넘어야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아, 저는 작년에 이미 서임을 받았습니다. 종자로 봉사하던 기사께서 2년 이르게 서임을 허가해 주셨죠.”
기사 서임이 빠르다는 건, 그만큼 기사로서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였다.
루퍼스리안 황자의 파란 눈이 이글이글거리고 있었다.
“은혜를 갚겠다더니, 그건 오히려 그대가 리샤에게 다시 은혜를 받는 일이야!”
하지만 주변의 태클을 무시하고서, 아나트리샤 황녀가 나섰다.
라이언에게 제 손을 내밀며 낭랑하게 대답했다.
“좋아. 기회를 주지. 라이언 그랑디오르를 오늘부터 나의 기사로 삼겠어.”
“리샤!”
경악이 퍼짐과 함께 소란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가운데.
어느 곳에도 끼지 못하고 외톨이로 남겨진 아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에릴이었다.
‘라이언? 내 편이, 나만의 기사님이 되어 주는 거 아니었어? 어째서? 어째서?!’
소녀의 분노 어린 눈빛이 라이언의 청을 받아들인 아나트리샤에게로 향했다.
***
그랑디오르 공작저.
아들을 불러들인 로헨 소공작이 차가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갑자기 무슨 짓이냐? 왜 황녀의 기사가 되겠다고 자청한 거지?”
“그분의 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힘? 태양의 마력 말이냐?”
라이언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걸 어머니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 외에도 증인들이 있으니 확인해 보십시오.”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라이언은 쓴웃음을 삼켰다. 어머니는 끝까지 자신에게 모든 걸 숨길 생각인 모양이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는 가문의 일을 제게 알려 주지 않으시지만, 저라고 눈이 없고 귀가 없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 그랑디오르니까요.”
“…….”
“비밀리에 가문을 드나드는 이들 중에 특별한 힘을 가진 이들이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들의 마력을 몇 번 보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들과 아주 비슷한 힘을, 이번에 황녀님께서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곁에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겁니다. 그 힘이 대체 무엇인지. 왜 어머니와 할아버님께서 저에게 그 힘에 대한 것들을 자꾸 감추시는지요.”
로헨 소공작의 목소리는 드물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놀라움은 숨기고 있던 일을 아들에게 들켰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게, 사실이냐? 황녀가 ‘그 힘’을 썼다는 것이?”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랑디오르 소공작의 눈빛이 전에 없이 동요하고 있었다.
***
라이언과 짜고, 미하일에게 도움을 받은 내 작전의 이름은 이러했다.
‘가짜 성녀 대작전!’
그렇다. 나는 사교도 놈들을 속일 생각이었다.
바로, 내가 전생에 그들의 주인 ‘성녀 소피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