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5/218)

Level 19. 메인 퀘스트 : 고래 사냥 (01)

내가 파셀 백작저에서 내뿜은 마력은 분명히 부정의 마력이었다.

사교도라면 못 알아볼 수 없는 강대한 힘.

부정의 마력을 만들어 내는 건 간단했다.

애초에 난 전생의 기억으로 정상적인 마력을 어떻게 해야 부정의 마력으로 바꿀 수 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좋은 샘플도 있었고.’

다브네스 후작 부인이 아빠에게 한 번 더 쓰려고 확보해 놨던 약.

그 약에는 사교도들이 만든 강력한 부정의 마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후작 부인에게서 압수해 황실 소유가 되었으니, 내가 그 약을 확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약에 든 마력 패턴에 맞추어, 내 마력 일부를 오염시켜 부정의 마력을 대량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건 사실 시도만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부정의 마력은 몸을 망치고, 이를 품은 사람의 마력 전체를 오염시키니까.’

그런데도 지금 내가 자유롭게 부정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미하일에게서 나눠 받은 밤의 마력 덕분이지.’

미하일의 마력 회로를 복구해 주면서, 나는 그의 마력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전생에 알고 있던 것보다 더욱 상세하게.

미하일의 마력은 사교도의 부정한 마력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달랐다.

태양의 마력과 반대 속성이라는 건 아주 비슷했다. 어둠에 가까운 힘이라는 점에서.

단, 미하일의 마력은 밤과 안정, 휴식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태양의 마력과 섞이진 않지만 그 자체로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조화를 이루는 건 가능했다.

세상에 빛과 어둠이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부정의 마력은 달랐다. 그것은 어둠이면서, 파괴와 죽음에의 강렬한 의지. 또한 증오였다.

그렇기에 태양의 마력과는 아주 강력하게 반발한다.

태양의 마력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힘, 즉 빛, 열, 창조, 생명, 정화의 힘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러니 나 혼자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부정의 마력을 반발을 감수해 가면서 지속적으로 몸 안에 가지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랬다간 내 마력이 전부 오염되고, 몸도 상할 테니까.’

하지만 미하일이 나눠 준 마력과 함께라면 달랐다.

그 마력을 통해 부정의 마력을 제어하는 것이 가능했다.

나를 해치지 않고서, 사교도 놈들을 속일 수 있도록.

그래서 나는 미하일을 일부러 불러들였던 것이다.

‘전생에 놈이 마왕의 매개체가 된 것도 이것 때문일 수도 있겠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 결과, 내가 성공적으로 부정의 마력을 남들의 눈앞에서 보여 줄 수 있었다는 거지.

거기에 전생의 완전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사교도 놈들을 속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좋았어!’

***

파셀 백작저에서의 파티 이틀 후.

광휘 기사단의 단복을 입은 라이언이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녀 전하의 첫 번째 기사 라이언이 주인을 뵙습니다.”

그랑디오르로서가 아니라, 라이언이라는 개인으로서 나를 섬기겠다는 의미.

어쩌다 보니, 라이언이 내 첫 번째 기사가 되어 버렸다.

‘뭐, 겸사겸사 괜찮겠지. 안 그래도 일곱 살 생일 넘었으니 곧 내 호위 기사들을 직접 뽑아야 한다고 했었으니까.’

그전까지는 아빠가 보내 준 광휘 기사단원들이 돌아가며 나와 오빠의 호위를 맡았었다.

일곱 살 생일이 지난 뒤, 직접 기사를 뽑는 건 황족의 전례였다.

그때부터 공식적인 황족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아, 자신을 따를 사람을 선택하는 의미였다.

물론 맹약 덕분에 그랑디오르의 직계가 내 기사가 되는 건 정말로 이례적이었지만.

라이언이 그랑디오르의 후계자로서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나를 섬기겠다고 말하며, 일은 대충 봉합되었다.

당장 그랑디오르의 소공작이 건재할 뿐더러.

‘이미 아멘다가 내 시녀로 일하고 있기도 하고.’

원래 불문율은 한 번 깨지면 두 번은 쉬운 법이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단순히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걸 나는 나중에 알았다.

어차피 맹약이 한 번 깨져서라기보단, 이때 이미 내가 황위 계승자란 여론이 굳어져 있어서였다는 걸.

세 공신 가문의 사람들이 충성을 바치도록 허락된 건, 황제와 황제의 후계자뿐이었으므로.

어쨌든 내 시녀들은 라이언에게 꽤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훤칠하네요. 방패의 그랑디오르의 직계라더니, 과연.”

“황녀님의 기사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죠.”

아마, 기사는 시녀들과 임무 범위가 겹치지 않아서 경계를 안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멘다 때는 반응이 좀 달랐었으니까.

그렇다고 라이언이 무조건 호의적인 반응만 얻은 건 아니었다.

등 뒤에서 오빠가 못마땅한 얼굴로 라이언을 노려보고 있었거든.

