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0. 메인 퀘스트 : 힐링 타임 (03)
나는 심하게 당황했다.
‘아니, 그랑디오르 일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가족 여행?’
명목은 가족 여행이지만, 사실상 나를 위한 요양 여행이라는 건 분명했다.
내가 뭐라고 한마디를 하기도 전에, 이미 준비가 다 끝나 있었다.
엄마, 아빠, 오빠가 쑥덕쑥덕하더니 계획이 뚝딱 정해져 버린 것이다.
내가 뒤늦게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직 그랑디오르 가문 내부의 사교도도 다 못 잡았잖아요!”
“하지만 소공작은 완전히 너를 자신들의 주인으로 오해하고 있다면서.”
전생부터 이어진 성녀 소피아와의 악연에 대해선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랑디오르 일을 설명하면서 내가 부정의 마력을 흉내 내 그들의 실종된 우두머리인 척했다는 건 이야기했다.
“게다가 그랑디오르 공작이 소식을 듣고 황도로 올라오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그사이에 좀 쉬어도 되지 않겠니.”
“맞아. 리샤는 쉬어야 한다구. 일곱 살 생일 전후로 얼마나 일이 많았는데!”
일은 별로 안 많……, 아, 아닌가?
세실리아와 의식 증명을 치렀고, 미하일도 구해서 돌려보냈었고. 벨론드 대공도 털었다.
아멘다도 구해서 시녀로 들였지. 거기에 아빠의 누명을 해결하고, 엄마와도 재회하고. 라이언도 기사로 맞았고…….
으음. 사소한 것들까지 합치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건들을 경험하긴 했다.
겨우 몇 달 사이인데.
나는 새삼스레 벽면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방금 자다 깨서 그런지 부스스하게 떠 있는 곱슬곱슬한 금발.
양 뺨은 젖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보는 사람들마다 만지고 싶어할 정도로 몰랑몰랑해 보였다.
팔다리도 오동통하니 짤막해서, 어지간한 의자에 앉으면 발이 뜰 정도다.
‘영락없이 일곱 살 어린애네.’
맞다. 알고는 있었다.
‘지금’의 내 몸이 일곱 살이라는 것 정도는.
툭하면 ‘리샤는 일곱쨜, 뿌우☆’ 모드로 잘 써먹고 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가족과 아군 적군을 막론하고 딱 한 명만 나를 진정으로 일곱 살로 대하지 않았던 거다.
오로지 나만.
전생에 마왕을 죽인 S급 헌터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지금의 내 몸은 그렇지가 않은데.
그래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무리하면서 이런 어린애를 다그치고 있었던 거다.
고개를 돌리자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다.
나에 대한 애정과 걱정만으로 가득 찬 세 얼굴.
전생에도 현생에도, 내가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가족들의 애정.
나는 결국 질 수밖에 없었다.
“에효.”
항복 같은 작은 한숨이 떨어지자, 가족들은 빠르게 눈치채고 환호성을 질렀다.
“좋았어!”
“어서 마저 진행시키도록!”
“네, 폐하! 짐은 이미 완벽하게 싸 두었고, 마차도 준비 완료입니다!”
뭐? 나 어제 쓰러졌고, 지금 아침인데?
설마 다들 잠 안 잔 거야?
그렇게 나는 그랑디오르 소공작에게 보낼 몇 가지 명령을 라이언에게 전한 이후.
정신 차릴 새도 없이 가족들에게 납치(?)되어 황도 근교의 몬토아 온천 별궁으로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
몬토아 온천 별궁은 이름 그대로 온천 지대에 지어진 별궁이다.
게다가 높은 산지에 위치하고 있어서, 근처의 몬토아 산맥이 가까이서 보여, 풍광도 멋있었다.
따끈따끈한 물에 동동 떠서 산머리 위에 구름이 낀 장면을 보고 있자니, 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하아, 좋다아…….”
수영이야 당연히 할 줄 알았지만, 지금 내 키에는 어지간한 수영장보다 큰 이 온천탕이 너무 높았다.
그래서 부모님과 궁인들은 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다 했다.
어디선가 공수해 왔다는 물에 동동 뜨는 재질의 동글동글한 스펀지 닮은 것들로, 일종의 내 전용 튜브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나는 그걸 몸에 돌돌 만 채로 온천물 위를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신기한 건, 여기도 수영복이라는 게 있다는 거다.
물론, 전생의 지구에서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완전한 방수 재질도 아니고, 착 달라붙지도 않았다. 그냥 좀 더 간편하고 얇은 원피스 느낌?
어쨌든 귀족들은 물놀이를 할 때 이런 수영복을 입는다고 했다.
지금 나는 노오란 프릴이 가득 달린 호박바지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이대로 온천수에 동동 떠 있으려니, 아마 누가 보면 노란 호박이 물 위에 뜬 것 같지 않을까?
어쨌든 몸에서 힘을 빼고 해파리처럼 흐늘거리고 있자니 그야말로 천국.
“녹는다아…….”
존재 자체를 몰랐던 피로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채신머리없게 첨벙거리고 있던 오빠가 까르르 웃으며 나에게 물을 뿌렸다.
촤악!
“꺄하하! 리샤! 오빠 잡아 봐라!”
나는 쫄딱 젖은 채로 환하게 웃으며 오빠에게 대답했다.
“그래! 잡히면 가만 안 둘 거야!”
귀한 온천수가 사방으로 튀었고.
