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7/218)

Level 19. 메인 퀘스트 : 고래 사냥 (03)

‘검은 수정!’

전생에 사교도들이 자주 써먹던 물건이라, 당연히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저 물건이 발동되면, 일정 구역 안에서는 정상적인 마력의 흐름이 멈춰 버린다.

물론 부정의 마력은 제외하고.

저걸 터뜨린 다음, 무력화된 목표물을 암살하는 것이 사교도 놈들의 주된 패턴이었다.

‘당할쏘냐!’

아나트리샤는 바람보다 빠르게 발을 움직여, 에릴의 손에서 수정을 쳐 날렸다.

“악!”

갑작스러운 공격에 에릴은 비명을 지르며 수정을 놓쳤고.

아나트리샤는 공중에서 수정을 낚아챘다.

“너 이거 누구한테서 받았어?”

“……이익!”

이미 예상이 가지만 예의상 물어봤다.

그리고 당연히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수정을 빼앗긴 에릴은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죽여 버릴 거야!”

격렬한 감정에 반응해 반각성이 심화되며 에릴의 마력이 폭발했다.

쾅! 쿠궁!

하지만 응접실의 벽이나 바닥, 천장은 물론, 가구나 티 세트도 전혀 손상이 없었다.

아나트리샤의 결계가 꼼꼼히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있는 황녀궁의 궁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모와 시녀들은 아연해서 황녀의 안위부터 걱정했다.

“화, 황녀님!!!”

“기사들을, 기사들을 불러! 황녀님이 습격을……!”

라이언은 아나트리샤의 첫 번째 기사답게, 순간적인 대처로 빠르게 움직였다.

아나트리샤의 앞을 막아서며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던 것이다.

바람의 마력이 소년의 검을 휘돌았다.

창문조차 열리지 않은 실내에 거센 돌풍이 몰아쳤으나…….

“배신자!”

태양의 마력에 반각성의 영향까지 받고 있는 에릴에게는 조금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에릴이 쏘아대는 마력탄을 간신히 방어하면서, 라이언은 입 안에 피 맛이 도는 걸 억눌러야 했다.

“큭!”

하지만.

“감히 내 기사를 건드렸겠다?”

아나트리샤의 몸에서 금빛의 찬란한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런 아나트리샤를 향해 반폭주 상태인 에릴의 마력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아나트리샤의 결계를 부수고, 주변의 기물까지 박살 내면서.

쿵! 콰직, 콰직!

하지만 에릴이 쏘아 보낸 마력탄은 아나트리샤의 몸이 닿는 순간 태양 앞의 눈처럼 녹아 내렸다.

“어?”

결계로 막거나 튕겨 낸 것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압도적인 마력을 뻗어 그대로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저런 일이 가능하게 하려면 마력이 얼마나 강해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당황하여 굳어 버린 에릴은 당연히 무방비한 틈을 허용하고 말았고.

아나트리샤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작은 손이 에릴의 멱살을 잡았다.

“꺅!”

아나트리샤는 다른 손으로 에릴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욱 짙은 태양의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악!!”

에릴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리는 순간.

아나트리샤가 에릴을 제압하기 위해 잠시 내려뒀던 검은 수정이 혼자 공명했다.

웅-.

낮은 신음 같은 소음이 작게 울렸고.

파창!

수정은 보이지 않는 거인이 망치를 휘두른 것처럼 박살 났다.

동시에 안에 갇혀 있는 검은 마력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부정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은 구체가, 곧 응접실 안을 채웠다.

순간.

눈부시게 빛나던 태양의 마력이 불이 꺼진 것처럼 사라졌다.

마치, 달그림자에 태양의 빛이 가려진 것처럼.

“황녀님!”

“저, 전하!!!”

“이게 대체 무슨……!”

하지만.

금발 고수머리를 휘날리는 소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호색 작은 입술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그렸다.

다음 순간.

검은색의 불길한 마력이 황녀의 작은 몸에서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다시 태양의 마력 역시 일렁였다.

마치 일식의 때 같았다.

모든 걸 집어삼키는 어둠과, 그 어둠 안에서도 유달리 빛나는 태양을 닮은 빛.

밤과 어둠의 마력, 그리고 그것에 감싸인 부정의 마력이 압도적인 기세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것은 곧 새카만 어둠이 되어 두 소녀를 삼켜 버렸다.

“꺄아아악……!!”

에릴의 비명마저 그 어둠에 먹혀 스러졌다.

***

황궁 외궁에는 대귀족가들을 위한 휴게실이 존재한다.

당연히 세 공신 가문에게는 가장 좋은 방들이 제공된다.

그중 그랑디오르 가문의 휴게실 안.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그랑디오르 소공작, 로헨이 경악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고개가 동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황녀궁이 있는 곳이었다.

“이건……!”

그녀는 분명히 방금, 검은 수정을 발동시켰다.

애초에 에릴의 손에 검은 수정을 들려 보낸 것 자체가 이 용도였다.

황녀를 시험하기 위해.

라이언과, 그녀가 심어 둔 다른 세작들이 확인한 대로, 정말 황녀가 부정의 마력을 사용하는지.

만일 황녀가 부정의 마력을 쓰지 못한다면, 황녀를 그대로 죽이면 그만이다.

어차피 루스템의 혈족은 그들의 이상을 이루는 데에 가장 큰 방해였으니까.

검은 수정의 힘이 발동되는 순간엔, 모든 마력의 우위를 점한다는 태양의 마력조차 잠시 힘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때, 로헨이 에릴에게 걸어 둔 술식을 작동시키면 된다.

‘그러면 그 아이는 효과적인 무기로 변할 테니까.’

