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9. 메인 퀘스트 : 고래 사냥 (05)
***
에릴은 황녀궁 구석의 방에 갇힌 채 멍하니 문을 보았다.
문에는 작은 손톱자국이 무수히 나 있었다.
에릴이 어떻게든 방에서 탈출하려고 애쓴 흔적이었다.
하지만,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마력을 조금만 흘려도 과자처럼 부서졌을 하찮은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내보내 줘! 날 내보내 달라구! 왜 가둔 거야!”
하지만 문밖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아이의 발악은 더더욱 커졌다.
“내가 너희를 그냥 놔둘 줄 알아? 다 죽여 버릴 거야! 난 황족이라구! 감히 황족을 이렇게 대하다니!”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치기에 고조된 에릴은 결국 무모한 짓을 벌였다.
갇혀 있는 방은 3층이었는데, 키가 큰 정원수를 향해 창문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아악!!”
하지만 마력도 잃은 일곱 살 아이의 힘과 순발력으로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아이는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발아래의 땅이 너무나도 멀었다.
마력이 있었을 때에는 아무것도 아닌 높이였다.
아무리 마력을 다시 끌어올리려고 애써 봐도 소용이 없었다.
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에릴은 결국 공포심을 참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다.
“살, 살려……, 살려 주세요!”
간신히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손끝이 미끄러졌고.
“꺄아아악!!!”
아이는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어?”
아니,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에릴은 누군가의 손에 안전하게 들려 있었다.
에릴의 주홍색 눈이 커다래졌다.
“오, 오라버니?”
에릴이 정원수에서 떨어지는 걸 구해 준 당사자인 루퍼스리안은 ‘오라버니’ 소리에 미간을 콱 찌푸렸다.
더러운 것을 만진 듯 질겁한 손이 떨어지자 에릴은 그대로 잔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감격과 희망이 아이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오라버니는 다른 거야! 라이언같은 배신자와는 달라! 나를, 나를 봐주는 거야!’
그 루퍼스리안이 조금 전 자신을 바닥에 내팽개친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에릴의 희망은 바로 이어진 루퍼스리안의 차가운 목소리에 산산조각 났다.
“누가 네 오라비라는 거지?”
“에, 에릴의 오라버니시니까…….”
“난 네 오라버니가 아니야. 한 번만 더 그따위로 부르면 혀를 뽑아 주지.”
“그치만 에릴이 황녀가 아니라도 그래도 황족이니까 오라버니가 맞잖아요! 그러니까 오라버니도 절 구해 주신 거잖…….”
루퍼스리안의 수려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난 널 구한 적 없어.”
“하지만 방금, 분명히……!”
“난 리샤의 정원이 더렵혀질까 봐 떨어지는 쓰레기를 주운 것뿐이야.”
“어,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상처받았던 아이는 곧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왜곡했다.
“아! 그 애가 그런 거죠? 황녀가 오라버니에게 에릴에 대한 나쁜 말을 해서, 그래서 에릴을 오해하시는 거예요. 그건 다 이간질이에요! 에릴은 사실 착한 아이라구요!”
“너 진심으로 착각하고 있었구나? 네가 감히 리샤의 라이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맞잖아요! 그 애가 에릴을 얼마나 싫어하고, 주변에 험담을 하고 다니는데!”
하지만 루퍼스리안은 코웃음 칠 뿐이었다.
“나랑 리샤가 둘이 있을 때 네 이야기 따위를 할 거 같아? 관심을 가질 리가 없지.”
루퍼스리안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리샤가 어린애들에게는 너무 약해서 큰일이야. 자기도 겨우 일곱 살짜리 어린애면서.”
그렇게 말하는 루퍼스리안의 표정이나 어투 역시 열두 살이라기엔 많이 조숙했다.
“그러니까 내가 지켜 주는 수밖에.”
소년의 표정이 다시 사나워졌다.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길이야. 너, 리샤를 공격했다면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네 변명 따위 들으려고 온 건 아니고.”
소년의 거친 손길이 아이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꺅!”
“감히 리샤에게 그딴 짓을 한 걸 내 손으로 죽여 버리려고 온 건데.”
소중한 동생을 해하려 한 자를 응시하는 소년의 살기가 더더욱 짙어졌다.
히죽 웃는 미소는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의 것이었다.
“너, 마력을 잃었네?”
“아, 아니에요. 곧, 곧 되돌아올 거예요!”
에릴은 공포로 몸을 덜덜 떨면서도 우기는 걸 포기하지는 않았다.
루퍼스리안은 환하게 웃었다.
“걱정 마. 마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면 티끌만큼이나마 위험할 수 있으니 바로 죽여 버릴 생각이었는데, 그렇진 않으니까.”
“……?”
“대신 평생 죽는 게 나았다고 후회하면서 살게 해 줄게. 감히 리샤를 건드리려고 한 죄의 대가는 치러야지.”
에릴은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가 빠져나갈 구멍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
나는 꽤 성공적으로 낚시를 끝냈다.
제국 내 사교도의 머리는 아니지만, 몸통임은 분명한 그랑디오르 소공작을 완전히 속여 넘겼다.