나는 팔꿈치로 오빠를 꾹꾹 찔렀다.

“웃어, 오빠. 웃어.”

오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된 것, 목숨을 다 바쳐 리샤를 지키도록.”

저거, 그럴 일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 착각이겠지?

라이언은 환하게 웃으며 오빠에게 대꾸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역시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여하튼, 이것으로 라이언이 공개적으로 내 옆에 붙어 다닐 핑계는 확실하게 만들어졌다.

‘물론 내 호위 기사까지 된 건 예상외였지만.’

이건 순전히 라이언이 혼자 꾸민 일이다.

나는 제멋대로 움직인 그를 조금 흘겨보았다.

그러자 라이언은 고개를 숙이더니, 나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어머니께서 황녀님의 마력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되신 건 확인했습니다.”

좋아. 그러면 거기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줘야지.

***

“아악!! 아아아악!!!”

가르텐저의 별관에 악에 받친 비명이 거칠게 울렸다.

에릴은 제 분을 못 이겨 발악하고 있었다.

가구가 박살 나고 양탄자와 시트, 휘장 등이 난장으로 찢겨 나갔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이의 손이 닿은 곳부터 불꽃이 일어, 찢긴 옷자락이 금세 타올라 재가 되었다.

그나마 집 안을 다 태워 버리지 않는 것이, 아이의 마지막 이성이었다.

“또 뺏겼어! 또, 또!”

유일하게 라이언은 자신의 편이었다.

자신의 말을 들어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고, 무슨 일을 해도 다 받아 주던.

그런 라이언마저 아나트리샤가 빼앗아 간 것이다.

그렇다. 에릴은 라이언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나트리샤가 라이언을 빼앗아 갔다고만 여겼다.

분에 차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아이는 방을 다 망가뜨리고 있었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에릴은 발칵 화를 냈다.

“꺼져!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잖아! 죽고 싶어?!”

라이언을 빼앗긴 뒤, 에릴은 하녀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이 난장을 부리는 중이었다.

얼마나 심했는지 하녀들도 시종들도 아예 별관에 얼씬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조용한 말이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랑디오르 소공작께서 보내셨습니다.”

“…뭐?”

눈물범벅이 된 에릴이 놀란 얼굴을 들어 올렸다.

***

그랑디오르 공작저.

어둠 속에서 소공작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째서 황녀가 우리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녀의 아버지 그랑디오르 공작은 이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루스템의 황족은 우리의 적이다.”

태양의 마력이 가진 성질 자체가 증거였다.

이 세상의 헛된 목숨을 조금이라도 길게 유지하려 애쓰는 의미 없는 힘.

그중에서도 특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아나트리샤가, 자신들과 같은 힘을 가졌다고?

이것을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정말 황녀가 우리의 편일까.’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여러모로 좋은 일이었다.

적진의 심장부에 동료가 존재하는 셈이니.

게다가 그들과 직접 접촉하기 전에 ‘힘’을 각성했다면, 어지간한 수준의 능력자가 아닐 터였다.

큰 힘이 되겠지.

정말로 황녀가 그들의 동료인지 확신할 수 있다면, 그들의 이상은 훨씬 더 쉽게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분’을 찾는 것도.’

그랑디오르 공작가의 모든 힘을 다 써서, 대륙 전체를 뒤지고 있음에도.

그들은 아직 주인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에 황가의 힘이 더해지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성녀’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라이언이나 다른 수족들이 황녀의 힘을 목격했다 하나, 소공작 본인이 직접 본 것이 아니기도 했고.

자칫했다간 오히려 가문을 적의 아가리에 바치는 일이었기 때문에, 명확한 확신이 필요했다.

***

그사이 나는 가족들과 행복한 일상을 함께하는 한편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에서 움직이기를.

에릴이 먼저일지, 아니면, 그랑디오르 소공작이 먼저일지.

그리고 라이언이 내 기사로 임명된 지 닷새 만에 나는 어느 쪽이 움직인 건지 알 수 있었다.

“황녀님. ……알현을 청하는 이가 있습니다.”

아멘다가 잔뜩 긴장한 채 나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나는 응접실에서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이했다.

호위 기사인 라이언과 시녀들을 모두 대동한 채로.

기사단복을 입고 내 뒤를 지키고 선 라이언을 본 아이의 새파란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이번엔 인두로 말지 않아 직모 그대로인 검은 단발머리. 그리고 분노와 질투로 타오르고 있는 주홍색 눈동자.

나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안녕, 에릴.”

“…….”

그리고 빳빳이 고개를 들고 있는 짝퉁이에게, 응접실에 먼저 들어와 있던 소녀의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황녀님께 인사를 올리지 못하겠니? 이렇게까지 예의를 모르다니 내가 다 부끄럽구나.”

그사이에 부상에서 꽤 회복한 세실리아가 내 부름을 받아,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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