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9. 메인 퀘스트 : 고래 사냥 (02)
에릴은 발칵 화를 냈다.
“저 여자는 왜 여기 있는 거죠?!”
“그야 나는 황녀님의 시녀 중 한 명이니까.”
그렇게 대꾸하며, 세실리아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쳐들었다.
두 소녀의 부정적인 시선이 서로 맞부딪쳐 불꽃이 튀었다.
세실리아는 현재 내 시녀라는 명목으로 황녀궁에서 치료받고 있었다.
그리고 당근 꼬다리 시절의 드높은 자존심과 오기는 다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저는 황녀님의 충실한 종이니까요!”
과거가 있어 그런지 좀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과잉 충성 모드였다.
내 구두에 먼지가 앉았다고 자기 치마로 닦지를 않나…….
내가 시키면 의자 대신 엎드리기라도 할 기세.
그야말로 생존 욕구가 모든 걸 이긴 아주 모범적인 사례라 할 만했다.
세실리아는 에릴을 뾰족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고.
에릴 역시 만만치 않게 사나운 표정이었다.
자매가 제대로 만나는 첫 자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험악한 분위기.
사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이복 자매라는 건 남보다 못한 경우가 많으니까.’
아빠랑 죽은 벨론드 대공 사이도 그랬고.
나만 해도 에릴이 내 이복 자매일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는, 뭘 해도 짜증 나고 안 좋게 보였으니까.
“어서 황녀님께 예의를 다하지 못하겠니? 아, 혹시 허리나 무릎을 다친 거야? 그러면 내가 좀 도와줄까?”
“뭐라고?! 에릴은 멀쩡해! 무슨 헛소리를……!”
“아, 그러면 혹시 귀가 안 좋니? 내가 두 번이나 말했는데 황녀님께 예의를 표하지 않다니 말이야.”
역시 세실리아의 성질머리는 어디로 간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처지 때문에 잠자코 있었을 뿐.
적당한 상대를 만나자, 세실리아의 싸가지는 완벽하게 부활했다.
세실리아는 보는 사람 성질나게 하는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네 어머니는 그런 예절 교육도 해 주지 않은 거니? 하긴 시골 귀족 출신이니 어쩔 수 없겠지. 이런 촌뜨기와 반이나마 같은 피가 흐른다니, 내가 다 부끄러워질 지경이야.”
내 앞에서 세실리아가 윙윙댈 땐 꽤 짜증 났는데.
내 앞을 가로막고 서서 내 적이라고 판단한 쪽에게 왈왈 짖고 있는 걸 보니, 솔직히…….
‘꿀 잼! 허니 잼!’
원래 제일 재밌는 구경은 불구경, 싸움 구경이라지 않나.
1열에서 관람하는 싸움 구경은 팝콘을 씹고 싶어질 정도였다.
결국 말발에서 밀리자, 에릴은 자기가 꺼내 들 수 있는 가장 간편한 패를 꺼냈다.
“태양의 마력도 가지지 못한 주제에 어디서 내 앞에서 고개를 쳐드는 거야!”
“……!”
그 말에 세실리아는 기겁했다.
과장되게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겨우 공격이 먹혔다고 웃고 있는 에릴 앞에서 나에게 과장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자기가 황족이라고 내세울 줄은 알면서, 황녀님 앞에서 예의를 차릴 줄은 모르는 저 아이를 대신해서 제가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털썩,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세실리아가 밥상을 다 깔아 준 덕에 나는 자비롭게 한마디만 하는 걸로 충분했다.
“괜찮아, 세실리아. 아직 어리잖아.”
물론 나랑 같은 나이긴 하지만.
옆에 시립해 있던 다른 시녀들과 하녀들이 웃음을 애써 참는 소리가 들렸다.
“……!”
“풉.”
“크흡!”
아멘다마저 입을 막아 소리를 죽이려 애쓰고 있을 정도였다.
‘하긴, 웃기긴…… 웃기니까…….’
그녀들의 노력은 별로 효과가 없어서, 웃음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에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이, 이……이익!”
세실리아는 내 명을 아주 충실하게 잘 따랐다.
“그 애를 최대한 자극해 줘.”
솔직히 내 명령을 따르려고 하는 것보다, 본인 분풀이에 더 가까운 것 같긴 하지만.
잘한 건 잘한 거니까.
나는 여유롭게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했다.
“그나저나 갑자기 왜 알현 요청을 한 거야? 나는 아직 사교계 데뷔를 하기 전이라, 정식 알현은 받지 않아. 게다가 알현 요청은 보통 한 달 전쯤에는 해야 하는 거고.”
“……!”
“하지만 내 사촌이기도 하고, 쎄씨의 동생이기도 하니까 특별히 받아 준 거야.”
“그래서, 고마워하라는 소리인가요?”
과연 에릴은 날카롭게 반응했다.
안 그래도 나에게 원한이 잔뜩 적립되어 있는데, 세실리아 때문에 약이 잔뜩 올랐을 테니 당연했다.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실리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지! 당연히 감사해야지!”