당연히 오빠는 곧 내 손에 잡혀 응징당했다.
부모님도 그런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꽁냥꽁냥 중이셨다.
“여기에 애들과 함께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긴, 우리 허니문 장소였지.”
“맞다. 루퍼스가 여기서 생겼…….”
음, 별로 알고 싶지 않은 TMI를 들어 버렸다.
나는 잠시 마력으로 강화한 청력을 원래대로 돌리고는, 짧은 두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러자 찰방찰방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새삼 내 작은 손이 신기했다.
일부러 마력은 전부 갈무리해 두고, 전생의 진짜 일곱 살 때를 떠올려 보며 행동해 보기로 했다.
별궁에서 쉬는 동안은.
‘어쨌건 지금 나는 일곱 살이 맞으니까. 가족들과의 추억도 충분히 쌓고 즐겨야지.’
어떻게 되찾은 행복인데 말이다.
‘적들과 싸우는 데만 집중하느라 한동안 가족들을 두 번째로 밀어 놓긴 했어.’
이건 분명히 반성할 일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이 시간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즉, 신나게 놀기로 했다!
***
온천에서 손가락 발가락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놀고.
엄마 품에서 늘어지게 낮잠도 잤다.
아빠와 숨바꼭질하다가 정원이 망가진 건, 정원사들에게 좀 미안했다.
그러다가, 나는 부서진 정원 담장 바깥쪽에서 아주 좋은 장소를 발견했다.
“우와! 아빠 여기 보세요!”
“어디……, 아!”
아빠의 푸른 눈이 살짝 떨리더니, 곧 추억으로 젖어 들었다.
나는 중정 쪽의 호수를 얼려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던 엄마와 오빠를 불러왔다.
“엄마, 오빠! 여기 봐 봐요!”
내가 파닥파닥하며 가리킨 곳은, 놀라울 정도로 순수한 진녹색 클로버로만 뒤덮인 너른 구릉이었다.
이대로 데굴데굴 굴러서 내려가려다간 하루가 넘게 걸릴 것처럼 크고 높은 구릉.
몬토아 별궁은 이 구릉지대 중심에 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황궁 정원 구석에 있던 클로버 밭보다 훨씬 훨씬 크고 넓었다.
이곳을 보고 엄마와 오빠의 눈빛도 아련해졌다.
당연했다.
클로버는 우리 가족의 추억이 어린 매개체니까.
아직도 오빠는 내가 어릴 때 준 클로버가 든 결정 피불라를 가장 아꼈고.
아빠의 집무실 테이블 위에도 세 송이의 클로버가 든 결정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엄마도 내가 만들어 준 클로버 화관을 마력 결정으로 보호해서 황후궁 드레스룸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셨다.
오빠보다 마력 컨트롤이 더욱 세심한 엄마가 만든 화관 결정은, 그야말로 보석 티아라처럼 반짝거려서 너무 예뻤다.
이렇게 드넓게 펼쳐진 클로버 들판을 보고 있자니, 새삼 행복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전생에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앞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행복이 있는 셈이다.
이걸 함께 보는 가족들이 내 곁에 있으니까.
나는 잠시 머릿속에 사는 30살이 넘은 S급 헌터를 내려놨다.
그리고 그냥 일곱 살짜리가 되기로 했다.
“꺄하하하!!!”
머리로 내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낼지 계산하고 고민하기 전에, 팔다리를 먼저 움직였다.
마음이 바라는 대로.
내가 달려 나가자 오빠가 헐레벌떡 따라왔다.
“리샤! 천천히 가! 넘어지겠어!”
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내달렸다.
그리고 결국 넘어져서 데굴데굴 구르고 말았다.
충분히 내 힘으로 멈출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클로버가 푹신푹신할 정도로 깔려 있는 데다, 어린 몸은 가볍고 유연해서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초록 풀밭을 데굴데굴 구르는 나를 한달음에 달려온 엄마가 안아 올렸다.
엄마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채, 흙투성이가 된 머리카락을 털어 주었다.
“에구. 흙이랑 풀까지 다 묻고 엉망이네.”
“에헤헤.”
“리샤! 리샤! 이것 봐. 오빠도 굴렀어!”
옆에서 오빠는 또 쓸데없이 수선을 피우고 있었고.
아빠는 그런 오빠를 안아 올렸다.
엄마는 내 머리카락과 옷에 묻은 풀 쪼가리와 흙을 털어 주다가, 무언가를 하나 발견했다.
내 머리카락에 걸려 있던 작은 클로버 하나.
“네 잎이네.”
“정말요?”
나는 눈을 반짝거렸다.
작은 손을 내밀자, 엄마가 네 잎 클로버를 건네주었다.
자그마한 손가락 사이에서 팔랑거리는 네잎 클로버 하나.
나는 이것이 어떤 대답인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행운이, 내 손에 들어올 거라는.
그런, 예언처럼.
나는 이 예감이 제발 현실이 되기를 바라며, 네 잎 클로버를 소중하게 간직했다.
***
그리고 그날 밤.
몬토아 별궁의 내 침실에, 그가 찾아왔다.
달빛이 테라스 위로 비쳐 들고 있었다. 밤의 어둠과 달빛 속에서, 창백한 소년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황녀님.”
낮에 너무 신나게 노느라 반쯤 잠들어 있던 나는, 가물거리던 눈을 번쩍 뜨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미하일!”