단 한 번밖에 쓸 수 없겠지만, 황녀를 암살할 수 있다면, 충분히 쓸모가 있다 봐야 했다.

그리고, 만일 검은 수정이 황녀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황녀가 부정의 마력을 가진 것이 확실하다고 증명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황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 걸까……?’

그만한 강력한 힘뿐 아니라 루스템 황족 내에서의 높은 지위까지 가진 이다.

그렇다면 ‘이전 세계’에서도 나름대로 강력한 힘을 가진 동료였을 것이다.

문제라면, 황녀가 동료가 맞다 해도, 그녀에겐 이전의 기억이 거의 없으니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지만.

‘아버님도 완전한 기억을 가지고 계신 건 아니니…….’

두 가지 가능성과, 이에 대한 대응을 모두 생각해 두고 있었음에도.

로헨은 아나트리샤 황녀가 부정의 마력을 가진 게 사실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랬는데.

“……!!!”

검은 수정을 발동한 순간, 그녀는 감지하고 말았다.

검은 수정이 부서지고 나타난 검은 구체 속에서, 황녀가 어마어마한 수준의 부정의 마력을 내뿜는 걸.

이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

라이언은 당혹했다.

“내 마력이……!”

감히 황녀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었지만, 그는 마력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검은 수정이 부서져 뿜어져 나온 검고 불길한 마력에 둘러싸인 순간.

그의 마력은 힘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비밀리에 가문에 드나드는 이들이 종종 저 힘을 쓰는 걸 보아 왔다.

그것을 ‘부정의 마력’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이번에 알게 되었지만.

일반적인 마력의 흐름에 반하는 힘이라는 건 그전에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그들의 힘을 접할 일은 없었기에, 부정의 마력에 이런 효과가 있다는 건 그 역시 처음 알았던 것이다.

‘이런 힘을 숨기고 있을 이유라면 역시……. 황녀님의 말씀이 사실인 건가?’

라이언의 매끈한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 검은 구체안에서는 태양의 마력마저 빛을 잃었다.

황녀는 맨몸으로 내던져진 셈이다.

이를 깨달은 라이언이 마력 없이도 제 몸을 내던지려 했을 때였다.

“!”

눈앞에 밤보다 어두운 마력이 치솟아 올랐다.

한 박자 느리게 태양의 마력 역시.

마치, 방 안에서 금환 일식이 일어나는 듯,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아나트리샤는 검은 구체에 조금도 방해받지 않고서, 에릴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

“꺄아아악!!!”

아나트리샤가 뿜어낸 검은색과 금색이 혼재된 마력은 에릴을 순식간에 감쌌다가 바로 사라졌다.

그 강맹하고 흉흉하던 기세에 비하면 놀랄 정도로 빠른 소멸이었다.

“……악?”

죽어 가는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던 에릴조차 의아해할 정도로.

아나트리샤는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아 버렸다.

얼이 빠진 채 바닥에 쓰러졌던 에릴이 다시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뭐야, 별것 아니잖아?”

이 모든 게 자신의 힘 때문이라고 짐작한 에릴은 다시 마력을 끌어 올려 아나트리샤를 죽이려 했다.

“……어?”

시도는 분명히 했다. 하지만 호응해야 하는 게 없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 한 줌도.

“이게, 이게 뭐야?”

에릴은 황망하게 두 손으로 제 몸을 더듬었다. 몸 자체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점점 더 커지던 마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내, 내 마력!!!”

에릴이 절망 어린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

아나트리샤의 침착한 명령이 떨어졌다.

“라이언. 제압해.”

“예, 황녀 전하!”

라이언은 순식간에 마력을 잃고 일반인이 되어 버린 에릴을 제압해서 황녀의 앞에 무릎 꿇렸다.

아나트리샤는 자신이 앉았던 소파로 다가가 다시 새침하니 앉았다.

에릴이 가구를 꽤 부쉈지만, 이곳은 무사했던 것이다.

황녀는 조금 전까지 마시던 찻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마시멜로를 듬뿍 띄운 따끈한 초콜릿이었다.

“음. 안 식었네.”

만족스러운 미소가 아이의 입가에 번졌다.

조금 전 어마어마한 마력을 뿜어낸 당사자로는 보이지 않는 귀여움.

다들 얼떨떨하다가, 주섬주섬 부서진 가구를 치우거나, 에릴에 대해 황제와 황후에게 보고하기 위해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황녀님께서 고개를 살랑살랑 저으셨다.

“다들 그 자리에서 기다려.”

“……예?”

아나트리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다리를 꼬았다. 최대한 시건방져 보이도록.

안타깝게도 아직 다리가 짧아 거만함보다는 뽀짝함에 가까웠지만.

“바로 손님이 올 거거든.”

모두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지만, 감히 황녀님의 명을 거역하는 이는 없었다.

어색한 기다림의 시간이 잠시 이어졌다.

라이언에게 사로잡힌 에릴이 귀가 아픈 비명을 내지르는 걸 빼면, 꽤 조용했지만.

에릴이 10명분 이상을 하고 있었기에, 다들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야? 내 마력 어떻게 된 거야?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나트리샤는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조용히 해. 멍청한 인형.”

“……뭐?”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나트리샤는 이제 쓸모없어진 꼭두각시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쾅!

거칠게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들어선 이는…….

“어서 와, 그랑디오르 소공작. 이제야 만나네.”

아나트리샤는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꼬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로헨은 당혹한 표정으로 멀쩡한 아나트리샤와 마력을 잃은 에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은 대체……?”

로헨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전에 예의를 갖춰야 하지 않나?”

아나트리샤는 일곱 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냉혹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네 주인의 앞에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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