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9. 메인 퀘스트 : 고래 사냥 (06)
“리샤! 어디 다치진 않았……?”
오빠는 앞뒤 안 보고 달려왔는지 시종의 알림은 물론, 노크도 없이 벌컥 문부터 열었다.
데구루루.
오빠 놈의 파란 눈이 나와 라이언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고는 곧 미간을 팍 찌푸리더니 득달같이 달려와서 나를 안아 들었다.
당연히 라이언과 잡고 있던 손은 떨어져 버렸다.
오빠는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뭐야, 왜 이놈이 여기 있어?!”
나는 지나치게 흥분한 오빠의 팔을 톡톡 쳤다.
“라이언은 내 기사잖아. 당연히 호위하려고 같이 있지.”
“다른 시녀들은 다 물려 놓고 단둘이 있으니까 그렇지! 이놈이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오빠는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라이언이 뭔 짓을 한다 해도 내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자 라이언이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제 충성에 그렇게 믿음이 없으시다니, 실로 슬픕니다.”
“너처럼 도둑놈 같은 면상을 어떻게 믿어!”
둘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나는 자연스러운 의문 하나를 떠올렸다.
“근데 오빠,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내가 아직 가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방금 오빠는 분명히 내가 다치진 않았는지 걱정하며 달려왔다.
이건, 최소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듣고 온 사람의 태도였다.
그러자, 오빠는 아주 뻔뻔하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내 궁의 궁인 중 몇 명을 황녀궁에 상주시키고 있거든!”
“뭐? 왜?”
“왜긴! 리샤한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나한테 알리라고 한 거지!”
황당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을 상주시키고 있었다고?
“덕분에 바로 알고 달려온 거지! 괜찮아, 리샤? 어디 다치진 않았어? 그 에릴인지 뭔지 너 따라 하려던 못생긴 게 감히 우리 리샤를 공격했다면서.”
“그래 봤자였지. 오빠도 알잖아. 걔 마력.”
“물론 리샤의 그림자에도 못 미치긴 하지.”
오빠는 연이어 작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게 감히 내 동생을 죽이려 한 건 분명한 거네.”
흐리지만 선명한 살기가 꾸물거렸다.
“리샤. 이번에도 그거 용서할 거야?”
“아니, 용서할 생각은 없어. 멀리 쫓아내라고 할 생각이야. 이번에 마력도 잃었거든. 그럼 더는 황족도 아니니까. 굳이 황도에 둘 필요는 없겠지.”
그랑디오르 소공작을 손에 넣었으니, 그 애는 더는 쓸모가 없었다.
자꾸 눈앞에서 앵앵대는 것도 짜증 나니, 이쯤에서 적당히 먼 곳에 보내게 해야지.
“……그래. 나도 귀찮았다구. 볼 때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면서 말이야. 날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리샤뿐인데!”
오빠의 미소 뒤로 만개한 화원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마주 헤죽 웃었다.
“맞아. 나도 딴 애가 오빠를 오빠라고 부르는 건 싫어.”
그러자 오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나는 연달아 오빠를 기쁘게 할 말을 또 던졌다.
오빠가 늘 좀 오버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 안전을 걱정하는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도 잘 알고.
또 무엇보다 고마웠으니까.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 말에 오빠의 표정이 진심 어린 기쁨으로 달아올랐다.
조금 울컥한 것도 같았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 칼날처럼 예리해져 있던 오빠의 분위기는 완전히 누그러졌다.
그렇다. 조금 전 저 화려하고 화사한 미소는, 뭔가 꿍꿍이를 숨기거나, 누군가에 대한 적의를 가리기 위한 가면이었던 거다.
전생에도 저런 얼굴로 사라져서는 배신자 몇 명을 던전에 묻어 버리고 온 적이 많았다.
“오빠. 라이언은 안 돼.”
오빠는 무슨 소리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입이 댓 발로 삐져나왔을 뿐.
“칫. 역시 편들어 주는구나.”
라이언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방금 제가 한 세 번쯤 목숨을 구한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황녀님.”
오빠는 다시 사나운 눈빛으로 라이언을 노려봤다.
“리샤의 은혜를 알면 당장 꺼져.”
“안타깝지만 황자님. 저는 황녀님의 기사라, 황녀님의 명령만을 따릅니다. 황제 폐하의 명이라 해도 황녀 전하의 명을 우선시해야 하니까요.”
황족이 직접 선택한 호위 기사라는 건 그런 것이다.
반역이라 해도 주인의 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절대적인 우군.
‘그러니까 아까 내가 라이언이 배신해도 용서해 주겠다고 한 건 대단한 거지!’
그리고 오빠와 라이언의 언쟁은 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오빠보단 한발 늦었지만, 놀랄 정도로 빠르게 부모님이 도착하셨기 때문이다.
“아가! 괜찮으냐?”
“우리 애기는? 우리 애기는 괜찮은 거냐?!”
문이 박살 날 듯이 열리고, 엄마와 아빠가 거의 동시에 들어오셨다.