아멘다의 지원 사격이 있었다.
“에릴 양은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특별한 은혜랍니다. 마땅히 감사하셔야 해요. 그 전에 제대로 된 예부터 갖추셔야겠지만.”
곧은 분위기의 아멘다까지 똑 부러지게 한마디 하자 에릴은 궁지에 몰렸다. 그 심리는 시스템이 친절히 알려 주고 있었다.
[에릴 :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거야?’]
에릴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떨리는 눈으로 훑어보다가, 마침 눈이 마주친 라이언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분명히 기대감 어린 시선.
그때, 라이언이 살짝 움직였다.
에릴의 얼굴이 희색을 띠었다.
[에릴 : ‘그래! 라이언이 나를 외면할 리 없어! 내 편을 들어 줄 거야! 황녀가 억지로 기사로 만든 거지, 사실은 나를……!’]
하지만 에릴의 필사적인 행복 회로는 곧 힘없이 꺼져 버렸다.
라이언이 내 앞으로 나서며 말했던 것이다.
“에릴 영애. 황녀님 앞에서 예의를 갖추십시오. 아무리 황족으로 인정받았어도, 그것이 무례함을 정당화해 주진 못합니다.”
“……!”
에릴의 작은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저 애는 라이언을 배신당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결국 끝까지 저항하지도 못했다.
내 앞에서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혔다.
“……황족 에릴이, 황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나마 자신을 황족이라고 스스로 칭하는 것까지는 포기 못 하는 게, 저 애의 마지막 자존심인 모양이다.
그리고 끝까지 알현을 허락해 준 데 대한 감사는 하지 않았다.
바짝 자극해 뒀으니, 이쯤 해서 용건을 들어 줘야겠지.
“그래. 그래서 무슨 일로 알현을 요청한 거야?”
에릴은 바로 고개를 반짝 들고, 나와 라이언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라이언을 놔달라고 말씀드리려고요!”
찬물을 뒤집어쓴 듯이 응접실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
아나트리샤는 고개를 갸웃갸웃 했다.
“응? 네 말은 내가 라이언을 강제로 잡아 놓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러자 에릴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러고 계시잖아요!”
설마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유모와 시녀들, 라이언까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에릴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라이언은 에릴에게 약속했었어요! 에릴이 크면 자신의 레이디가 되어 달라고 했었어요! 황녀님이 아니라요!”
“그래서? 그게 왜?”
“라이언이 에릴에게 약속했다니까요! 그런데 황녀님의 기사가 되다니, 황녀님이 억지로 시키신 게 아니면 그럴 리가 있겠어요?”
에릴은 주홍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눈빛과 표정.
그리고 <궁예> 스킬로 보아하니,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라이언이 황당해하는 독백이 시야를 스쳐 갔다.
[라이언: ‘……황당하군. 그 비슷한 말도 한 적이 없는데.’]
아, 애 구슬리느라 그런 공수표를 날리긴 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지, 라이언이 스스로 나섰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에릴 양.”
“네?”
“저는 에릴 양에게 그런 약속을 한 적 없습니다. 아무리 다른 기사에 비해 어리다곤 하나 기사가 충성을 바치겠다는 약속은 목숨을 바치는 일. 저는 그런 허언을 한 적 없습니다.”
자신이 한 말을 바로 부정당하는 건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닐 거다.
수치심과 분노로 에릴의 얼굴이 더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저러다 터져 버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아이는 떼를 쓰듯이 외쳤다.
“아니야! 말했잖아! 계속 에릴 편이 되어 주겠다고 했잖아!”
“……그게 어떻게 제가 당신의 기사가 되어 주겠다는 약속이 됩니까?”
확실히 말도 안 되긴 했다.
중간 단계를 한 10단계쯤은 뛰어넘어 왜곡해야 가능할 거다.
하지만 에릴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이가 눈물 가득한 눈으로 아나트리샤를 노려보며 물었다.
“라이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라이언에게 무슨 짓을 해서 이렇게 만든 거야? 돌려줘! 내 라이언을! 돌려달란 말이야!”
이젠 최소한의 예의마저 가져다 버린 태도였다.
라이언은 참지 못하고 거칠게 외쳤다.
“그만하십시오! 저는 황녀님께 충성을 맹세한 황녀님의 기사입니다! 더 무례하게 굴면, 황녀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냥 놔두지 않을 겁니다!”
당장에라도 칼을 뽑을 기세였다.
에릴의 파리한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에릴: ‘용서 못 해……. 절대,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절대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
이번만은 에릴의 마음도 말도 똑같았다.
아이의 주변을 둘러싼 아우라가 위험한 빛과 움직임을 띠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반각성은 정신과 마력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 상태에서 극한까지 몰리면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울 거다.
특히, 에릴은 아직 일곱 살짜리니까.
“죽여 버리겠어!!!”
에릴의 마력이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아이는 마력을 움직이면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색과 보라색이 뒤엉킨 기이한 구체였다.
아나트리샤의 눈에 익은 모양새였다.
‘저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