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8/218)

Level 19. 메인 퀘스트 : 고래 사냥 (04)

***

내가 기억하는 소피아는 아주 극단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상냥하지만, 경멸하는 이에게는 그보다 잔인할 수 없었다.

그녀를 믿고 있던 때조차 사실, ‘성녀’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었다.

그런 성격을 문제 삼지 않았던 건, 내 성격도 그다지 좋지 못해서기도 했다.

사실……, 그때쯤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 엄청난 수라장을 견뎌 와서, 다들 한 성격 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본색을 드러냈을 때, 소피아의 모습과 말투는 너무나도 오만하고 차가웠다.

그냥 성격 좀 안 좋은 사람이라 칠 정도가 아니었다. 위화감이 느껴질 만큼.

그래서 지금 나는 그 기억을 토대로 소피아의 말투와 행동을 최대한 따라 하고 있었다.

“아니면 이번에는 네 주인이 아니라 잘못된 이상을 좇는 자들에게 항복하기라도 한 거냐?”

고개를 살짝 사선으로 들면서, 눈은 아래로 내리깔았다.

고압적으로 내려보는 듯한 시선.

그리고 우아하면서도 경멸이 묻어나는 작은 제스처.

소공작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당신이십니까?”

“아직도 말끝에 불신이 담겼구나. 나는 그저 나일 뿐. 네 눈이 어두움을 왜 내가 변했다 변명하려 드느냐? 역시 믿음이 부족한 모양이야.”

차가운 매도.

그 순간, 소공작의 얼굴에 피어오른 표정은 분명한 환희였다.

‘으.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사교도들은 진짜 변태들이야. 애초에 전 인류와 동반 자살하겠다는 놈들이 제정신일 수가 없겠지만.’

소공작은 내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바닥에 이마를 댔다.

거의 신을 경배하는 듯한 태도.

소공작이 갑작스레 나에게 보이는 태도에 주변에서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라이언은 미간을 구겼다.

[라이언: ‘어머니…….’]

그는 꽤 씁쓸해 보였고, 속내도 똑같았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대략적인 사정을 아는 라이언의 눈에, 지금 모친의 모습은 사이비에 경도된 광신자 그 자체일 테니까.

그리고 놀랍게도, 가장 충격받은 티를 낸 건, 라이언에게 제압당해 있던 에릴이었다.

“소공작님? 왜, 왜 그러세요? 어째서 저런 애에게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고작 저딴 애를 왜……?”

그리고.

짝!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며 에릴의 뺨이 돌아갔다.

나를 경배하듯 엎드려 있던 소공작이 빠르게 몸을 일으켜서, 감히 그녀의 성녀를 모욕한 하찮은 것을 벌한 것이다.

에릴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어, 어어? 어째서? 왜? 나한테 왜 이래요? 소공작님은 내 편이어야…….”

“별다른 쓸모도 다 하지 못한 버러지 주제에 감히 내 주인께 그따위로 입을 놀리다니.”

“어어……?”

소공작은 노골적으로 살기를 흘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제 실수로 이 버러지가 지금까지 주인께 저질러 온 죄는 제 목숨으로서 갚겠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것부터 치우겠습니다.”

차가운 칼날이 뽑혀 나오고, 에릴의 얼굴이 공포로 질렸다.

“시, 싫어! 왜 에릴을 죽이려고 해요? 내가 아니라 저걸 죽여야지! 소공작님은 내 편이어야 하잖아!”

마력으로 저항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내가 반각성 상태 이상을 제거하고, 마력 코어를 봉인했으니까.’

아까 내가 미하일의 마력과 부정의 마력을 함께 내뿜어 에릴에게 한 작업이 그것이었다.

상태 이상 해제 포션은 미리 준비해 두었었고.

그냥 놔두면 에릴은 세실리아보다 더 비참하게 죽을 게 분명해서였다.

미끼 역할은 끝났으니, 더는 볼일이 없지만, 어쨌든 내 눈앞에서 일곱 살짜리가 죽는 걸 보는 건 찝찝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소공작이 내 눈앞에서 에릴을 죽이게 놔둘 생각도 없었다.

“내 앞을 더럽힐 셈이야?”

“……죄송합니다.”

내 한마디에 소공작은 극히 정중하게 다시 무릎을 꿇었다.

유모와 시녀들은 얼떨떨하고 의아한 눈으로 이 상황을 보고 있었다.

소공작의 갑작스러운 행동, 게다가 이 기묘한 태도.

그리고 그녀를 대하는 나의 평소와 다른 태도와 말투 역시, 당혹스러움의 원인일 것이다.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일단 자리를 정리했다.

“나와 소공작, 라이언이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모두 자리를 피해 줘.”

유모와 시녀들은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내 단호한 명령에 불복종하지는 못했다.

유모와 시녀들과 함께, 반쯤 넋이 나간 에릴도 끌려 나갔다.

에릴은 잠시 황녀궁 구석에 감금되어 있을 예정이었다.

어쨌거나 마력으로 나를 공격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현행범으로 체포된 셈이다.

그렇게, 밖으로 소리가 새지 않도록 결계를 친 반파된 응접실에서, 마침내 나와 그랑디오르 가문의 두 사람만이 남았다.

***

소공작은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여전히 나를 경배하는 태도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나마 아까는 다른 보는 눈들이 있어서 자제한 거였던 모양이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 소공작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내 구두에 키스를 하다니…….’

이건 나도 좀 놀랐다.

소피아가 자기 부하들을 어지간히도 조련해 놓은 모양이다.