두 분은 오빠에게 안긴 나를 보고 겨우 안도하셨다.
“다행이야. 행여나 머리털 한 올이라도 다치지 않았을까 조바심 내면서 달려왔는데.”
“물론 엄마는 우리 아가를 믿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어서…….”
두 분을 멍하니 보다가 나는 작게 물었다.
“혹시 두 분도 내 궁에 소식통 심어 두신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내가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달려오실 수는 없다.
지금은 두 분 다 공무가 있으실 시간이니까.
마력 흐름의 이상을 느끼고 오셨다 해도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검은 수정의 특성상, 한 번 발동되면 외부에서 마력 폭발이나 흐름을 감지하기 어려우니까.
그리고 그걸 감지하셨다면 내가 소공작과 만나고 있는 사이에 오셨을 거다.
그게 아니라 지금 오신 걸 보면, 두 분도 오빠랑 비슷한 일을 하셨다는 결론이 나온다.
내가 지그시 바라보자, 아빠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까셨다.
“우리 아가가 좀 걱정되기도 하고. 매 시간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엄마는 화통하게 웃으셨다.
“들켰네? 셀리나가 다 알려 줬단다.”
아, 하긴 셀리나가 원래 엄마 시녀 출신이었었지…… 가 아니라!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요! 온 가족이 다 황녀궁을 감시하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경악해서 묻자, 오빠랑 아빠는 내 눈을 피했다.
보나 마나 걱정되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겠지.
아니,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좀 심하잖아!
나도 모르게 양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자 엄마는 어쩐지 엄한 표정으로 다가와 오빠에게서 나를 받아 드셨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여셨다.
“아나트리샤 루스템.”
“어, 아. 네!”
나도 모르게 몸이 바짝 긴장하게 굳어 버린다.
어쩐지 전생에 장난치거나 사고를 쳤다가, 엄마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안서나. 이리 와서 앉아 봐. 얘기 좀 하자.”
각성자고, S급 헌터고 뭐고 다 소용없었다.
화가 난 엄마의 앞에서는.
엄마는 여전히 엄한 목소리로, 하지만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가셨다.
“네가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건 알고 있단다.”
“……네?”
“지난번에 말해 준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눈이 커다래지고 입이 둥글게 벌어졌다.
다 안다고?
눈을 살짝 굴려 보자, 아빠랑 오빠도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모를 리가 없지, 아가. 이게 다 아빠가 네게 믿음을 주지 못해서…….”
그건 아니거든요!
다행히 내가 나서기 전에, 엄마가 나서서 아빠의 땅파기를 진압해 주셨다.
“그건 아냐, 여보. 몇 번이나 말했잖아? 당신 잘못이 아닌 일로 자책하지 말라고.”
“맞아요, 아빠.”
오빠도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아빠의 눈이 순식간에 감동으로 촉촉해졌다.
“그래, 당신 말이 맞지. 그런데도 자꾸 이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하게 되네. 아마 당신이랑 떨어져 지낸 기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가 봐.”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더없이 가련하게 눈을 내리뜨셨다.
그리고 엄마를 뒤에서부터 폭 끌어안다가, 결국 그 옆에 있던 나까지 함께 안았다.
그러자 오빠 역시 와락 나랑 엄마를 끌어안았고, 엄마는 웃으며 오빠도 나와 함께 안아 올리셨다.
우리 가족은 마치 한 덩어리처럼 엉겨 붙었다.
서로 떨어지기 싫은 것처럼.
나는 새삼 가슴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다들 내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단다.
그런데도 화내거나 추궁하지 않고 그냥 기다려 준 거다.
내가 먼저 말해 주기를.
‘물론, 대신 스토킹을 좀 하긴 했지만…….’
감동이 조금 달아나려는 생각을, 나는 꾹 눌렀다.
어쨌든 가족들이 알고도 모른 척하면서 날 걱정했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한 거다!
오빠는 살짝 변명하듯이 속삭였다.
“리샤가 우리를 지키려고 너무 무리하는 거 같아서 걱정됐어.”
“맞아. 우리 아가가 혼자 위험한 일을 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아니나 다를까. 이 난리가 벌어졌으니…….”
아빠는 반쯤 박살 난 응접실을 보며 한숨을 쉬셨다.
음. 다 맞는 말이라서 뭐라고 하기 그랬다.
이건 내 잘못이 맞았으니까.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일부러 속이려거나 엄마, 아빠, 오빠를 못 믿은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 전에, 우선.
나는 가족애와 감동의 도가니 속에서 혼자 뻘쭘하게 벽에 붙어 있는 라이언에게 말했다.
“나가서 기다려, 라이언.”
“예, 전하.”
조금 전 오빠가 축객령을 내렸을 때와 달리, 라이언은 군말 없이 방을 나갔다.
유일한 외부인으로서 우리 가족의 감동적인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민망함에 처해 있다가, 마침내 벗어날 수 있게 되자 안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빠의 입술이 삐죽거렸지만, 별말은 없이 넘어갔다.
나는 가족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