그녀는 나를 완전히 소피아로 착각하고 몇 번이나 부담스러운 충성 맹세를 반복하고 갔다.
그리고 당연히.
‘제국 내 사교도 명단 겟!’
사교도 최고위 간부인 그랑디오르 소공작이 직접 바친 명단! 정확성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미 지난번 파셀 백작저에서 벌였던 라이언과의 짜고 치는 연극 때 확인한 인물들도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진짜 BQ벌레같은 놈들이네. 이렇게나 퍼져 있다니.’
BQ벌레가 눈에 한 마리가 보이면, 사실은 어딘가에 100마리가 숨어 있는 거라고 들은 적 있었다.
이놈들도 비슷했다. 내가 직접 확인한 놈들 외에도 숫자가 짜증 날 정도로 많았다.
‘싸그리 박멸해 주겠어!’
일단은 제국 내부터.
원래 해충 구제는 자기 집 안부터 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물론 다른 나라에 있다고 해서 놔둘 생각은 없었다.
‘제국 내 정리가 끝나면 다른 나라 원정 가서라도 모조리 없애버리겠어!’
그것이 결국 우리 가족을 지키는 일일 테니까.
그런 내 곁에서 라이언은 여전히 복잡한 표정이었다.
<궁예> 스킬은 제한 시간이 한참 전에 지났지만, 굳이 다시 켜 보지 않아도 알겠다.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지.
나는 대놓고 물었다.
“망설여져?”
“……예?”
라이언의 초록색 눈이 나를 향한다.
“막상 가족들이 진짜로 멸망을 부르려는 미친 사교도라는 걸 확인했어도, 가족과 싸우려니까 힘들지? 그래도 가족이니까.”
소년은 대답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 있게 아니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힘듭니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상상만 해도 괴로우니까.
만약 내가 우리 가족과 이런 일로 갈라져 버리게 된다면…….
그냥 가능성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심장이 서늘해졌다.
내가 이 세계를 지키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가족이므로.
하지만 우리 가족이 그럴 리가 없으니, 정말 다행이다!
-라고 생각해도, 그걸 지금 고통받는 라이언 앞에서 대놓고 말할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선선히 말했다.
“지금 나한테 한 맹세 철회한다고 해도 용서해 줄게.”
“예?!”
그는 나에게 맹세했다.
그랑디오르 가문이, 그의 가족이 정말로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자들이라면.
설사 가족이 적이라 해도 나를 따르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맹세를 저버리고 가족에게 가도 용서해 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방심하고 있다가 심장이라도 찔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던 라이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제가 황녀님을 배신해도 용서해 주신다고요?”
“응! 딱 한 번이지만!”
나는 헤죽 웃었다.
“그리고 적으로 만나면 바로 패 버릴 거지만!”
주먹을 들어 올리자, 내내 씁쓸함과 경악만을 곱씹고 있던 라이언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틈이 없이 유들유들해서 짜증 나던 그 미소였다.
“그러면 절대 배신하면 안 되겠군요.”
“왜?”
“제가 배신하고 가면, 황녀님은 만나자마자 저부터 때리실 거 아닙니까.”
“맞아. 잘 아네?”
라이언은 열네 살 소년다운 티 없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황녀님의 주먹은 무서우니 절대 배신은 못 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나는 툭, 하고 말했다.
라이언이 물었다.
“제가 배신하지 않아서 기쁘신 겁니까?”
“응! 당연하잖아!”
이건 진심이었다.
나는 전생의 하무현도 오랫동안 보았었다.
오빠와 그가 얼마나 친했는지도 잘 안다.
기억하는 건 나뿐이지만 그 친애와 신뢰로 쌓은 시간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 시간을 통째로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정말로 기뻤다.
헤헤 웃는 나를 보고, 잠시 또 어디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던 라이언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가 내민 손에 나 역시 손을 마주 내밀었다.
그러자 라이언은 다시 한 번 충성과 맹세의 키스를 내 손등에 바쳤다.
“제 목숨과 영혼을 다해, 황녀님을 섬기겠습니다. 부디 이 한 몸을 당신의 뜻을 세우는 데에 도구로서 써 주십시오.”
너무나도 정중하고, 또 신성해 보일 정도로 진심을 다한 맹세였다.
그래서 나는 왜 이렇게 오버하느냐 하는 농담은 하지 못했다.
그가 이번 생의 가족까지 버리고 선택하고 결심한, 그 맹세의 무게를 절실히 느껴서였다.
그래서 나도 진지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도구는 필요 없어.”
라이언은 조금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나는 헤죽헤죽 웃었다.
“나한테 필요한 건 믿을 수 있는 동료이자 친구야.”
“황녀님.”
“내 친구가 되어 줄래? 동료가 되어서 함께 싸워 주지 않을래?”
라이언은 벅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번에는 라이언이 충성의 맹세를 하는 게 아니라, 친구이자 동료로서 서로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순간.
쾅!
“리샤!”
눈치는 진작에 황궁 분수대에 빠뜨린 게 분명한 오빠놈이 달려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