소공작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언제, 언제 깨어나신 겁니까?”

“얼마 안 되었어. 너희들이 하는 바보짓이 왜 이렇게 거슬리나 했는데……. 당연한 일이었던 거지.”

이어지는 매도에, 소공작은 더더욱 환희로 몸을 떨다가…….

눈물까지 흘렸다.

“이렇게, 이렇게 겨우 성녀님을 뵈옵다니……. 아버님께서 아시면 당장에라도 황도로 달려오실 겁니다.”

‘아, 역시 그랑디오르 공작도 한패였구먼.’

하긴, 소공작이 이 상태면 당연히 부친이자 가주인 공작도 연관이 없기 힘들었다.

되레 라이언이 사교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그 정도로 경계선이 확실했으면서도 가문 내부에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파악하고 있었고.

“어서 오라고 하도록.”

“예, 성녀님. 바로 불러올리겠습니다.”

기쁨과 희열에 푹 젖어 있던 소공작은 곧, 현실적인 의문을 떠올린 듯했다.

“한데 설마하니 성녀님께서 루스템 황실에서 새로운 생을 얻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야 그렇지. 아니니까.

“루스템의 혈통들이 가진 간악하고 어리석은 힘을 생각하면, 당연히 진리를 따르는 우리의 적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요.”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것까지 운명인 거지. 이번에야말로 잘못된 모든 것을 다 바로잡을 수 있도록, 적진의 심장부에 내 자리가 마련된 것일 터.”

“아아!”

그놈의 ‘운명’이라는 말은, 소피아의 말버릇 중 하나였다.

“당신과 나, 미하일이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된 것도 거대한 운명의 일부인 거랍니다.”

웃기지도 않았다.

그놈의 운명 따위, 이번에는 확실하게 박살 내 버릴 테니까.

어쨌건 이렇게 소공작 낚시가 성공하며, 나는 얼핏 가지고 있던 예상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역시 이들도 전생의 기억은 거의 가지지 못한 거야.’

우리 쪽에 전생의 기억을 완전히 가진 것이 나뿐인 것처럼.

나를 제외하면…… 아마도 미하일 정도.

그리고……, 소피아 역시 전생을 기억하고 있을 확률이 컸다.

하지만 그 외의 인물들은 전생의 존재를 아예 자각도 하지 못하거나, 기억이 있어도 극히 파편적인 것뿐인 모양이다.

소공작과 말을 나눌수록 확신할 수 있었다.

가장 단편적으로, 그녀는 ‘성녀’의 이름조차 다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따르는 주인이 있고, 그녀를 성녀라 부르며 모셨다는 것만 알았다.

“부족한 몸이지만, 그래도 이상은 잊지 않았습니다. 올바른 죽음으로 모두를 인도해야 한다는 거룩한 의무만은요.”

그녀는 자부심과 기쁨에 차서 신앙 고백을 하고 있었다.

‘그것부터 잊었어야지.’

2회 차 인생까지 저 쓸데없는 건 안 잊어버리고 가져와서 이 꼴인 건가.

나는 속내를 숨긴 채 차갑고 우아하게 웃었다.

“훗. 당연한 일인 것을. 새삼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 거냐?”

“그럴 리가요! 그저, 그저…… 감격에 겨웠을 뿐입니다.”

나와 모친의 대화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라이언은 기분이 복잡한 듯했다.

‘하긴, 자기 어머니와 가족이 진짜 미친 사교도라는 걸 확인받은 셈이니.’

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건 칭찬해 줄 만했다.

나이에 비해 저런 부분에 꽤 능숙했다.

아마 라이언은 그랑디오르에서도 이렇듯 자연스럽게 제 속내를 숨겨 왔을 것이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고.

그런데 소공작이 기억이 거의 없는 상태임에도, 자기 자식인 라이언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나는 직접적으로 이걸 확인했다.

“그나저나 어미가 아들만 못하군. 라이언은 누구보다 나를 먼저 알아보고 나의 첫 번째 종이 되었는데, 감히 나를 시험하려 들고 말이야.”

“그 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이 목숨으로 갚겠사옵니다.”

즉시 소공작은 칼을 제 목에 들이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막지 않았으면 진짜로 베었을 기세였다.

“그만.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내 발치를 더럽히지 말아라. 그리고 네 목숨에는 아직 쓰임이 남아 있어.”

“아아! 예, 성녀님! 이 목숨은 마땅히 당신의 뜻을 위해 쓰여야지요.”

그녀는 그리 말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라이언 네가 자랑스럽구나. 우리 중 누구보다 먼저 주인을 알아보고 스스로 섬기다니.”

“……영혼의 주인을 알아본 덕분이지요.”

라이언은 복잡한 심경을 애써 감춘 채, 장단을 잘 맞췄다.

“드디어 우리 가족 모두에게 조금도 숨기지 않아도 된다니 기쁘구나.”

“……할아버님은 왜 저를 계속 믿지 못하셨던 걸까요.”

“주인께서 부재하신 동안, 사방이 적뿐인 상황에서 조직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아버님께서 얼마나 애쓰셨니. 너에 대한 것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셨을 거다. 지금 이렇게 네가 성녀님을 따르는 것을 보면, 누구보다 기뻐하실 게 분명해.”

놀랍게도, 이렇게 말하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소공작은 처음으로 라이언을 향해 어머니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 어머니.”

라이언은 쓴웃음을 애써 삼켰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제국 내 사교도 조직의 우두머리인 그랑디오르 공작.

그는 아마도 전생의 기억 일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